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교육의 목적을 대학 입시에서, 함께 넓은 세계를 탐험하기로 바꿨는데, 막막하다.
어떻게 각기다른 삶과 그 세상에는 해결해야 할 다양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Yul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알려주면 알기나 할까?
다시 의심과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고 15년 전 읽었던 책을 기억해 냈다.
오소희 작가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엄마와 만 세 살 아들의 터키 여행기를 읽으며 막연하게 아이를 낳는다면 아들이기를 꿈꿨다.
배낭을 둘러메고 한 손에는 카메라, 한 손에는 아이의 고사리 손을 잡고 낯선 세상으로 뛰어든 엄마의 용기가 멋져 보였다.
또,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은 몸과 마음과 정신이 건강한 아이로 성장하게 돕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처럼 키운다면 가능할 것 같다.
미지의 바다에 롤모델이 있어 다행이다.
지금 그녀와 장성한 그녀의 아들 JB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모른다.
어떻게 살아가든 분명 건강한 인생일 것이라 믿는다.
인터넷에 몇 번 검색하면 알 수 있을 내 육아 롤 모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의 근황을 찾아보지 않고 있다.
그녀의 아들 JB가 소위 말하는 명문 대학에 갔다면 그것으로 내가 가기로 한 방향이 옳다고 생각하게 될까 두렵다. 혹은 의례 생각하는 성공한 인생의 공식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다면 이게 맞는 선택일까 의심하며 포기할 것만 같다.
하지만 내가 오소희 작가를 롤모델로 삼은 것은 결과가 아닌 책으로 남은 그 하루하루의 삶을 닮고 싶어서다. JB의 현재 근황이 여덟 살 Yul과 살아가기로 한 내 인생 방향에 영향을 주게 될까 두렵다.
그냥 그 모자가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와중에 울고 웃고, 여행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던 모습이 부럽고 닮고 싶었다.
미래에 좋은 대학을 가려고 혹은 남들이 알아주는 직업을 갖고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을 책임지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Yul이 되길 바란다.
일상이 그럴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자전거 타러 나가자는 엄마의 꼬임에도, 단호하게 ‘귀찮아’라며 침대에 누워 닌텐도 게임만 하고 싶어 하는 여덟 살 남자아이를 어떻게 하면 자발적으로 넓은 세상에 뛰어들게 할까?
호기심을 자극하고 주변이 아닌 다른 세상도 탐험하게 하는 방법은?
책을 통한 간접 체험과 낯선 곳을 여행하며 직접 체험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가성비로 치면 책 만한 게 없겠으나 아직 책 보다 게임이 좋을 때다.
유튜브와 TV도 간접 체험 방법이겠지만, 사람의 사고 능력을 최소화하는 기술이 넘쳐나는 세상에 생각하지 않는 습관을 일부러 키워주고 싶지는 않다.
Yul과의 첫 여행지는 큰 고민 없이 이집트로 정했다. 겨울 방학에 갈 생각이었기에 12월에도 따뜻한 곳으로 좁혀졌고, ‘피라미드 보러 가자! 하지만 닌텐도랑 아이패드는 못 가져가.’라고 해도 Yul이 별 반발 없이 따라나설 것 같았다.
죽기 전 하지 않으면 가장 후회할 것 중 하나가 나에게는 글쓰기다.
세상에 발가벗겨져 나를 내보이는 심정으로 뼛속까지 내려가 내 생각을 표현하는 글을 쓰고 싶다.
여행을 마치면 오소희 작가처럼 Yul과의 여행 스토리를 책으로 출간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꿨다.
그런데, 이집트를 다녀온 후 죽음에 대한 시각이 바뀌면서, 목표는 책을 출간하는 것에서 글을 매일 공개하기로 바뀌었다.
여행 전, 세계 각지 박물관에 전시된 이집트의 대표적 유물을 설명하는 <품위 있고 매혹적인 고대 이집트> 책을 읽었다.
컬러 사진과 함께 시대순으로 유물이 나열돼 있는데, 기원전 만든 물건들이라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찬란한 색감과 세련된 부조가 나를 매혹시켰다.
당시 기술과 자원으로는 조각상 하나 제작에도 분명 아주 긴 시간에 어마어마한 자본이 투입됐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사후 세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무덤 부장품들이다.
이집트에 가기 전, ‘죽음은 끝이기에 살아있을 때 내 인생에 충실하자’라는 생각을 했던 나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후 세계를 위해 현생을 소비해 버리는 사이비 종교에 빠진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이들로 보였다.
여행 후 책 한 번 내보겠다는 포부로 워드에 글을 쓰며 그들을 어리석게 여긴 내가 더 바보 같았음을 알게 됐다.
책 출판을 위한 글 분량을 검색하고 그거에 맞춰 35 챕터 구성에 워드 130 페이지 가량 되는 글을 차곡차곡 써 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 3시에 잠을 깼는데 오만 생각들로 다시 잠 못 드는 괴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오만 생각 중 ‘내가 내일 죽으면?’을 시작으로 한 방향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죽음이 두려운 것보다 내가 ‘멋져 보이고’ 싶은 생각에 회사 노트북 하드 한편에 정성스레 쓴 글 때문이었다.
“컴퓨터 반납 안 한 게 한 대 있는데 계속 써도 되나요? 재택 할 때 집에서 쓰려고요.”
“아직 시스템에서 경고 사인이 없어서 괜찮긴 한데, 언젠가는 반납해야 해요.”
“저거 누가 다시 쓰기도 애매한 구모델인데도요? 중고로 팔 거면 저한테 파세요.”
“우선 회수한 노트북은 하드는 다 아주 ‘무지막지하게’ 파기하고 껍데기만 고물상에 헐값에 넘기는 거예요.”
두어 달 전 회사 IT 서비스 데스크 부서 담당자와 한 말이 떠올랐다.
그 담당자는 웃으며 ‘무지막지하게 파기’를 강조했다.
내가 내일 죽으면, 이 글은 평생 나 혼자 간직하다 회사 컴퓨터 하드와 함께 무참히 폐기될 게 선명히 그려지는 어조였다.
Yul이 석 달 전쯤 자전거 타다가 했던 말도 떠오른다.
스페인어 수업에서 ‘죽은 자들의 날’에 배웠다며 말했다.
엄마, 누구 한 명이라도 기억해 주면, 죽어도 죽은 게 아니고 그때까지 살아 있는 거래.
당시에는 너무 뜬금없고 귀엽기도 해 웃으며 넘겼다.
그런데 막상 내 글이 나와 함께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이 세상에 내 흔적마저 없어지는 게 두려워진다.
내 글이 남들의 잣대로 조악하다 비난받는 것보다 영원히 사라지는 게 더 큰 공포다.
어딘가에 공개되어 있다면 성장한 Yul이나 나를 추억하는 가족들이라도 찾아와 한 번씩 보고 기억해 줄 텐데, 이대로 한 번도 읽히지 못하고 묻힐 수 있는 일을 나는 왜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쓸 수만 있다면 매일 어딘가에 글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영원한 삶을 꿈꾸며 피라미드와 미라를 만들었듯이, 죽음을 생각하니 내가 쓰는 행위는 죽어서도 살아가기를 원해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을 꿈꾸며 만든 결과물이 빼어날수록 더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더 길게 살아남는다.
그러고 보면 피라미드와 오벨리스크, 거대한 신전을 남긴 파라오들은 사이비 교주가 아닌 영생의 꿈을 현 인류에서 가장 장대하게 이룬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