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했던 음식을 통해 삶을 배우다.
싫어했던 음식이었는데, 이제 괜찮네?
나도 먹을 수 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우리는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간다. 좋아하는 것만 고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싫어하는 것이 있기에 좋아하는 것이 생기지 않는가. 음식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두 선호하는 음식은 다 다르다. 그리고 좋아하는 음식이 있기에 또 싫어하는 음식도 생긴다. 날씨에 따라, 기분에 따라, 나이에 따라, 또는 경험에 따라 입맛은 변해간다.
나는 키가 작다. 성인이 되고선 이런 아담한 키가 불편하거나 부끄러운 적이 없었지만 크는 과정에선 큰 콤플렉스였다. 작고 마른 나를 보면 어른들은 늘 한 마디씩 하셨고 또래에 비해 작은 나를 부모님은 항상 걱정하셨다. 혹시 어떤 문제가 있을까 해서 병원에 자주 다녔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성장을 돕는 음식'이라고 불리는 음식은 모두 먹어봤다. 사슴뿔, 한약, 우유, 그리고 당근.
어디서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부모님은 정말 당근이 내 키를 크게 해 주리라고 믿으셨다. 하지만 나는 당근만의 특유한 그 건강한 맛이 싫었다. 손으로 코를 막고 먹어보기도 했지만 강한 향을 막지 못했다. 생각만 해도 구역질 나는 정도로 싫어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저녁마다 엄마랑 실랑이하던 날들이 생생히 기억난다.
어느 순간, 이렇게 혐오하던 당근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관심은 서서히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때론 새롭게 바뀐 내 입맛에 깜짝 놀랄 때도 있다. 요즘에는 요리를 할 때 꼭 사용하는 재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싫어하던 음식인데 왜 이리 좋아졌을까. 더 이상 저녁마다 나를 괴롭히던 당근이 아니어서 일까. 아니면 내 마음이 그 어린 시절 느꼈던 억압함에서 자유로워져서 일까. 아마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어야 하는 그 압박감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더 싫어하게 된 게 아닐까 싶다.
나는 내가 진정 싫어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때가 있다. 당근 맛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이유만이 아니었던 거 같다. 외부 환경에서 받는 자극, 또는 부담이 나를 헷갈리게 했다. 이제는 무엇을 포기하고 싶거나 하기 싫을 때, 다시 한번 생각하고 되돌아보려고 한다.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아니면 제삼자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르게 내버려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아닐까 싶다.
아마 모두 음식을 먹고 배탈 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꽤 오래전,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엄마가 만들어주신 스페인식 조개요리를 아주 맛있게 먹은 후, 너무 급하게 먹은 탓이었을까. 몇 시간 뒤, 배가 슬슬 아프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먹은 것을 다 비워내고야 말았다. 삼일 동안 고생했고, 마른 내 몸은 더 앙상하게 변해 있었다. 너무 힘든 나머지 그다음부터 조개의 '조'자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몸은 왜 이리 완벽한지, 참 신기하다. 나를 아프게 한 그것을 위험한 상대로 의식하여, 다시 먹지 못하도록 그때 느꼈던 느낌을 재생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쉽지만 한동안 조개를 멀리 해야만 했다.
조개는 워낙 좋아했던 음식이라, 머리에서 보내는 메슥거리는 신호를 이겨내리라 다짐했다. 처음 다시 시도할 때 입에만 대면 울렁거릴 거 같은 느낌에 굉장히 두려웠다. 조심스럽게 한입을 물었다. '맛있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구나. 아, 나는 이제 괜찮구나.' 두려움을 극복하고 나니 다음부턴 더욱더 쉬워졌다. 그리고 다시 조개요리를 즐길 수 있는 내가 되었다.
모든 일에서 처음은 두렵고 무섭고 떨린다. 이게 처음 맛보는 음식이 될 수도,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다. 새로운 경험을 앞두고 떨고 있다면, 눈 딱 감고 시도해보자. 한번 경험해 보면, 그 경험이 자신감을 불어주고, 그 자신감이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