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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픽의 구즈마 Nov 17. 2019

출판사명의 민망한 히스토리

1인 출판사 구픽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003

구체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려면 일단 이름이 필요했다. 이름이 있어야 목표가 생기고 의욕이 살아난다. 가장 중요한 게 출판사명 아닌가. 길게 생각하진 않았다. 사실 지금도 좀 안타까운 게 출판사명에 멋진 에피소드를 곁들이질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20여 년 전부터 아이디로 써온 구즈마. 꾸역꾸역 썼던 판타지 소설 등장인물 이름이었는데 이 이름도 딱히 무슨 뜻이 있는 건 아니고 동서양의 느낌을 같이 주면서 부드럽게 들리는 자음과 모음을 노트에 써가면서 조합했다. 결정적으로, 내 소설 속 구즈마는 당시 엄청나게 빠져 있었던 반지의 제왕 간달프의 짝퉁 캐릭터였다. 어차피 혼자 일할 출판사니 제2의 자아 같은 구즈마를 출판사명에 일단 넣고 소설 전문이 될 거니까 픽션을 넣자. 그래서 처음엔 ‘구즈마 픽션’이 출판사 이름이 될 뻔했다. 다행히도 친한 디자이너가 ‘구픽’은 어떠냐고 지나가듯 말했고 그게 훨씬 낫길래 긴 고민 없이 결정. 정작 디자이너는 그 말을 했던 걸 기억도 못한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구픽 의미가 뭐냐고 묻는 독자님들이 있는데 약간 민망하긴 해서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제 닉네임… 구즈마… 픽션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 하는 한마디와 함께 이야기는 잘 이어지질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뭔가 멋진 스토리를 갖고 있는 출판사 이름은 가끔 뵙는 1인 출판사 선배님인 ‘피니스 아프리카에’가 아닐까 싶다. 책날개에 매번 들어가 있는 소개문구도 멋지기 짝이 없다. “피니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의 끝’이라는 의미의 라틴어로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불타버린 비밀 서고의 이름입니다.” 1인 출판사를 시작하면 출판사명에 얽힌 짧은 언급을 판권 페이지나 책날개에 꼭 싣고 싶었는데 결국 구픽은 히스토리가 멋없어서 아무것도 실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슬픈 이야기. 


출판사명이 결정되었고 이후엔 출판사 등록과 사업자 등록을 해야 했다. 책 작업을 좀 해 놓은 후 출간하기 직전에 등록할까도 싶었지만 책을 만들기 전 들어가는 비용을 세무적인 절차를 거쳐 제대로 지급하려면 등록이 필요했다. 출판사 등록은 설명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간단하다.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이기 때문에 구청 문화관광과에서 신청서를 작성하고 등록비용을 내면 끝. 발급은 사흘쯤 걸린다고 했지만 나는 다음 날인가 나왔다. 출판사 신고 확인증이 나오면 세무서로 직접 가거나 온라인으로 신청하면 사업자 등록증도 발급받을 수 있다. 나는 당연히 외출이 싫어서 온라인으로 발급받았다. 사업자 등록증 발급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정말 나 같은 인간이 무언가를 하길 편한 세상이 된 것도 같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혼자 사업하는 데 필요한 외출과 미팅이 싫어서라도 이 일을 벌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50여 가지의 시안 중 추려낸 20종의 시안. 최종으로 선택된 건 스티커 붙은 사진.


첫 단계 서류작업이 마무리되자 명함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사업의 기본은 명함이 아닌가. ‘대표’ 직함이 박힌 명함을 생각만 해도 살짝 우쭐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명함에 넣고 책표지에 넣을, 멋들어지게 디자인된 회사 로고, 로고가 필요하다! 처음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지인과 이야기하다가 이상하고도 고맙게도 일이 좀 커졌다. 서예가인 지인의 친구분이 ‘구픽’을 로고화시킬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느낌으로 써주시기로 한 것.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러자고 했고 죄송스러울 정도로 많이 시안 작품을 만들어 오셨다. 50여 가지에 달하는 다양한 로고 후보 중 무엇을 고를지 고민했다. 선 굵은 서예체라 완성도와는 별개로 해외 소설을 전문으로 출간할 출판사 로고로는 안 어울리지 않나 생각도 들었지만 전문가는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디자이너의 손을 거치자 진정한 로고가 탄생했다. 


명함 앞면은 디자이너가 만든 로고를 넣고 뒷면은 서예를 그대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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