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든다는 것은

바로 여기 이곳

by 잔잔한고요

배고프다는 허기를 지나 이제는 아예 속이 메스껍다. 세상은 나에게 자꾸만 물을 주고 햇살 아래 서 있으라고 강요한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생기 있는 표정을 짓고, 생산적인 어른의 몫을 해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고백해야겠다. 나는 피어날 의지도, 버틸 기력도 없다. 나는 이제 가장 우아하고 처절하게 시들어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몇 시간의 사투 끝에 신발 끈을 조여 매고 =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썩은 동아줄을 잡는 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진 것이.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제 짝을 찾아 온기를 나누고, 서로의 마른 잎을 닦아주며 생을 연장한다. 그런데 왜 내 곁은 이토록 시리도록 비어있으며, 시들어감을 가여워하며 뺨을 부벼줄 여자 한 명이 없는 걸까.


​잘난 놈들은 사랑조차 스펙처럼 쇼핑하고, 평범한 놈들은 그저 그런 타협으로 방을 채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내 안의 아이는 여전히 굶주려 비명을 지르는데, 겉껍데기는 속절없이 바스러졌다. 이 엇박자의 괴리 속에서 나는 매일 조금씩 깎여 나간다. 세상은 시든 꽃에 물을 주지 않는다. 쓰레기통으로 던져질 날만 기다리는 장미처럼, 나는 내일의 태양이 두렵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두렵지 않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억지로 푸르른 척하지 않기로. 대신 나는 가장 낮은 곳으로 고개를 숙일 것이다. 바닥에 닿을 때까지, 내 안의 모든 수분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이것은 패배 선언이 아니다. 억지스러운 생존의 굴레에서 벗어나겠다는 나의 마지막 주권 행사다. 나는 오늘,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빛깔로 시들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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