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쿠보>
오쿠보는 내게 도쿄의 시작같은 곳이다. 보통은 시부야 신주쿠 하라주쿠에 걸친 일명 여행 핫스팟들을 목차의 첫 번째에 내세우겠지만 내게 도쿄는 오쿠보가 없었다면 그저 한 번씩 여행하는,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지 이상의 의미도 이하의 의미도 없는 곳이었을 것이다.
도쿄는 내게 서늘한 기분이 드는 일본영화들의 무대였다. 그 서늘한 감정이 가장 잘 표현되는 콘크리트 가득한 도시의 풍경은 서울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공기로 나를 유혹했고, 나는 첫 해외 여행지로 일본, 도쿄를 선택하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의 실제공간을 보기 위해.
일본어도 영어도 전혀 모르는 나는 처음 가는 해외여행의 두려움에 한국민박을 찾았다. 한국민박은 한인타운에 있었고 그곳이 바로 오쿠보였다. 첫번째 도쿄에서 같은 방 한국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곳에서 정보를 어어 도쿄의 이곳 저곳을 다닐 수 있었다.
2007년 2월, 스탑오버로 9일간 도쿄여행을 하기로 했다. 첫번째 묵었던 한인민박을 또 다시 예약했다. 한류열풍으로 오쿠보에는 한국음식점들이 가득했다. 거리 사이사이로 보이는 일본가게들은 대부분이 체인점이었다. 맛의 천국 일본에서 체인점이나 편의점 음식으로 시시하게 끼니를 때우고 싶지 않아 골목을 누볐다. 그리고 빨간 등이 켜진 가게로 들어갔다.
“이랏샤이마세”
문이 열었는지 닫았는지 혹은 가게인지 아닌지 모를 무거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자 까까머리의 일본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으음.. 들어가야할지 말아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머뭇거렸더니 다시 한 번 “이랏샤이마세”하고 인사를 건넸다. 가게에 들어가 카운터에 앉아 메뉴를 봤다. 온통 일본어에 메뉴를 설명하는 사진 한 장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나마 히라가나는 5,6년 전 일본어 학원을 다니며 배운 기억을 더듬어가며 겨우 야끼소바를 주문할 수 있었다. 가게 이름은 하치, 철판으로 요리를 하고 오꼬노미야끼가 대표메뉴인 곳.
손님은 나와 카운터에 앉은 여자애 한 명. 우리는 일본어와 영어 손짓 발짓을 동원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일본 영화를 좋아했고, 이들은 연극쪽에 관계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잘 통했다. 이야기가 통했다기 보다는 일본어도 못하는 외국인이 비주류 영화의 제목과 감독들, 그리고 오다기리죠나 이케와키 치즈루를 읊는 것이 신기해 했고, 그런 영화들 영향으로 일본에 왔다는 이야기에 애를 써가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것 같다.
나는 도쿄에 있는 9일동안 매일 밤 이곳에 들렸다. 물론 일본어는 거의 말 할 수 없는 지경이었고 영어도 자신이 없었지만 어느새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 째 계속 오는 나에게 친구들은 가게 이름 하치를 따서 핫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일본어 발음에 없어 아무리 이야기 해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오쿠보의 한 가게에서 시작했던 인연이 이어지고 이어졌다. 나는 일본어를 배웠고, 친구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결혼식에도 초대가 되기도 했고, 친구들이 한국으로 여행을 해 오며 도쿄에서의 삶에 대한 동경이 커진 곳도 바로 하치와 하치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었다.
하치의 일상. 하치의 마스터 코지. 처음 먹었던 메뉴 아끼소바. 하치에서 꼭 먹어야 하는 직접담근 매실주.
일본의 술집은 단골 문화와 단골손님들끼리의 유대가 강하다. 자주 오던 사람이 오지 않으면 걱정을 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나면 반가워하기도 한다. 약속을 해서 오거나, 따로 외부에서 만나지 않아도 이 곳에서 만나게 되면 마음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하루의 피로를 푼다.
축하할 일이 있을 땐 다 같이 축하하고, 혼자 온 손님은 TV를 보기도 한다. 무뚝뚝하기도 하고 친해지면 장난도 심한 코지는 단골손님들의 말 상대가 되어 이런 저런 고민을 들어준다. 스스로는 이별이후 상담 전문가라고 자처하며 연애중일 때의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다며 손사래를 치기도 한다.
그리고 하치에는 이벤트가 있다. 여느 가게에서나 하는 꽃구경은 하지 않지만 매년 하치의 정기휴일에 맞춰 하루키가 자주 가던 진구경기장에 가서 경기를 관람하기도 하고, 일년에 한 번 볼링대회를 열기도 한다. 특히 볼링대회를 할 때는 등수별로 사은품이 있기 때문에 사은품카드를 받는 재미도 쏠쏠했다. 가장 큰 사은품은 하치 방문 할 때마다 첫 잔 무료쿠폰이다. 단골들이 주로 참여하는 대회기 때문에 이 카드를 받는 사람에게 가장 큰 환호를 보낸다.
하치 はち
주소 / 東京都新宿区百人町1丁目22−8
가까운 역 / 소부센 오오쿠보역.
영업시간 / 런치 (11:30-14:00), 저녁 (17:30-00:00) 수요일 정기휴일.
추천메뉴 / 오꼬노미야끼, 매실주(우메사와), 철판 통 양배추구이 (캬베츠 스테-키)
오쿠보는 두 개의 역이 관통한다. 오쿠보역과 신오쿠보역.
오쿠보역에서 신오쿠보역을 지나면 한인타운이 이어진다. 한국음식과 한국 화장품 가게 한국 슈퍼들이 골목골목을 메우고 있다. 신라면이나 소주는 한국 가격과 별반 다를 바 없이 판매될 정도에 걸어가면서 일본어보다 한국어를 더 많이 듣게 되는 거리이기도 하다.
물론 관광객으로서는 바다건너 해외까지 와서 한국과 다를 바 없다고 하면 유쾌하지 않겠지만 유학생활을 하며 다니던 오쿠보는 향수병을 달래는 거리였다. 삼겹살에 소주잔을 채우며 아아 외국에서의 삶이 호락호락 하지 않구나 하며 한국인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밤을 새며 이야기 하고 혹은 울기도 하고 위로해주던 이 거리. 삼겹살 이벤트라도 하는 날이면 정보 공유를 해서 줄을 서서 먹던 그 날들을 잊을 수가 없다.
요즘은 한국인 유학생도 많이 없어지고 한류열풍도 많이 사그라들어서 한인타운이라기 보다는 아시안타운이라고 이름붙여야 될 정도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한국음식점으로 가득 메워졌던 거리는 요즘 일본내 유학생 비율 1위가 베트남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베트남 음식점들로 바뀌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음식을 먹거나 한국산 먹거리를 사려면 오쿠보라는 공식은 아직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외국 속의 한국, 여행이 길어진다면 독특하게 번성한 한류의 끝자락 오쿠보를 방문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