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처에 사는 S가 휴가 기간에 무얼 할 거냐고 물었을 때 나는 와이파이도, TV도 없는 집에서 SNS와 유튜브를 끊고 책을 읽으며 휴가를 보낼 거라고 했다. 집에선 영 누워있기만 한다며 엄격한 관리자(ESTJ)의 관리 아래 디지털 디톡스 데이를 맞이하겠다 했고 날은 잡은 게 오늘이었다. 미뤄뒀던 시사인과 보내야 할 몇 개의 연하장과 새로 정리할 다이어리를 가지고 왔고, 나도 어제 다이어리 용으로 산 무선 노트와 읽을 책을 꺼내 들었다. 진도가 안 나갈 만큼 마음이 무거워지는 칼럼들을 가득 이은 ‘그냥, 사람’을 삼일 째 잡고 있었다. 한 번에 쑥 내려갈 책이 아니었다. 아직도 의문에 쌓인 세월호 이야기와 노들야학 장애인권에 대한 이야기, 대추리와 철거민들의 이야기, 그리고 여전히 내겐 양가적 마음을 들게 하는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차 있었다. 혼자 눈물을 삼키기도 하고, 한숨을 내뱉기도 하며 읽어 내려갔다.
한참을 각자의 책에 집중해 있는데 S가 벌떡 일어났다. 이런 순간이 필요하다며 스마트 와치를 사용해서 몇 분에 한 번씩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가볍게 걷고 다시 책을 집었다. 등을 벽에 기대지 않고 앉는 내 자세에 불편함을 느꼈는지 등을 댈 수 있는 자리로 옮기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잘 눕지도 않지만, 잘 기대지도 않는 사람이라 이대로가 좋다고 이야기했다. 참 다른 서로에 웃음이 나는 관계의 우리는 금세 각자의 책에 빠져 들었다. 잡고 있던 책을 다 읽고 너무 좋은데, 너무 무겁다고 했더니 가져온 시사인의 부록에 2020년 올해의 책에서 봤다고 하며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이 책은 2020년 시사인이 선정한 올해의 책에서 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저자의 책이었고, 독서리더가 뽑은 올해의 책에도 선정된 책이었다.
작가의 인터뷰에 그는 ‘인권기록 활동가’라는 호칭이 붙어 있었다. 노들야학에서 13년간 교사를 하고,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와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 구술 기록에도 참여했다. 그만큼 책에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단체들이 소개되어 있었고, 그와 연결된 다양한 책과, 꽤 많은 계좌번호로 글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그중 낯익은 사람의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416TV를 운영하는 세월호 희생자 지성양의 어머니 이야기였다.
벌써 4년이나 되었나? 광장의 개업 기념일 1주년에 손님들의 투표로 선정된 입장료 기부처가 416TV였다. 어렵게 연락처를 알게 된 지성양의 아버지는 모르는 식당에서 주는 기부금에 의아한 마음을 내비치셨다. 개업 1주년, 손님들이 모아준 입장료로 기부를 하고 있고, 손님들의 투표로 뽑혔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이 돈을 그냥 쓸 수 없다며 내가 드렸던 봉투를 한 번도 열어 보지 않고 그대로 내게 다시 건네셨다. 광장을 빌려 지금까지 고마웠던 분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하고 광장에 초대할 수 있느냐 물으셨다. 그리고 대관을 했던 날,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단단해진 본문에 등장하는 지성양 어머니를 처음 만났다. 두 분은 손님들을 위해 노래 공연을 준비하셨고, 나는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어머니와 지성양의 언니는 고마웠던 분들에게 열심히 만들어낸 음식들을 옮겨주셨다. 그 후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의문의 참사에 여전히 소리 내고 있는 416TV의 이야기들을 지켜보고 있지만, 조금은 소홀히 그리고 일상적으로 내 왼쪽 팔목에서만 기억되고 있다. 여유가 있으면 좋으련만 이 코로나 시대의 소상공인은 내 입 하나 걱정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이전에는 작게나마 마음이 가는 기부처에 얼마라도 보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나의 생활과 광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아무것도 선뜻 시작할 수 없다. 정기 후원하는 곳들을 끊지 않고 잘 유지하자는 생각으로 올해 겨울을 버틴다. 마음이 가난해졌다. 마음의 가난이 무서운 건 실제의 가난을 지속하게 하는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것, 그릴 수 없는 미래보다 하루하루 버티는데 시선이 매몰되어 시야가 좁아지는 것이다. 이 모든 걱정과 불안을 따뜻한 집에서 안락한 휴가를 누리며 보내는 것이 지금 나의 아이러니컬한 현실이지만... 부디 내년에는 더 많은 것을 보탤 수 있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간식을 곁들이기에 우리는 꽤나 수다쟁이라 어느 순간부터는 다양한 이야기에 깔깔댔다. 닭갈비는 미리 양념에 재워두었다. 요즘 배추가 맛있어 양배추 대신 배추를 잔뜩 넣어 닭갈비를 만들었다. 양념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매운 걸 못 먹는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먹어야 했지만, 닭갈비의 하이라이트인 참기름과 김가루가 들어간 볶음밥까지 해치우며 S의 디지털디톡스데이를 끝냈다. 밥을 준비하는 동안 연하장을 남긴 S는 디지털 디톡스의 집이지만 수다 프리존은 불가능했다는 문구를 남기고 떠났다. 배웅하는 길에 함께 나가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디지털 디톡스를 하지 않고 인스타그램을 켜 사람들이 찍어 올린 눈 사진들을 잔뜩 감상했다. 가난해진 마음이 조금은 다독여졌다.
책의 모든 목록, 모든 문단에서 적어야 할 말들이 가득해 옮겨 적는 게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보고 기록한 것으로 마음을 울리는 작가의 글을 부디 읽을 기회가 생기길 바란다.
P.015
청춘이 너를 한정 없이 기다려 주는 게 아니다. 청춘이 끝나면 너는 후회할 거다. 후회해도 소용없어. 그건 돌아오는 게 아니거든.
아버지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P.051
나는 죄책감이란 것이 '먼저 달아난 사람'의 감정인 줄로만 여겼는데 그것이 '누군가를 구하려다 실패한 사람'의 것일수록 더욱 고통스럽고 지독할 수 있음을 알았다. 실은 죄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지막을 목격한 것에 대한 책임감일 것이다.
그들이 10대의 마지막 터널을 지나 스무 살이 되었다. 위로를 하려면 그들이 무엇을 견디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응원하기 위해선 그들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P.125
세상의 변화는 장애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 장애인에게 닥쳐온 어떤 세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시작되며, 그것이 이 폭력적인 사회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살아가는 90퍼센트의 사람들이 비로소 비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성찰할 때일 것이다.
P.134
세월호의 '세'자만 나와도 온몸이 도사려지고 악의 없는 말에도 심장을 베이던 나날. 그리하여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들의 이름을 한 명씩 한 명씩 울면서 지워갔던 시간들. 봄은 별안간 닥쳐오지만, 이들에게 그 봄을 마주하기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P.139
혹여 정의감에 불타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다 해도, 어설프게나마 저들의 토목 용어 일부를 더듬더듬 구사할 즈음이 되면 터널 준공식이 거행되고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노루가 인간의 언어를 배운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P.165
건물은 부수고 재건축하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한번 부수어지면 회복되기 어려운 존재라는 걸 그가 죽음으로 말하고 있다.
P.171
외로움이 너무 커서 부서질 것 같은 사람과 부서지지 않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린 사람들은 서로를 원망하고 고립시킨다.
P.213
나는 고통이 사라지는 사회를 꿈꾸지 않는다. 여기는 천국이 아니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나 전태일처럼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은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몸을 사리며 적당히 비겁하게 내 곁에서 오래 살아주기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대해 얼마간의 책임이 있고 어떤 의무를 져야 하는 것이다.
P.244
어떤 사람은 당연히 받는 선물을 어떤 사람은 평생 싸워서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