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아홉째 날
; 집순이 삶 체험하기

by 광장장


보통 집에서 하는 일이 뭐냐고 누가 묻는다면 집엔 잘 없다고 대답한다.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거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영화도 웬만하면 극장에서 보는 편이고, 약속이 있거나 약속이 없을 때도 집을 나선다. 산책을 하거나, 서점을 들러 서성이거나,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다이어리를 정리한다. 누구와 함께가 아니라도 나간다. 모든 것을 집에서도 할 수 있지만 집에 하루 종일 있었다를 무기력한 하루를 보냈다로 기억하게 되는 습관 때문인지 뭐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나가게 된다.


코로나 시대엔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다.


갈 수 없으니 굳이 갈 기회를 만들지 않고 1월 1일 친구들이 떠나고 청소를 하고 어제는 하루 종일 연하장을 쓰고 나니 오늘은 나갈 기회만을 노리는 일밖에 없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는 지독히도 싫어하는 등산을 하러 나섰는데, 등산로도 폐쇄되었단 뉴스를 들었다. 친구들은 좀 누워 있으라고 하는데 집에 있어도 낮잠을 자거나 누워있는 법이 없어서 뭔가 뭔가... 뭔가 할 일이 필요했다. 결국 유튜브나 SNS 영상을 보지 않기로 했던 걸 하나 해제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라도 움직이지 말자는 생각하에서.


[트루맛쇼]

맛집 방송을 꼬집는 고발 다큐멘터리. 실제로 가게를 여는 기치를 발휘한 이 팀은 방송 브로커를 섭외하고 실제로 다른 식당의 손님 알바까지 가는 열정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혀가 끌끌 차 지는 모습들 사이로 내가 가끔 가는 을지로의 가게도 나와서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고발프로와 맛집 프로에 아주 번갈아가면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방송을 봤으면 하지만, 사람들은 맛집 프로그램을 더 즐겁게 시청하겠지...

사람들이 간혹 광장은 왜 맛집 프로에 안 나올까. 혹은 블루리본이나 미슐랭 빕 구르망에 나오지 않을까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TV는 오픈 초기에 거절한 이력이 있고, 블루리본이나 빕 구르망 사람들은 먹으러 왔다가 반말 페이 때문에 쫓겨나지 않았을까요? 하고 농담을 한다. 미슐랭 또한 한국의 버전에서는 큰 논란이 있었던 걸로 안다. 블로그도 마찬가지고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으니 나랑 입맛 잘 맞는 친구나 내 감을 믿는 게 좋지 않을까.

특히 맛에 대해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 누구에게 맛있는 음식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냥 내 입에 잘 맞는 곳이 있을 뿐. 그리고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그 맛으로 모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다큐를 보고 더욱 그 생각은 공고해진다.


[인사이드 아웃]

한창 기쁨이 슬픔이 하고 얘기할 때 애니메이션은 관심이 없어서 보지 않다가 불쑥 보고 싶어 졌다. 아마 나는 버럭이가 아닐까? 하하.. 머쓱.


[설행, 눈길을 걷다]

이 영화들 중에 가장 먼저 본 영화였다. 좋아하는 김희정 감독님의 영화인데 이 영화만 극장에서 놓쳤다. 보고 나니 더 아쉽다. 감독님의 영화 중 가장 좋다. 가- 장 좋은 영화였다. 박소담과 김태훈 두 배우의 열연도 함께 나오는 모두의 연기가... 언젠가 감독님의 영화 특별전으로 개봉한다면 꼭 극장에서 보고 싶다.


영화를 무려 세 편이나 보고도 밥을 두 끼나 챙겨 먹고도 도무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MBTI [E]의 인간은 결국 약속을 잡고 말았다. 책 읽기도 잊지 않았지만 아직 시계는 9시를 가리켰고, 11시까지 일하는 요식업계 종사자는 이 초저녁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당황스러운 기분만 들었다. 집에 있는 게 너무 행복하다는 집순이 친구에게 헬프 사인을 보냈다.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나눠달라고 했더니 일단 잠을 12시간 이상 잘 수 있어야 되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탈락이라고 했다.

계획 없는 집순이 체험, 저는 하루 만에 탈락했고요. 그러니 내일은 반드시 나가겠습니다.


*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비혼 / 김애순, 이진송


역사 속 인물 같은 비혼주의자 김애순과 비혼 새내기 이진송의 대담 책이었다. 두 사람의 세대를 넘은 대화와 세대를 넘을 수 없는 대화들이 결혼보다는 비혼의 삶으로 미래를 상정한 사람들에게 생각을 넓혀주는 책이었다. 끝까지 김애순 선생님은 비혼을 선언할 필요도 없고 그냥 하면 되는 거라고 하지만 누구보다 굳은 심지로 70대의 비혼의 삶을 풀어내고,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진송 작가님은 함께 시대의 이야기와 시선을 담백하고 정확히 이야기하며 의견을 나눈다. 책의 모든 대화들이 유쾌하다. 유쾌하지 않은 부분들도 분명히 있지만 그 이야기들조차 단단히 얘기해나가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읽어 내려가자면 유쾌한 마음에 순식간에 읽어 내려가게 된다.

너무 많은 부분을 써 놓아서 몇 부분은 지우고 남기지만 이 책에서 빼놓을 부분은 한 부분도 없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싶다. 꼭 비혼이 아니라도,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사회를 살아가야 할지. 모두가 결혼하는 세상에서 굳이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삶은 어떤지 즐겁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P.008

나는 나를 아프게 하는 다정함들에게 이 책을 건네고 싶다. ‘나는 정말 괜찮아요’ 언제든지 안 괜찮아질 수 있지만, 그건 누구의 삶이든 마찬가지다. 모두가 언제나 괜찮을 수는 없다. 다만 비혼이라는 이유로 나의 권리를 빼앗아갈 때는 전혀 괜찮지 않다. 그러니 경찰서 같은 곳에 내가 혼자 앉아 있을까 봐 걱정하며 결혼을 권하는 대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말하련다.


P.062

우는 효녀는 될 필요가 없어요.


P.192

인간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인 동시에 자신의 삶을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독립적 인격체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어떤 관계에 ‘의해’서만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 관계 자체가 이미 개인을 매몰시키는 이데올로기다.


P. 209

외로움은 평생 따라다니면서 내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크기가 줄어들었다 커졌다 하는 해괴한 놈이거든. 남한테 너무 기대하고 또 실망하고 그러면 문병 오는 사람이 100명이어도 서럽고 외로울걸요.


P.246

나의 보호자는 나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사회의 시선이나 타인에 대한 부채감에 신경 쓰기보다 나의 선택을 우선하며 스스로를 존중할 의무가 있다. (중략) 가족을 이루고 운 좋게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생존의 필수조건이 아니기를 바란다. 누구나 가족의 형태와 무관하게 차별받거나 배제당하지 않고 온전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되길 원한다.


P.250

이 책에서 결혼에 대해 강력하게 부정하거나 비혼의 장점을 애써 주입시키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의 비혼 생활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려 애썼다. 비혼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비혼들과 비혼이 아닌 사람들 모두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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