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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송정 Sep 25. 2022

가을, 詩

남기태 시인의 <희망공화국>

요즘 연달아 읽고 있는 책이 있어요. 바로 시집인데요. 시집을 읽다 보니 저도 학창 시절 시에 푹 빠져 외우고는 일기장에도 쓰고, 그림도 옆에 그려놓고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시가 뭐였지?' 싶은 거예요.



첫 구절부터 감탄하면서 열심히 외웠는데, 오래전 일이라 그런지 막상 떠올려도 구절이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이리저리 검색해 보고 나서야 '그래, 이거였지' 했죠. 그때는 그 시가 좋아 시가 적힌 껌 종이도 새콤달콤한 껌 향기와 함께 일기장 사이에 넣어 두곤 했는데 말이죠.



시는 시인이 세상을 담는 그릇



그래서 이번에 시집을 읽으면서는 예전과 다른 방법으로 시를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예전처럼 시를 읽다가 좋은 구절이 나오면 쓰고 외우는 것 말고 뭔가 또 다른, 시를 바라보는 눈을 갖고 싶었달까요?



그러다 문득 발췌해 둔 책 <담론>(신영복, 돌베개)에서 그 힌트를 얻었어요. 작가의 통찰력에 눈을 반짝이며 읽었던 그 책에는 "시란 세계를 인식하는 틀이며, 시를 암기한다는 것은 시인이 구사하던 세계 인식의 큰 그릇을 우리가 빌려 쓰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었거든요.



'아, 그러면 이번에는 시인이 세계를 인식하는 틀이 뭔지 생각하며 읽어볼까? 시인이 일생을 통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는지 찾아보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또 시인이 가진 인식의 큰 그릇 중에 요즘의 저를 담을 그릇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럼 먼저 이번에 읽은 <희망공화국>(2021, 전망)을 잠깐 소개해 볼게요. 이 시집은 올해 일흔 중반을 넘긴, 교사로 재직하면서 50여 년 전부터 시를 써온 남기태 시인의 최근작인데요. 연세 지긋한 시인은 '자서'(서문) 부분에서 시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어요.


 

내가 지닌 것으로 하여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 드리고픈 마음으로 엮었습니다... (중략)...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은 마음,

세상에의 외경이 스스로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합니다... (중략)


이 글만 보아도 시인이 세상을 인식하는 틀이 무엇일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제1부 책장을 정리하면서, 제2부 꿈을 청하며, 제3부 희망공화국'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시를 통해 '자서'에서 시인이 말한 것을 찾아보자고 생각했죠.




세상을 따뜻하게 데워 줄 큰 그릇, '사랑'



책을 읽거나 또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같은 단어지만 그것을 자신에게 가장 와 닿는, 자기 안에서 늘 숨 쉬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누군가에게 물으면 어떤 분은 '측은지심', 어떤 분은 '그리움', 또 어떤 분은 '희망', 다른 분은 '겸손', 또 '평화', '책임감' 등등 자기식의 단어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니 어쩌면 그 단어가 그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이고, 세상을 담는 그릇이며, 궁극적인 삶의 지향점이 아닐까 싶어요. 누구나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살길 바라니까요.



시가 사랑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니 남기태 시인의 시에서 측은지심, 그리움, 희망, 겸손, 평화, 책임감 등의 감정들이 보이는데 이는 결국 '사랑'의 다른 이름일 뿐, 똑같은 의미일 거로 생각해요. 그렇게 여든을 바라보는 시인은 살아온 세월을 다 담을 수 있을 만큼 큰 그릇을 마음속에 품고 있음을 알 수 있었죠.



그중에서도 '3부 희망공화국'을 읽다 보면 어느 쪽에도 휩쓸리지 않고 오직 한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희망을 느낄 수 있는데요.


 

한마음으로 줄을 당겨라
발을 굴려 밀려가고
쇠머리 달려오너라
함성으로 함께하는 희열로
지는 것이 이기는 것
한마음이기 때문이리라

- '영산쇠머리대기' 중에서 발췌



이쪽저쪽 함께 밀려가고 달려와서는 '싸워서 이기자'가 아니라 져도 괜찮다, 아니 지고 이기고가 어디 있는가, 그러니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며 결국 한마음이 되어 모두를 껴안자는, 시인이 그릇에 담긴 '사랑'을 느낄 수 있었어요.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공화국'이란 말 때문에 어쩌면 젊은 혈기로, 사회비판적인, 조금은 어두운 분위기의 시가 아닐까 했는데요. 막상 읽어보니 나이 많은 시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은 할머니, 아버지, 그리운 어머니, 그리고 아내였고, 그들은 우리와 같은 얼굴이란 것을, 시인이 사랑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요. 그래서 남기태 시인이 가진 그릇은 아마도 따뜻한 죽그릇이 아닐까 해요. 아픈 자식을 위해 끓인 죽이 다 먹을 때까지 식지 말라고 따뜻하게 데워서 담아 준 그릇 말이죠. 그리고 시인은 그 그릇을 제 앞으로도 슬쩍 밀어주는 것 같았어요.



이렇게 따뜻한 그릇에 담겨 있는 시니까 저도 그 옛날 학창 시절처럼 다시 한번 시를 외워보려 합니다. 태풍이 지나간 뒤 다가오는 가을을 맞이하며 여러분도 그렇게 해 보시면 어떨까요?


 

골목, 그리운 그 곳엔  

가난 굴레 벗고자
되돌아보지도 못한 채 떠나
죄지은 몸 못난 아들로
그리움마저 사치였나니
서럽고 힘들어도 찾을 수 없던
어머니 가슴에 새긴
내 상혼(傷魂)들
깊이 갈무리 하고
어렵고 힘들었으니
이제 쉬어가기로 하자
뛰노는 아이들
정겨운 이름들이
돌담에 얹혀 있고
언제나 기다려 주는
어머님 계시다



 출처 : 도서출판 전망




* 이 글은 오마이뉴스 편집기자님이 편집해 주신 글을 제가 다시 퇴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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