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는 당신은 갓파더 왜 먹는데요?
"블랙 러시안 하나요."
Q. 남자 취향의 술을 드시네요?
에이, 촌스럽게 남자 취향 술이랄 게 뭐가 있어요. 하지만 남자가 남긴 취향은 맞아요. 그러고 보니 남자 취향의 술이란 말도 틀린 말이 아니네요. 예전 제 남자 취향의 술이거든요.
몇 살이었더라. 이십 대 초반, 꽤 어릴 때예요. 바(bar)에 다니지 않던 시절에, 훨씬 연상의 남자를 만났었어요. 저는 그냥 술 좋아하던 스무 살 초반이라, 친구들이랑 맥주에 소주를 마셨어요. 기분 내고 싶은 날은 적당한 가격의 와인을 먹긴 했는데, 대충 메뉴판 상위에 있는 걸 골라서 병으로 먹었어요. 먹부림 하면서 동시에 취하고 싶을 때 먹는 것. 그때 저한테 음주는 그런 개념이었으니까요.
그러다가 누굴 만났는데, 1차 2차 3차 배 터지게 먹고도 계속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바에 갔어요. 근데 저걸 시키더라고요. 그게 그렇게 멋져 보였어요. 게다가 뺏어먹어 보니까 도수는 센데 달짝지근한 커피향이 나서 맛있더라고요. 깔루아에 보드카 섞은 거니까, 그럴 만하죠. 집에서도 만들 수 있는 저렴이 칵테일인데, 그때는 뭐 그런 걸 알았나. 이름도 멋있고 시커먼 비주얼도 멋있고, 달달하긴 하지만 약하지는 않다는 게 술 잘 먹는 척하고 싶었던 그 시절의 저에게는 허세 부리기도 좋았고요.
그전까지 저한테 바에서 먹는 술은 보드카 토닉 아니면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밖에 없었어요. 클럽 입장할 때 받은 쿠폰으로 먹을 수 있는 공짜 술이거나(보드카 토닉), 아니면 클럽 들어가서 아직 춤출 마음의 준비가 안 됐을 때 확 부스팅 시켜줄 센 술이면서 오래오래 버틸 수 있는 대용량의 술이거나(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했던 거죠. 이러나저러나 실용적인 거였어요. 굳이 저 맛이 아니어도 되는. 그 둘이 아닌 술이면서, 어느 바에 가도 있으니까 메뉴판 안 보고 '블랙 러시안 하나요.' 할 수 있는 게 되게 어른 같아 보였던 거예요. 그 시절의 제가 그 남자를 사랑한 이유 중에 하나기도 했고요, 어른 같아 보이는 것.
많은 걸 추천해주는 내 친구들이 들으면 상처 받겠지만요, 저는 남이 뭐가 좋다고 추천해주면 그걸 안 좋아하려고 안간힘을 써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더라고요. 예를 들어 누가 어떤 영화가 너무 좋았다고 하면, 20세기 폭스사 로고가 뜰 때부터 이미 '20세기 폭스사 거야? 시시하군.' 막 이러는 거죠. 폭스사 작품들 싫어하냐고요? 아니요. 그냥 누가 추천했으니까 비뚤어진 채 시작하는 거예요. 친구가 좋다고 하니까 나도 즐기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거기서도 알량한 내 머리는 '너 얼마나 좋은 영환지 보자' 하는 거죠. 콘텐츠에 너무 많은 이입과 질투를 하는 사람인가 봐요. 애인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야. 너도 분명히 좋아할 걸!' 하고 누군가를 소개해줬을 때 같은 태세를 취하는 거죠. 나보다 먼저 내 애인이 발견해서 사랑하는 대상을 뒤쫓아갈 신세가 된 걸 슬퍼하면서, 비뚤어져 있는 거예요. 기어이 말하고 싶나 보죠. 난 별로던데? 하면서요.
저는 제가 판단하고 싶어 하거든요. 근데 누굴 좋아하면 저는 사실 그 사람의 많은 걸 좋아해요. 다 내 것 같아서요. 그 사람이 싸잡아 사랑해달라고 강요만 안 하면요. 블랙 러시안이 그랬던 것 같아요. '난 이걸 좋아해. 넌 뭘 마실래?' 하면서 각자 알아서 음료를 시키면 그게 궁금해져요. 그리고는 음료가 나왔을 때 그 사람이 한 입 맛을 보고, 그다음에 제가 한 모금 먹어보는 거죠. 아, 그게 좋았던 걸까?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입 댄 칵테일에 입 댈 수 있는 관계니까, 그 사람 입에 들어간 향이 곧 내 안에도 퍼지는 게 좋았는지도요. 그거 먹고 키스했을 때 풍미가 좋아서 이러나저러나 다 좋았던 건가? 이렇게 생각하면 그 칵테일을 좋아하게 될 이유는 차고 넘쳤었네요. 귀엽다!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나에게 남은 취향들이 있어요. 저는 매드맥스 30번 보는 사람이고, 스페인만 8번 가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좋아한 것만 반복하는 사람이고, 남이 말한 것을 뭐든 흡수하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에요. 그런 의미에서, 평소 예전의 제 취향을 놓고 보면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지금은 어엿한 내 취향으로 남은 것들은 사랑이 남긴 흔적이에요. 새로운 취향이란 게 그렇잖아요. 겉핥기식으로 봐도 좋은 게 있다면 애초에 내 취향인 거고, 타인의 취향이었던 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전이시키자면 거기 흠뻑 젖어봐야, 몸을 내던져봐야 하는 거잖아요. 새로운 맥주가 맛있는지 알려면 한 모금 먹기보다는 세 모금은 꿀떡꿀떡꿀떡 해 봐야 하는 거고, 홍어 삼합도 앞니로 조금만 먹는 것보다는 크게 한 쌈 만들어서 입안 전체에서 우걱우걱 움직여봐야 무슨 맛에 먹는지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요. 그 사람의 일부니까, 얼마든지 일단 들이부어볼 준비가 돼 있었던 것 같아요.
블랙 러시안이 그런 식으로 나한테 스며든 취향이에요. 스며든 거니까, 그 사람이 떠나고 나서도 남았죠. 한동안은 그 사람을 추억하면서 마셨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안 나요. 그냥 맛있고, 심플해서 좋아요. 어디에나 있어서 메뉴를 안 봐도 되고요. 그 행위가 멋있던 시절을 지나서, 지금은 오히려 '뭐 그렇게 애 같이 달달한 걸 좋아하냐' 소리도 듣는 사람이 됐네요. 어떻게 보든 상관없어요. 좋아하니까.
블랙 러시안이 그랬고요, 또 뭐가 있더라. 네그로니도 그러네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Dani California도 그렇고요. 영화 원스도 그렇고, 앤쵸비 오일 파스타도 그러네요. 각각 다른 사람들이 저에게 남긴 취향이에요. 와, 그러고 보니 제가 다 싫어하는 카테고리에 있는 것들이에요. 저것들과 비슷한 부류로 묶이는 그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아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나머지 곡은 다 제 취향이 아니에요. 존 카니 감독의 비긴 어게인과 싱 스트리트를 좋아하긴 하지만 원스 하고는 결이 많이 다른 영화라고 느끼거든요. 파스타도 싫어하고요. 그런데 어쨌거나, 블랙 러시안, Dani California, 앤쵸비 오일 파스타는 살아남아있어요. 저 취향을 남겨준 그 누구에 대해서도 감정적 잔여물이 없는데도요.
그러니까 혹시 제가 원스를 보자고 한다거나, 앤쵸비 오일 파스타나 블랙 러시안, 네그로니를 눈 앞에서 주문한다거나, 술 먹다가 Dani California를 신청한다거나 해도 너무 의미 부여할 필요 없어요. 이젠 진짜로 제 거거든요. 제가 지금 괜히 오버하는 거면 미안해요. 아니,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건 좋잖아요. 제가 블랙 러시안도 모르던 시절에는 얼마나 엉망진창이었다고요. 지금보다 더 고집 세고, 이기적이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연애를 하면서 한 뼘씩이나마 나은 버전이 된 거예요. 혹시 지금 얘기하는 저에게 인간적으로 좋은 면이 많다고 생각되신다면, 구애인의 유물도 패키지로 온 거라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요? 아니면 골라요. 이전 연애에 대해 자기도 모르게 언급하는 거, 혹은 이전 연애에 대해서는 깔끔하지만 어디서 온 취향인지 아는 것을 자꾸 고르는 것. 그래도 후자가 낫지 않아요?
구애인에게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는 이야기의 반복인데 왜 이렇게 고백하는 기분이 드나 몰라요. 그냥 제 소개를 하려던 건데. 아니다, 블랙 러시안이 남자 취향의 술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내 취향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시작했던 건데. 그러는 당신은 왜 갓파더 시켰어요? 뭘 원래 좋아해요, 엄마 뱃속에서부터 갓파더 마시진 않았을 거 아니야. 누구예요? 몇 살 때예요? 왜 설명하기 싫대. 지금 나 신경 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