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의 둘째 날
; 바닥 닦고, 책을 읽고, 공부하고

by 광장장

바닥을 닦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바닥을 닦고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미역을 불려 참기름에 볶아 미역국을 끓이고, 분홍 소세지를 계란에 부쳐내고 김치를 꺼냈다. 냉동실에 있는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광장에서는 압력밥솥을 이용해 늘 새로운 밥을 짓기 때문에 다 팔지 못하고 남은 밥은 한 그릇씩 소분해 냉동해 집에 가져와 먹는다. 올해는 유독 한가했던 날들이 많아 냉동 밥이 꽤 많이 쌓였고, 아마도 휴가가 끝날 때까지 즉석 밥을 살 일은 없을 것 같다. 밥을 다 차리고 먹으려고 수저를 들었는데 평소와 다른 어색함을 느꼈다. 항상 영상물을 보면서 밥을 먹었던 습관 때문이었다. 휴가 기간 동안 영상물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한 덕에 잠시 멈춰서 스마트폰 이전의 시대에서는 어떻게 밥을 먹었더라... 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근 몇 년간, 특히 스마트폰을 쓰고 난 10년 사이에는 영상물이 없이 밥을 먹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스마트폰이 없어도 밥집의 TV를 보면서 먹었던 것도 같았다. 기억을 더듬다 어린 시절 티브이 보지 말고 밥 먹는데 집중하라고 잔소리하던 엄마가 생각났다. 그때를 떠올리며 밥 먹는데 집중해 보았다. 왼쪽 오른쪽 번갈아가며 씹고 반찬도 국도 천천히 들이켰다. 평소 먹던 양을 차린 아침밥은 절반도 먹기 전에 배가 불러왔다. 밥을 집중해서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 만족감을 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뭔가 남기기도 애매해서 결국 천천히 다 먹고 말았지만, 다음 식사는 조금 적게 차려 보기로 했다.


밥을 먹고 나면 바로 설거지를 한다. 보통 요리하는 사람들은 설거지를 싫어한다고들 생각하지만, 나는 어떤 가사보다 설거지가 좋다. 요리하는 것보다 설거지를 좋아한다. 친구네 놀러 가서 술만 취하면 설거지를 해 대는 통에 오늘은 술도 적당히 마시고 설거지도 하지 말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도 있을 정도니까. 식기세척기가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내가 사는 집에는 스스로 설거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기 전까진 식기세척기가 들어오는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잘 먹고 비워낸 그릇을 세제로 닦아내고 물로 깨끗이 헹궈낼 때의 즐거움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거하게 쌓여 있는 그릇을 이쪽 설거지통에서 저쪽 설거지통으로 씻고 헹구고 닦아내서 차곡차곡 정리하는 건 마음을 좀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설거지를 할 시간이 없어서 퇴근 후로 넘기는 일이 있기도 하지만 날을 넘기지 않는 건 설거지가 주는 깔끔한 만족감 때문일 것이다.


청소도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텐데, 청소는 뭐랄까... 끝없는 굴레 속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설거지만큼의 만족감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먼지는 늘 어디선가 나와 날아다니고 있으니까. 머리카락도 마찬가지고.


*

북 페어에서 사 온 책을 처음에 세 챕터만 읽고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 ‘80년 대생들의 유서’ 80년대에 태어나 살아온 사람으로서 책을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80년대생의 인터뷰를 정리해 놓고 그 사람이 작성한 유서를 손 글씨 그대로 담아 두었다. 인터뷰이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든 하지 않든 유서를 읽는 일은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괜히 찡한 기분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전제하에 써 내려간 글에는 사회와 주변에 자신과 더 만들어 갈 수 없는 날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제목만큼 신선한 내용들이었다.

아쉬운 점은 책의 목차였다. 이 책을 첫 세 챕터만 읽고 한참 들여다보지 않은 이유였다. 곧 출산을 앞둔 예비 아빠, 혹은 엄마의 이야기가 연속해서 실려 있었다. 충분히 결혼과 출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나이 때긴 하지만 뒤편에 실려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번갈아가면서 담겨 있었다면 이 책을 한 달쯤 방치해 두진 않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생긴다면 부디 관심이 있는 챕터들을 순서와 관계없이 보길 바란다. 책을 읽고 나서 나도 유서를 써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p.255 인생이 내가 계획한 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계획했다고 해도 언제든 내 삶이 끝날 수 있잖아요. 그런 생각이 항상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자주 안 좋은 쪽으로 생각한다기보다는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삶이기 때문에 후회 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p.266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면 그 존재 자체를 볼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자 합니다. “요새 마음이 어때?”


p.267 떠날 수 없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 멈췄던 발을 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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