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치키즈로 자랐고, 대치맘이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1년 전쯤 탈대치해서다.
경기도로 이사 후 출퇴근 시 대치동을 지나는 길이면 따뜻하고 정감 어린 느낌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고향에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미디어가 비추는 그곳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교육 1번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이들의 날 선 견제만 난무하는 ‘입시지옥’이다.
강산이 바뀌기를 세 번 거슬러 올라가, 30년 전 내 초등 저학년 시절 대치동은 평화로웠다.
저녁이면 나뭇가지를 들고 집 앞 공터를 누비고, 잔디밭에서 민들레와 클로버를 꺾어 목걸이를 엮고, 모래 놀이터의 바위 언덕을 호화 저택이라 상상하고 엄마놀이 하던 때였다.
그런데 지금 대치동 여덟 살 아이들의 생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학교 끝나면 놀이터에서 땅 파며 놀고, 화단의 나뭇가지를 주워 전쟁놀이도 한다.
물론 집에서는 학원 레벨 테스트를 위해 밤을 새워 공부하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30년 전에도 소위 ‘올백’이라는 것을 위해 새벽까지 뜬 눈으로 지새운 아이들도 수두룩했다.
열다섯 살로 기억의 책장을 넘겨 본다.
내가 다녔던 학원은 그 당시 대치동과 도곡동 일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한국학원’, ‘대원학원(?)’ 등 대형 단과 학원이다.
많은 아이들이 한 건물에서 여러 과목별 수업을 골라서 접수하고 들을 수 있는 ‘그냥 단과학원’.
정보나 자본의 부족으로 소수정예 심화학습 학원이나 개인과외가 부담스러운 집에서 영어, 수학은 사교육이 디폴트라는 분위기에 휩쓸려 보내는 그런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부족한 학습을 채우기보다는 여자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으로서 또래 남학생과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듣는다는 즐거움이 더 컸다.
또 친한 친구들과 가끔은 수업 빠지고 노래방 가고 떡볶이 사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 와중에도 친한 무리 중 엄마가 엄격했던 혜미는 단과학원에 같이 다니지 않고 하교 후 약속은 도무지 잡기 힘들었다.
결국 혜미는 대원외고에 진학했다.
다른 친구들 중 엄마가 음대 교수였던 원경이는 예원고등학교에,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인문계 고등학교로 갔다.
25년 전쯤인 열일곱 살, 본격적인 입시 사이클이 시작되는 고등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반 아이의 30%는 입시 레이스에 달리기로 참여하고, 50%는 경보나 걷기로, 그리고 20%는 일찌감치 예체능으로 진로를 정하거나 해외유학을 갔다.
나는 공부 좀 했던 오빠 덕에 소위 공부 잘하는 아이의 엄마들끼리 그룹을 짜서 들어가는 학교 선생님 출신 학원 강사들이 만든 전 과목 보습학원에 들어갔다. 작은 건물 4, 5층을 문과 학생을 위한 학원인 SKY가, 그 아래 2, 3층은 이과 학생을 위한 전과목 보습학원이 있었다.
그곳 역시 단대부고 학생회장 태훈이와, 부모님이 의사인 전교 1등 우영이가 다니고 있었다.
학교 끝나면 집에서 간식을 먹고 학원에 갔다.
그리고 다섯 시부터 열 한시까지 학원에서 모든 수능 과목을 배운다.
중간 저녁시간에는 근처 중국집이나 분식집에서 여유 있게 식사를 했다.
지금 미디어에서 보여주듯 급하게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때우고 다음 학원으로 이동하는 식은 아니었다.
학원이 끝나면 부모님이 차로 픽업 왔고, 가까운 곳에 살았던 친구들은 부모님이 번갈아 가며 라이딩을 맡았다.
학원의 영어, 수학은 우열반이 나뉘었는데, 우반에는 학교 같은 반 반장인 진영이도 있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달리는 성격에 고 3 때 공부 좀 하면서 3학년 1학기 중반쯤 학원에서 진영이와 같은 수학 반이 됐다.
또 같은 반에는 옆 학교 남자아이인 기훈이도 있었는데 진영이와 그 아이는 의사 부모님들의 친분으로 이미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옷 잘 입고 잘생긴 기훈이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시크한 기훈이는 반장 진영이 외에는 크게 교류하며 지내지 않았다.
열반에는 입시를 위해 마산에서 이사 온 형철이가 있었다.
순박한 성격의 형철이는 마산에서는 꽤 공부 잘했다고 하는데 마지막까지 우반으로 가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고 3 때부터 소위 ‘스타강사’라 불리는 학원 강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수능 100일 전부터는 SKY학원을 그만두고 부족한 과목을 ‘스타강사’ 강의를 단과 과목으로 찾아 들으며 수능 준비를 했다.
아직도 엄마는 그때 SKY 학원을 그만둔 게 내 수능성적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이유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에 요행은 없다고, 고 3 때부터 벼락치기 공부한 기본기 없는 내 실력이 딱 내 진짜 수능점수다.
아니 그 정도면 운도 따라준 거였다.
어느 날 출근길에 익숙하지만 낯선 대치동을 지나며 나의 초등학교 때부터 고3까지 대치동 분위기를 돌이켜봤다.
초등학교 때는 동네에 개인택시가 주차된 것이 종종 보였고, 주말 아침이면 뉴그랜저를 정성스레 닦던 앞 동 사업가 아저씨도 살았다.
또, 부모님 모두 의사라 낮에 할머니가 양육했던 차진경 집에 놀러 가면 ‘소닉’ 게임을 오랜 시간 할 수 있어 좋았다.
중학교 때부터 동네에 주차된 택시가 사라졌고, 많은 초등학교 친구들은 당시 신도시였던 분당으로 이사 가고 압구정 인근에 살던 이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고등학교 때는 다시 한번 많은 친구들이 미국과 캐나다로 유학 가고, 조금 더 부유한 가정환경의 친구들 비율이 높아졌다.
그리고 20년도 더 흐른 지금의 대치동에는 혜미와 진영이, 기훈이, 우영이만 있다.
워킹맘이라는 공통점으로 친해진 Yul 친구 엄마가 말했다.
“에휴… 이제는 이 나이까지 일한다고 말하기 창피해요.”
“왜요?”
“일한다고 하면 다들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인 줄 알아요.”
할 말을 잃었다.
나름 아직 사회에 쓰임이 있다는 것에 내 효용을 증명하는 것 같아 자부심이 있었는데 새로운 시각이다.
그 엄마의 말대로다.
대치동에서는 전문직 부모가 회사원보다 찾기 쉽다.
놀이터에 유치원 아이를 종종 데리고 나오는 엄마를 보며 당연히 전업주부인 줄 알았는데 육아를 위해 페이닥터로 주말에만 일하는 치과의사란다.
그곳에는 전문직, 교수, 사업가만 남았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온통 초록빛만 모인 곳이 대치동이다.
초록에서 스펙트럼이 멀어질수록 이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이곳 아이들은 초록이 더 짙어질 것인지 아니면 연둣빛에 가까워질 것인지를 두고 20년 레이스를 한다.
나는 Yul이가 언제까지 초록빛 세상 안에서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우선 녹색계열이 아닌 부모가 선사할 수 있는 초록세상은 초등 저학년까지라고 생각했다.
나와 남편은 모두 월급쟁이다.
둘 월급을 영끌해 대치동에서 초록색으로 승부를 볼 만큼 내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럴 자신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더 찬란한 초록 세상으로 기어들어간 것 같다.
Yul은 다섯 살까지 해외에 거주한 이력이 있어 외국인학교 입학 자격이 있다.
그래서 탈대치한다며 외국인 학교로 입학을 시켰다.
대치동 커뮤니티에 말하기는 좋았다.
“외국인 학교 다녀서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가게 됐어요.”
“이제 정말 다른 리그로 가네요! 부러워요”
한 줌 자존심을 지키기에 나쁘지 않은 반응도 따라왔다.
그리고 둥지를 튼 곳은 경기도다.
외국인학교 아이들은 각기 다른 동네에서 모여들어, 동네 커뮤니티만큼 학부모들의 끈끈한 유대가 없다.
아이 친구 엄마들을 아침저녁 단지에서 만나고, 남편에 친정, 시부모님까지 종종 마주치게 되는 아파트 문화권을 벗어난 것이다.
비록 더 짙은 초록일지 모르나 느슨한 관계로 인해 서로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여기서도 역시 Yul 영어공부 좀 시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 어린 조언을 해주는 초록 엄마가 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은 흔들린다.
불안과 걱정으로 동네 영어학원에 등록하기도 했다.
그래도 무지에서 평화가 오는지, 너무 모르는 영역이어서인지 마음은 편하다.
앞으로 어떤 대학을 가서 뭐 하게 될지 걱정하는 엄마들 사이에 도도한 백로처럼 잘난 척을 했다.
“대학 가게 될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걱정 안 하려고요. 만약 셰프가 되겠다고 하면 대학 등록금으로 차라리 세계 여행하며 다양한 식재료와 음식을 접하고 좋은 스승들에게 도제로 들어가 배우는 게 더 좋을 거라 생각해요. 앞으로 Yul이 살아갈 세상에 대학은 필수는 아닌 것 같고 하고 싶은 일에 따라 다른 길이 있을 테니 우선 지켜보려고 해요.”
특별하고 싶은 허영심에 더해 내가 지금 입시 레이스에서 앞서 달리지 않는 것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그럴듯하게 꾸민 말이다.
그러다 뒤늦게 땅을 치고 후회할 수도 있다.
그리고 Yul이 하버드 가겠다고 하면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길 나다.
그래도 말이 씨앗이라는 게 무섭다.
입시준비라는 무한 정보의 바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히피 같은 말을 내던지고 다니다 보니 자기 암시가 된 듯하다.
초록은 아닌 나와 남편, 그리고 아직 어떤 색일지 모르는 Yul과 함께 세상에는 다양한 색채의 삶의 형태와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며 살고 싶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노래만큼 우리 시야를 좁히는 곡이 없었던 듯싶다.
빨가면 사과?
초록 아오리 사과, 노랑 사과, 썩은 갈색 사과도 있지 않은가.
Yul에게 어릴 적 읽어준 책 중에 Jason Fulford, Tamara Shopsin가 공저한 <THESE COLORS ARE BANANAS (Phaidon Press, 2018)>가 있다.
책 내용에는 ‘사과는 항상 빨간색은 아니다’라는 문구와 옅은 연두색부터 검붉은 색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20가지 컬러가 전시된다.
풀잎도, 구름도 바나나도 우리가 고정관념처럼 생각하던 색상만 있는 게 아니라는 내용으로 이어지다가 사람 피부색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구멍이 뚫린 사각형에 자신의 손을 넣어 다른 피부 색상과 자신의 피부색을 함께 볼 수 있게 한다.
이게 세상일 것인데, 편협한 시선과 고정관념에 갇혀, 세상은 초록색만 행복할 자격이 주어진다고 주황을 초록으로 만들라고 채찍질하고 싶지는 않다.
점점 공동화, 양극화 돼가는 생활터전에서 좁아진 시야를 넓히고, 삶은 풀어야 할 숙제의 연속이라는 것도 알게 하고 싶다.
그 크고 작은 숙제를 해결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 행복이라는 것도 함께.
입시에 조금이라도 흠이 날까 두려워 아이 앞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걷어주고 대신 해결해 주며 10년을 살아가기에는 내 인생도 그리고 아이가 살아갈 날들이 너무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