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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까스 Mar 25. 2023

도파민네이션 - 애나 렘키(단상)

52P


어린이가 심리적으로 연약하다고 여기는 것은 철저히 현대적인 사고방식이다. 고대에 어린이는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축소형 성인으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서구 문명에서 어린이는 선천적으로 악하다고 간주되었다. 부모와 보호자가 할 일은 아이들이 사회화를 통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엄격하게 훈육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체벌과 공포심을 쓰는 전략은 전적으로 용인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 이런 생각을 쭉 타고 올라가다 보면 프로이트가 등장한다.


  요즘처럼 양육에 지대한 관심이 쏠려있는 시대가 역사적으로 존재했을까? <금쪽이>로 대표되는 육아, 양육 프로그램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아이들에게 마땅히 해주어야 하는 것들의 리스트가 끝이 없는 요즘이다. 역설적으로 한국의 출산율은 역사적 저점을 넘어, 전세계 최저치를 매년 갱신하고 있다. 합계출산률 0.7명대, 2022년 올 한 해 출생자는 25만명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읽은 <팩트풀니스>에 따르면 국가의 소득 수준이 높아질수록 출산율이 내려가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은 출산율이 내려가는 속도마저 역대급인 듯 하다. 하지만 단순히 통계적 수치만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보다 GDP가 높은 많은 국가들 중에서도 출산율이 1 미만으로 내려오는 국가는 없다. 물론 이는 앞서 말한 양육 부담과 깊은 관련이 있겠다. 이러한 양육 부담이 '어린애를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온다면, 프로이트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친 일일까?

  이 책에서 어린이를 언급한 이유는, 청소년기(10대)에 마약에 중독되는 미국인들이 많아서이다.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어린 나이에 마약에 빠지는 이유를 일정 부분 훈육 방식에서 찾고 있는 듯 하다.



53P


우리가 아이들을 역경으로부터 과보호한 탓에, 아이들이 역경을 그토록 두려워하게 된 건 아닐까? 우리가 아이들을 거짓으로 칭찬하고 현실을 감추는 방식으로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인 탓에, 아이들이 참을성이 떨어지고 권리만 더 내세우며 자신의 성격적 결함에 무지하게 된 건 아닐까? 우리가 아이들이 원하는 걸 다 들어준 탓에, 새로운 쾌락주의 시대를 조장하게 된 건 아닐까?


  거짓으로 칭찬하고 현실을 감추는 말로 자존감을 높이는 것은 장기적으로 좋은 전략이 아니다. 거짓으로 쌓아올린 성은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격적 결함에 무지한 아이들은 언젠가는 크게 화를 당할 수밖에 없다. 아니, 화를 당하면 오히려 다행이다. 거짓을 쌓아올린 성을 빨리 무너트리면 무너트릴수록 처음부터 단단하게 다시 쌓아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화를 당하지 않는 경우에는 끝까지 자신의 결함을 알아챌 방법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본인의 행동을 정당화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인간관계의 폭이 점점 좁아지다가 마침내 자신이 빚어낸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히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보호를 받고 자란 사람들 또한 크게 성장할 수 없다. 아이들은 자신의 하늘이 깨지는 천외천의 경험을 많이 할수록 빨리 성장할 수 있다. 보통의 경우 이러한 역경과 시련은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지만, 과보호를 받는 아이들은 역경을 경험할 길이 없다.



57P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얘기한 것처럼 "매스커뮤니케이션 산업은 대부분 옳고 그름과 무관한데 비현실과 관련이 있을 만큼 거의 완전히 무관하고... 이 거대한 산업의 발전은 기분 전환에 관한 인간의 무한에 가까운 욕구를 고려하지 못했다."


  고려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좋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인스타, 틱톡 등의 SNS로 대표되는 매스커뮤니케이션 산업은, 작가가 언급한 기분 전환에 관한 인간의 욕구와 양의 피드백(positive feedback)을 형성한다. 가벼운 기분 전환을 위한 '소일거리'로 시작한 SNS는 이제 현대인의 주요 소통 방법이자 정보의 원천이자 경제 활동 영역이 되었다. 내가 그 산 증인인데, 잠깐 심심해서 인스타스토리 앱을 켜 릴스를 보다보면 어느새 1시간, 2시간이 훌쩍 지나 있는 것이다! 나는 핸드폰 배경화면에서 인스타 앱을 멀리 치워버리고 나서야 그 중독적인 '기분 전환'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58P


"지루함이란 지루하기만 한 게 아니에요. 끔찍할 수도 있죠. 뭔가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더 큰 문제 앞에 우리를 떠밀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루함은 발견과 발명의 기회가 되기도 해요. 새로운 생각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공간을 만들죠. 그게 없으면 우리는 주변 자극에만 끊임없이 반응하게 될 거에요."


  지루함이 없으면 주변 자극에만 끊임없이 반응하게 될 거라는 문장을 보고, 나는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듯 했다. 나는 지루함을 극도로 싫어한다. 어릴때부터 핸드폰이 없어도 내 손에는 항상 무언가가 쥐어져 있었다. 그게 책이건, 장난감이건, 마우스건. 어느정도 자라고 나서부터는 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내 귀에는 늘 이어폰이 꽂혀있어서, 눈과 손으로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귀는 늘 현실로부터 분리되어 Beatles, Oasis와 함께 리버풀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주변 자극에 반응하는 경향은 더욱 짙어진 것 같은데, 명확한 목표의 부재, 그리고 주변인(부모님, 선생님, 친구를 비롯하여)의 감시로부터의 해방이 그러한 경향을 부채질한 것 같다. 나는 단 1초도 '낭비'하기 싫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고, 내 시간과 돈을 소비했다. 여기서 '낭비'라는 단어는 절약이나 생산적인 활동의 반대말로써의 낭비가 아니라, 단순한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의 반대말로써의 의미이다. 그냥 가만히 있기가 싫었다. 책을 읽으면서 왜 그렇게까지 지루함을 참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은 내가 지루함을 피하려고 하는 행동들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유튜브, 인스타, 웹툰을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하루에 서너시간 씩 흘려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낭비가 아닌가 말이다. 차라리 자는 시간을 4시간 더 확보하면 훨씬 더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을 없애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인스타 릴스를 보지 말자고 멈춘 뒤 찾아오는 정적과 심심함이란... 이것이 작가가 책에서 말한 금단증상인가? 결국 나는 3분 정도 눈을 감고 있다가 또다시 인스타/유튜브를 키고 말았던 것이다. 스마트폰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는 사회인이라서 그 유혹을 끊어내는 것이 더더욱 힘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64P


왜, 우리는 전에 없던 부와 자유를 누리고 기술적 진보, 의학적 진보와 함께 살아가면서 과거보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워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가 모두 너무나 비참한 이유는, 비참함을 피하려고 너무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비참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어제 한 영상에서 '만약 20대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어느 미국 노인이 '5년 뒤를 너무 걱정하지 마라'라고 대답한 것을 보았다. 내가 70대가 되어 그 인터뷰를 하면 동일하게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5년 뒤에도 33살일 뿐인데, 그 나이 역시 정말 할 수 있는 게 많은 나이가 아닌가!! 따라서 나는 지금 미래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겠다. 오로지 현실에 충실하는게 최선의 전략이라고 다시 한 번 되새기자.



67P


도파민은 '보상 그 자체의 쾌락을 느끼는 과정'보다 '보상을 얻기 위한 동기 부여 과정'에 더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유전자 조작으로 도파민을 만들 수 없게 된 쥐들은 음식을 찾지 못하고 음식이 코앞에 놓여 있어도 굶어 죽지만, 음식을 입안으로 바로 넣어주면 음식을 씹어서 먹으며 그걸 즐기는 것처럼 반응한다.


어느 대상에 중독되는 과정, 그리고 고통과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화학물질이 바로 도파민이다. 그런데 그 도파민이 '결과'가 아닌 '과정'에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결국은 건강한 쾌락(단어가 좀 미스매칭하지만)을 느끼기 위해서는 목표를 성취하는 것 자체보다는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79P


신경과학자들은 보상 자체가 주어지기 전에라도 조건 단서에 반응하면 도파민이 분비된다는 사실을 쥐의 뇌에 탐침기를 넣는 방법으로 밝혀냈다. 보상을 받기 전에 조건 단서에 반응해 도파민이 급증하는 현상은 우리가 좋은 일이 생길 것임을 예감할 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설명한다.
조건 단서가 나타난 직후, 뇌에서 발화한 도파민은 기준선까지가 아니라(뇌는 보상이 없어도 측정 가능한 수준에서 도파민 발화를 한다) 그 이하로 감소한다. 이렇게 도파민이 순간적으로 살짝 부족한 상태가 되면, 우리에게는 보상을 찾아내라는 자극이 주어진다. 기준선 밑으로 떨어진 도파민 수준은 갈구를 일으킨다. 이러한 갈구는 중독 대상을 얻기 위한 의도적인 활동으로 이어진다.


  중독 현상에 도파민이 관여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문단이다. 핵심은 조건 단서에 반응하여 도파민이 분비되고, 그 직후에 기준선 이하로 감소한다는 것이다. 달콤한 맛을 잠깐 보고, 그 이후에 깊은 골이 찾아와 달콤함에 대한 열망을 더욱 증폭한다는 것이다. 더 큰 쾌락을 맛볼수록 그 뒤에는 더 깊은 골이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쾌락의 강도가 커질수록 중독 현상은 점점 더 심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84P


상담을 하면서 나는 심각한 중독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수년 동안 의존을 멈추고도 단 한 번의 노출로 다시 강박적인 의존에 빠진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나도 봤다. 내 주변에 다행히도 마약에 손을 댄 사람은 없고, 다만 담배를 못 끊는 사람은 부지기수다. 굳은 결심으로 며칠, 혹은 몇 주간 끊었다가도 우연한 계기(주로 술을 진탕 마신다거나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다거나 애인과 헤어진다거나)로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골초 모드로 들어가기 십상인 것이다. 담배는 끊는 게 아니라 평생 참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작가도 책에서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지는 않다. 물론 바로 아래에 소개하는 85P 문장에서 나름의 해법을 소개하고 있기는 하다.



85P


중독에 따른 뇌의 일부 변화는 돌이킬 수 없지만 손상된 영역을 새로운 신경망을 만듦으로써 우회할 수 있음을 밝혀냈다. 이는 뇌의 일부가 영원히 바뀌더라도, 우리가 새로운 시냅스 경로를 찾아서 건강하게 행동할 수 있음을 뜻한다.


  바로 이건데, '뇌에서 새로운 시냅스 경로를 만들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정말 오랫동안 특정 대상에 대한 중독 현상을 보이던 사람이 그것을 끊고 새로운 시냅스 경로를 만들기 까지는 정말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87P


과학은 모든 쾌락에는 대가가 따르고, 거기에 따르는 고통은 그 원인이 된 쾌락보다 더 오래 가며 강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즐거운 자극에 오랫동안 반복해서 노출되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감소하고, 쾌락을 경험하는 우리의 기준점은 높아진다. 우리는 순간적이고 영원한 기억을 뇌리에 새기기 때문에 쾌락과 고통의 교훈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그러한 기억이 해마에 남아서 평생 가는 것이다.





88P


인간은 궁극적인 추구자다. 쾌락을 좇고 고통을 피하는 세상의 시험에 너무나 잘 대응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이 세상을 결핍의 공간에서 지나치게 풍족한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이 풍요로운 세상에 맞게 진화하지 않았다. ... 톰 피누케인 박사는 이를 두고 "인간은 열대우림의 선인장입니다"라고 말했다.





185P


난 뭔가에 중독되고자 하는 현대인의 기호에 대해 가끔 궁금해지는 부분이 있다. 우리가 중독에 빠지는 이유는 혹시 신체가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닐까 하고 말이다.





186P


고통 추구는 쾌락 추구보다 어렵다.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좇는 것은 인간의 천성이다. ... 쾌락 대신 고통을 좇는 것은 반문화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현대 생활의 수많은 측면에 만연해 있는 기분 좋은 메시지에 반하는 일이다. 부처는 고통과 쾌락 사이에 중도를 찾으라고 가르쳤지만, 중도조차 "편익의 횡포" 탓에 퇴색하고 말았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을 찾아내어 삶에 끌여들여야 한다.





204P


생산직은 갈수록 기계화되는 것은 물론 업무 자체의 의미로부터 단절되고 있다. 생산직 노동자들은 자율성을 제한받고, 경제적 이득도 그저 그런 수준이며, 공동의 사명감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성취감최종 제품 소비자와의 접촉은 모두 내적 동기에 중요한데, 단편적인 조립라인 노동은 이 두 가지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적당히 일하고 열심히 놀자'는 심리가 생기는데, 이러한 심리에서 술, 도박, 약물 같은 강박적 과용이 고된 하루의 끝에 주어지는 보상이 된다.





226P


'피해자 서사'는 보통 우리가 자신을 특정한 상황에 대한 피해자로 보고 자신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나 사례를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광범위한 사회적 경향을 말한다. 정말로 피해를 당한 경우에도 그 서사가 피해자 의식을 넘어서지 못하면 치료가 진행되기 어렵다.





236P


왜 수많은 이들이 부유한 국가에서 풍요로운 물질 자원과 함께 살면서도 결핍의 마음가짐을 갖고 매일을 살아가는걸까?





279P


<저울의 교훈>
1. 끊임없는 쾌락 추구(그리고 고통 회피)는 고통을 낳는다.
2. 회복은 절제로부터 시작된다.
3. 절제는 뇌의 보상 경로를 다시 제자리에 맞추고, 이를 통해 더 단순한 쾌락에도 기뻐할 수 있도록 한다.
4. 자기 구속은 욕구와 소비 사이에 말 그대로 초인지적 공간을 만드는데, 이 공간은 도파민으로 과부하를 이룬 지금 세상에 꼭 필요한것이다.
5. 약물 치료는 항상성을 회복시킬 수 있다. 하지만 약물 치료로 고통을 해소함으로써 잃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6. 고통 쪽을 자극하면 우리의 평형 상태는 쾌락 쪽으로 다시 맞춰진다.
7. 그러나 고통에 중독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8. 근본적인 솔직함은 의식을 고취하고, 친밀감을 높이며, 마음가짐을 여유 있게 만든다.
9. 친사회적 수치심은 우리가 인간의 무리에 속해 있음을 확인시킨다.
10.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세상에 몰입함으로써 탈출구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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