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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지 Jun 10. 2020

영화 <초미의 관심사>가 초미의 관심사라길래

그러려니, 무엇보다 강력한 연대


영화 초미의 관심사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34929


이태원 주민으로서, 강유가람 감독님의 <이태원>을 비롯해 이태원이 나온 영화들을 참 좋아한다. 내가 이태원을 좋아하는 이유는 요리조리 굴려보고 싶은 다면체 같이 때문이다. 누가 또르르 굴리느냐에 따라 보이는 면이 다른, 주사위 같은데 적어도 육면체보다는 많은 다면체. 누군가에게는 퀴어 프렌들리한 동네, 누군가에겐 구 미군기지 지역, 누군가에겐 클럽 많은 곳, 누군가에겐 한 때 우범지대로 기억되는 곳. 핫플레이스이기도 하고, 외국 식자재 사러 오는 곳이기도 하고, 큰 옷 사러 오는 곳이기도 한 그 곳. 그게 좋아서 이 동네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이태원이 나온 영화를 좋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 주사위를 어떻게 굴렸는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오늘 밤에 두세 시간의 시간이 생겼을 때 뒤도 안 돌아보고 <초미의 관심사>를 본 것도, 같은 이유로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순덕(김은영, 치타)과 엄마가, 두 사람의 돈을 들고 튄 막냇동생을 찾으러 가는 줄거리로 전개된다. 그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영화는 남연우 감독님이 굴린 이태원이라는 주사위를 덤덤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태원 사람들을 보여준 방식이다. 그게 나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서, 나와 내 동네 친구들이 아는 이태원과 가까워서, 내가 누군가와 동시에 던진 주사위가 비슷한 면을 보일 때 찌찌뽕을 외치고 싶은 마음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이 나의 샤우팅이다.)


이 영화에는 중년의 엄마, 2~30대로 보이는 딸, 한국인인 흑인, 트랜즈젠더 여성, 레즈비언, 드랙퀸 등이 등장한다. 이런 등장인물이 나올 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게 만드는 이유는 두 가지다. 각각의 집단에 대해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스테레오타입을 그대로 전시하거나, 아니면 이들에게 신파적 서사를 씌우거나 히스토리&허스토리를 파고들거나. 어떤 쪽을 택하든 정도가 심하면, 결과적으로 '이상한 사람' 메이킹이 되어버린다. 영화 평론을 하자는 것은 아니고 내게는 그럴 재료도 없지만, 관객으로서 어느 순간 불편해지는 지점이 딱 거기다.


그런데 <초미의 관심사>에서는, 그 모든 인물군을 그러려니 한다. 자신을 소명하라고 하지 않는다. 레즈비언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인 걸 언제부터 알았는지, 흑인인데 어떻게 한국인인지, 트랜스젠더 여성의 지난 삶은 어땠는지... 등장과 동시에 이미 절반은 다 본 것처럼 이루어졌던 스토리텔링을 답습하지 않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보고 알게 된 사실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은 다수거나 강자거나 혹은 둘 다인 기득권에게만 주어지는 권력의 산물이다. 고학력의 공기업 근무 이성애자 남성에게는, 왜 좋은 대학에 갔는지, 공기업에 갔는지, 왜 이성애자가 됐는지(!) 왜 스스로 남성이라고 믿는지 묻지 않는다. 자신을 소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권력인 셈인데, 그래서 소명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소수에 대한 당연한 예의인 동시에 차별적인 세상 속에서 취해야 할 강력한 연대 방식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네가 특이하지 않아, 너의 다름이 날 불편하게 하지 않아, 난 너의 존재에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아. 어떤 침묵은 시끄러운 응원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준다고 믿는다.


넷플릭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부분은, 백인 아버지가 한국인 딸과 사는데 왜 이  딸에겐 조금도 백인 같은 외모가 없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은 점이다. 드라마 <굿걸스>에서 여성의 몸을 가진 10살의 아이가 어머니에게 "난 내가 남자라고 생각해"라고 했을 때, 굳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갖게 됐는지 구구절절 풀지 않고, 그저 어머니가 그를 끌어안으며 "엄마도, 아들 하나 있었으면 싶었어."로 담담히 그려버린 장면을 좋아한다. 특히 창작자가 그런 시도를 할 때, 누군가는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충고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친절하기 위해서, 특정 집단의 존재에 해명을 요하는 것은 친절을 구실로 펼치는 권력자들의 유희다. 숏컷이고, 피부가 까맣고, 한국 표준보다 키와 몸무게가 크며, 타투가 있고, 비혼인 나는 그 질문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안다. 표면적인 질문의 이유는 관심이겠지만, 애초에 나에 대한 관심으로 고른 질문이 나 자신을 이루는 본질적인 것이라는 데서 급격히 외로워진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그 질문들은 관심의 표현이라기보단 정상성을 의심하는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의심보다 명확히 '너는 우리와 다르고, 나는 그것을 이질적으로 느낀다'를 고지하는 행위기도 하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알기에 순순히 답하지만, 돌아서서 느끼는 씁쓸한 뒷맛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담담한 시선이 좋았다. <초미의 관심사>는 당신의 관심에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관심사는 무엇인지, 그 관심사를 선정한 경로와 관심사를 파고드는 방식은 안녕한지.


배우 김은영, 가수 치타가 직접 작사 작곡한 이 영화의 테마곡 가사를 보면 더 이해가 쉽다.




<Urr> 中


나는 나 너는 너

그게 뭐 그렇게 어려워


우르르 저 사람들은 왜

우르르 손가락질해

좀 다른 점을 찾았나요

그런 내가 틀린가요


내 말투 내 생각 움직임 하나까지

그렇게 불편한가요

굳이 모든 걸 이해해야 하나요

그냥 이대로 받아들여줘


어쩌다 도마 위에 있는 건 난데

무섭다고 투정 부려선 안돼

미움 좀 받는 게 그게

뭐 그렇게 두려워 도망가나요


Hey(야) 뭘 물어봐 넌 궁금하지 않잖아

에이 또 그거 봐 얼굴 찌푸리잖아

원하는 답이 아니라 미안해

하지만 끼고 싶지 않아 그 안엔

싫단 게 아냐 뭐 싫으면 어때

아닌 척 마 너도 그랬잖아




 또, 순덕과 어머니의 관계를 그린 방식도 좋았다. 가족이 반드시 서로를 사랑한다는 설정은 가족에 따라 현실성이 없을 때가 많고, 백 보 양보해 서로를 사랑하더라도 그걸 적절히 표현할 줄 모른다. 서로에게 도움되는 선택을 할 확률도 생각보다 아주 적다. 나는 순덕이 어머니를 사랑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순덕에 대해 갖는 마음도 절절한 사랑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만약 누군가 사랑이었다고 한다면, 나의 경우 사랑을 사랑이라 판단하는 것은 그걸 표현한 방식에 따른다고 믿기 때문에 내 기준에서 이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다. 하지만 둘 사이를 흐르는 애증인지 정인지 모를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TV에서 전시하는 것 같은 가족 간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을 가족이란 이름으로 지낸 사람들끼리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사람의 조각 하나가 내 안에 깊숙이 이식되어있다가 어느 순간 존재감을 드러내기는 한다. 순덕의 엄마가 흥얼거리던 "I don't need your love"가 그렇다. 남자 없인 못 사는 엄마가 역설적으로 흥얼대는, 남들에게 보이고자 했던 자신의 모습이지만 막상 그렇게 살진 못했던 그 한 줄의 가사는 집에 엄마의 남자들이 드나드는 걸 목격하고 어머니를 경멸하며 자란 순덕의 뇌리에 남아 새로운 노래가 된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것은, 이 노래를 순덕이 완성했다는 설정 속에 "But I want you"를 읊조리는 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사랑하진 않아, 하지만 필요한 순간은 있었어. 순덕에게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 이보다 더 선명히 드러내는 대사가 있을까. 엄마가 순덕의 노래를 듣다가 나가버리는 장면이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런 관계는 그런 식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갑자기 달라진 태도를 보이면서 동화처럼 끝나는 일이야말로 비현실이다. 어머니와 딸의 구도로 그려졌지만, 나는 그게 세상 모든 관계처럼 느껴졌다. 어떤 사랑은, 우정은, 의리는, 친근함은, 저렇게 밖엔 안 되기도 한다. 서로를 원하면서도 끊임없이 실망시키고, 그 패턴이 반복되면 그 사람 앞에 있는 내가 싫고, 그가 내 최악의 버전을 끌어내는 사람 같아 함께 있으면 불안하고 슬프고, 하지만 여전히 원하고. 떠오르는 얼굴들이 많았다. 항상 그런 식이었던 누군가와 갑자기 살갗에 익숙하지 않은 행복이 펼쳐질 때, 그 감동과 기쁨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와 거리를 헤매는 경험을, 누군들 안 했을까. 엄마의 눈빛을 보자마자 같은 불안에 사로잡히고, 엄마가 공연장을 나설 때 울면서도 따라나서지 못하고 자기 몫의 노래를 이어가는 순덕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는 손에 잡히지 않을 평온한 행복, 그걸 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



스토리 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배우 김은영으로 제 몫을 한 가수 치타의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나는 치타의 랩보다 보컬을 더 좋아한다. 그 목소리를 되찾기까지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라도, 음악과 어우러지면서도 희한하게 뚫고 나가는 울림 안에서 세밀하게 움직이는 감정들을 좋아한다. 치타의 보컬을 사람으로 표현한다면, 되게 특이한 비주얼인데 어느 그룹을 가나 센터를 꿰차는 희한한 아이돌 멤버를 보는 것 같다. 지금까지 치타의 노래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특히, 재즈 선율에 얹혀서도 그걸 방해하지 않으면서 희한하게 센터를 꿰차는 치타의 목소리에 놀라게 될 것이다. 나는 치타의 노래를 노래를 들을 때, 팽팽하게 사방이 당겨지는 플라스틱 비닐이 예리한 칼 끝에 톡 하고 터지는 그림을 상상한다. 그 사이로 직사광선이 일자로 뻗을 것도 같고, 좋은 향이 팍 하고 퍼질 것도 같지만 여튼 얇게 세로로 뚫고 나가는 촉감이 가진 쾌감이 있다. (나는 원래 그런 거 좋아한다. 내성발톱 유튜브 보는 게 길티 플레저인 사람... 비유가 해괴하지만 여러분 뭔GRG) 그게 재즈와 버무려지는 걸 꼭 다른 사람들도 들어보면 좋겠다. 영화 <초미의 관심사> 테마곡은 최근 발매된 치타의 앨범 Jazzy Misfits에서 들을 수 있다.


연기를 잘하는데, 코멘트하는 것 자체가 내가 연기에는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들릴까 봐 생략한다. 노래를 부르는 씬이 많은데도 이 사람의 본업이 가수라는 사실이 자꾸 지워진다.


배우 김은영과 감독 남연우는 실제 커플로도 알려져 있다. 영화를 계기로 만나 영화를 만들다가 연인으로 발전했다고. 이 영화의 사실상 음악감독이며 퍼포머이자 배우인 김은영 겸 치타와 이 영화의 세계를 만든 남연우 감독이라면, 이런 결과물을 건축해나가면서 연애감정이든 뭐든 어떤 연대감이 안 생기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 줄만 쓰려고 했는데 오버했네. 세 줄이든 백 줄이든 막줄 내용은 그대로다. 가서 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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