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그림 그리는 이야기 오창환 지음 '오늘도 그리러 갑니다'를 읽고
지난봄, 도서관에서 하는 드로잉 수업을 들었다. 손에 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그린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하고 재밌기도 했지만, 그리는 것 자체에 몰입하는 순간이 그 무엇보다 더 큰 매력이 있었다.
그때 강의실은 희미한 음악 사이로 '사각사각~쓱쓱'(연필을 깎은 다음 밑그림을 그리는 소리) '툭툭툭~'(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하면서 드로잉북에 남은 지우개 가루를 털기 위해 종이를 튕기는) 소리만 들렸다.
끝날 무렵이 되면 책상 위에 모아놓은 2시간 동안의 열정을 감상하며 함께 웃고 손뼉 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서로의 그림에 대한 칭찬과 격려로 강의실을 나서는 얼굴이 다들 밝았다.
<오마이뉴스> 오창환 시민기자는 그림을 그리며 느끼는 기분 좋은 이야기(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도 맛본 적 있는 그 기분 좋음 말이다)를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 책을 냈다. 지난 2021년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쓴 연재 기사 '서울을 그리는 어반스케쳐'에 실린 글과 그림을 모아서.
책 이름은 <오늘도 그리러 갑니다>(오창환, 2023, 도트북). 그리기 위해 매일 나가야 하는 어반스케치만의 개성이 책 표지부터 잘 드러나 있었다.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게 아니라니. 어반스케치가 정확하게 뭐지?'
궁금해서 책에 설명해 놓은 부분을 찾아 읽어보니 현장에 직접 가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했다. 아래와 같은 선언문도 있었다.
어반스케치 그룹은
창립 당시 8개 조의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참으로 간단하고 훌륭한 문장이며
어반스케치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제1조. 우리는 실내 혹은 실외에서, 직접적 관찰을 통해 본 것을 현장에서 그린다. ( We draw on location, indoor or out, capturing
what we see from direct observation) - p. 34
이어지는 설명은 이랬다. 사진의 발명은 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그림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모사할 필요가 없는 시대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제는 사진을 먼저 찍고 그것을 보고 그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라고도 했다.
그러고 보니 드로잉 수업에서 늘 사진을 보고 그렸는데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미술 시간에는 야외에 나가 직접 풍경을 보면서 그림을 그렸고 실내에서도 교탁 위에 놓인 과일이나 꽃병을 눈으로 보며 그렸는데, 언제부터 사진을 보며 그림을 그리게 된 걸까.
물론 작가는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무엇을 보고 그리든 그건 그리는 사람의 자유라는 열린 마음으로 말이다. 다만 어번스케치는 그와 다른 방식인 '직접 관찰'로만 그리고 그렇게 그릴 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편리함을 뒤로하고 직접 나가고, 보고, 그리는 작업은 뭔가 다를 것 같았다. 또 예상치 못한 현장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림을 완성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은 훨씬 더 클 것도 같았다.
추운 날씨에 야외에서 그린 이화여대 박물관 앞 <용의 맥>, 길에 간이 의자를 놓고 거기에 앉아 그렸다는 추억의 성북구 삼선동 골목길 등은 사진만 보고 그린 그림과는 다른, 어떤 애틋함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오호, 좀 멋진데? 어반 스케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어반스케쳐들은 그래서 오늘도 전국 곳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만 있어도 그림을 그리는 어반스케쳐 등 뒤에 서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싶게 하는, 궁금증을 품고서.
혹시 야외에서 어반스케치하는 광경을 직접 본 누군가가 '왜 여기서 (학생들도 아닌 성인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물어본다면 나도 옆에서 귀를 쫑긋하고 들을 것 같다. 좋은 어반스케치에는 '디테일, 스타일, 스토리'가 살아 있다는데, 그것들이 궁금해서 말이다.
디테일과 스타일이 살아있는 그림은 이 책 속에도 가득했다. 그림에 얽힌 스토리도 흥미진진했다. 얼마나 많은 자료를 조사했을지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책 속에는 그렇게 3가지가 잘 어우러진 55개의 어반스케치가 제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곳을 펼쳐도 보고 읽는 것이 간간했다. '거기, 존재했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림. 그날에 작가 컨디션, 끌림, 온도와 습도, 주변 상황, 함께 했던 사람들... 이 모든 것이 종이 위에 고스란히 새겨져 어반스케치가 되었다.
아찔한 높이에서 몇 시간을 몰입하며 만들어 낸 스타일. 거의 다 그린 그림에 실수로 떨어트린 잉크 자국도 작품이 되고, 거기에 작가만의 이야기를 담아 '어반 스케치'를 완성했다.
▲ 백남준의 다다익선 서 있으면 아찔한 높이의 현장에서 그림을 그린 다음, 집으로 돌아와 사온 스티커를 붙여 완성한 작품. 작가만의 스타일이 살아있다. ⓒ 오창환
▲ 잉크를 흘린 그 자체로 작품이 되는 것 그리고 인물들의 발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벽화 속 인물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디테일'이다. ⓒ 오창환
내가 드로잉을 배울 때 재미있었던 것이 있었다. 원본과 달리 수강생이 각색해 그린 완성작을 보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그려 온 그림에는 활짝 핀 꽃밭 사이로 아빠가 아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가는데, 어떤 분은 엄마가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달리고 있었다.
산책하며 지나가는 강아지와 사람을 나는 보이는 대로 앞만 보고 걸어가게 그렸는데, 어떤 드로잉북에는 주인이 산책시켜 주는 것이 기분 좋은 듯 강아지의 콧방울이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간, 유쾌한 그림도 있었다. 그렇게 다들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며 즐기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 컸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그림체에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엉성하고 서툴러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뒤로 갈수록 알게 되었다. 그림을 부러 서툴게 그린 이유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작가님만의 디테일, 스타일, 스토리라는 것을. 그렇게 '명작'을 완성시켰다는 것을.
그러니 이 책을 읽을 독자들도 그 반전 매력에 흠뻑 빠져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