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을 책을 읽다 보면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어. 늘 읽던 책과는 다른 책을 읽으려고 시도하다가, 막상 읽으면 흥미를 잃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거든.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싶은데 책을 편식하는 게 고쳐지지 않았어.
무작정 새로운 분야의 책을 읽고 글을 써 보고 싶었어. 나의 의지가 아닌 누군가가 추천하는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추천서는 사실 널리고 널렸잖아. 그리고 추천서에서 고른 책을 읽다가 포기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그래서 방법을 바꾸기로 했어. 내가 사는 지역의 작은 출판사에서 만들어내는 책을 읽고 그에 대한 글을 써 보면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의미 있는 일은 언제나 동력을 주니까. 그렇게 생소한 책을 읽고 글로 쓰면서 여태까지 손이 잘 가지 않던 분야에 관심을 두고, 읽고, 글로 남기는 것이 이런 재미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래서 이번에 읽게 된 책은 도서출판 신생의 김용태 시조집 '역풍에 정점을 찍다'야. '시조라고?' 당황스러웠고 아득했어. 마치 수영장 물에 들어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시조를 읽는다는 건 그렇게 멀리서 웅얼거리는, 그런 느낌이었어. 그래서 걱정이 좀 됐어.
'과연 내가 연세 많으신 어르신의, 시도 아닌 시조집을 읽고 쓸 말이 있을까?'
그런데, 아니었어. 읽는 동안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친근함'이 가득했거든. 여태까지 나에게 시조란 '어즈버 태평연월이...'로 기억되는 고어(古語)들의 집합체였는데, 이 시조집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발음 좋고 의미 있는 대사처럼 귀에도 쏙, 마음에도 쏙 들어왔어.
'꼰대라떼' 없는, 내공이 느껴지는 시조집
시인은 50년 가까이 시조를 써 왔어. 그 긴 시간 동안 일궜을 내면의 깊이가 시어에서 느껴져. 책에는 그것들이 다섯 종류의 다른 듯 닮은 모습으로 녹아 있어. 시작은 '명상적, 불교적 상상력'으로, 때론 '삶의 의지와 대결 의식'으로, 어느 시절에는 '현실 비판과 풍자'를 하면서, 그러다가 '삶에 대한 성찰과 관조'를 이루며 마침내 '자연과 서정'을 노래하면서 말이야.
시조의 형식은 갖췄으나 올드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어. 오히려 트렌디해 보이기까지 해. 그래서 짧은 시조들 속엔 '꼰대'도 '라떼'도 보이지 않았지. 꼰대는 온데간데없고 '유연함'이 남아 읽고 있던 내 마음도 그 부분에서 확 열렸고, 라떼가 자리 잡을 만한 곳에는 자기 단련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어. 시인 내면의 힘이 정점을 찍었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지.
<나무, 바람 앞에 서다>
잔챙이 몇 놈 쓰러뜨린 기세 등등 여세를 몰아
선제공격 앞세워
내 콧대를 꺾어 놓겠다?
삼동에 벼린 강단이다.
오냐,
부드럽게 받아주마
어때? 마지막 장 '오냐, 부드럽게 받아주마!'에서 흔들리되 꺾이지 않는 유연함이 돋보이지 않니? 선제공격 앞세워 콧대를 꺾으러 오는 바람에 온 힘을 다해 빳빳하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휘어지듯 받아주겠다니, 애면글면하지 않는 여유가 느껴져 나도 모르게 '하' 하는 감탄사가 나오더라.
또 <양심 카메라>에서는 자신을 준엄하게 성찰하려 좌정하고 있는 노승 같은 시인을 상상하게 했어.
'양심 카메라'가 잘 작동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성찰의 결과일 텐데, 하염없이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거둬 끊임없이 자기를 바라보는 붉은 눈을 그대로 껴안은 것 같았어. 그리고 시를 읽고 나니 내 안에 나를 바라보는 양심 카메라에 대한 느낌을 나도 한 번 표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양심 카메라
슬그머니 감는 눈 위로
오버랩되듯 남는 빨간 불빛
어쩌면 내 삶의 무대, 그 빛을 쫓으라 하는 걸까
언젠가 알게 되겠지
그 눈빛, 처음부터 있었던 사랑임을
시조의 재발견, 그 매력 속으로 풍덩
3장 6구 45자 안에 인생을 담는 시조. '역풍에 정점을 찍으며' 상향곡선으로 올라가는 연처럼, 시조를 통해 '인생이란 자기 단련의 과정'임을 보여주는 작가로 인해 더 이상 시조가 아득하게 느껴지지 않았지. 오히려 나는 시조집을 읽는 기쁨을 즐겁게 누릴 수 있었어.
시인은 힘든 시조를 계속 짓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어.
시조는 그 형식에 아무 내용물을 가져다 부어 넣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음절부터 낱말, 구와 장이라는 구성요소가 서로 밀고 당기고 부딪치고 깨졌다가 다시 뜨겁게 재결합하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고. 그래서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짜릿하다고.
어디 시조 짓는 일만 그렇겠어? 우리의 인생도 '작은 음절, 낱말, 구와 장이 서로 밀고 당기고 부딪히고 깨졌다가 다시 뜨겁게 재결합하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겠지. 어쩌면 인생이란 마지막까지 그렇게 하다가 빛 속으로 건너가는 건지도.
불어오는 바람에 휘어지듯 유연하게 누웠다 일어날 줄 알고, 끊임없는 자기 단련의 시간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내 앞에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다면 우리도 고통 속에서 짜릿함을 맛볼 수 있을 거야.
책을 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 무작정 읽게 된 시조집인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한 번 다질 수 있어서 나는 좋았어. 다시 불볕더위가 시작된다고 해. 뜨거운 여름, 묵직한 인생을 얇고 가벼운 종이 위에 촘촘히 올려놓은 이 책을 읽으며 너도 이 시간을 잘 보내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