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을 것은 잔소리뿐이요 얻을 것은 친구들이니
(1) 외국에서 아저씨들과 술 친구하기 - 폴란드 편
폴란드 아저씨와 Mad Dog
평일 저녁 한산한 술집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아저씨들을 본 기억이 있는가.
이들은 우리 주변에만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조금씩 부슬비가 내리던 바르샤바의 어느 화요일 저녁, 술 한잔 생각이 간절했던 나와 디에고는 코트를 걸쳐 입고 적당한 술집을 찾아 거리로 나왔다. 우리는 앞서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몇몇 번화가를 향해 무작정 걸었다. 비 내리는 평일 저녁이 늘 그렇듯, 거리는 인적이 드물어 고요했다.
그럼에도 누가 봐도 외국인이던 우리 둘은 관심을 끌었다. 우리를 스트립클럽으로 호객하려는 몇몇 사람들에 시달리다 보니 조금은 실망스러워졌다. 우리는 사람들을 지나쳐 골목 안쪽에서 담배를 태우다, 눈에 띈 바 한 곳에 들어갔다. 기대감 없이 들어갔던 술집이었지만, 분위기는 제법 괜찮았다.
술집 벽에는 너바나와 AC/DC의 옛 포스터와 티셔츠가 걸려있었고, 그 옆 스피커에서도 그들의 노래가 차례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바텐더 뒤편의 칠판에 분필로 적힌 메뉴를 훑어보았다. 디에고는 이탈리아 사람답게 네그로니 한 잔을 주문했고, 앞서 저녁을 많이 먹어 배가 더부룩했던 나는 테킬라 샷 한 잔을 주문했다.
바 옆쪽에는 놓인 테이블에는 불어를 쓰는 여행객들이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바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중년의 아저씨 한 명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바텐더가 네그로니와 테킬라 샷을 내놓았다. 디에고는 빨대가 꽂힌 네그로니를 쭈왑거리며 들이켰고, 나는 테킬라 샷을 곧바로 단숨에 들이켠 뒤에 또 한 잔을 주문했다. 빈 샷 잔을 바 테이블을 '딱'하고 내려놓자 옆에 홀로 있던 아저씨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둥근 코와 양 빰은 이미 술기운에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술기운과 졸음이 섞여 눈두덩이를 으쓱거리던 그는 손가락으로 내 잔을 가리키며 뭐라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폴란드어를 모르는 우리 두 사람은 그 내용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가 이미 혀 끝이 말릴 정도로 취해있음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폴란드어를 모른다고 영어로 몇 번 설명했지만,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잠시 후, 테킬라 샷을 다시 한 잔 내온 바텐더가 그 아저씨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당신들 뭘 마시고 있는지 물어보네요."하고 통역을 해 주었다. 나는 내 술잔을 가리키며 '테킬라, 테킬라!'하고 답했다. 작달막한 동양인이 연거푸 샷을 떼려 마시는 게 인상이 깊었나 보다.
그는 내게 영어로 무언가 이야기하려 했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그저 영어가 서툴러서 인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는 손가락을 '튁' 튕기면서 "음... 크레이지? 크레이지 독?"하고 이야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어떤 칵테일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술이 'Mad Dog'임을 안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그 아저씨는 바텐더를 통해 우리에게 말했다.
"이 아저씨가 술 한 잔씩 사 줄 테니 마시겠냐고 묻네요. 근데 일반적인 메뉴는 아니에요."
그녀는 그 아저씨가 주문하려는 술이 보드카와 타바스코 소스, 라즈베리 시럽을 섞은 샷이라고 설명해 줬다. 듣는 순간 '절대로 맛으로 먹는 메뉴는 아니겠군'하고 생각했지만, 재밌을 것 같아 그에게 엄지를 치켜들어 화답했다.
디에고는 바텐더에게 두 잔이 아니라 세 잔을 달라고 요청했다. 본인까지 마실 생각은 없었던 그 아저씨는 잠시 당황한 눈치였지만, 우리 세 사람은 함께 '나즈드로비에!'하고 외치며 각자 한잔씩 단 숨에 들이켰다. 더럽게 맛이 없었다. 그 아저씨는 세 잔의 술값을 계산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에게 답례로 술 한잔 대접하고 싶던 나와 디에고는, 손가락으로 한 사람씩 가리키며 "보드카?"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난 손사례를 쳤지만, 우리는 "This is Poland. We want vodka."하고 세 잔을 주문했다. 곧이어 나온 술을 우리 세 사람은 다시 각자 한 잔씩 들이켰다. 그는 다시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 술값을 내려했지만, 우리는 그를 만류했다.
그 뒤로 한 두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연이어 우리에게 폴란드어로 계속 말을 건넸다. 우리는 셋이 함께 담배를 태우고, 술을 마시며 대화했다. 그 아저씨는 중간중간 답답할 때마다 바텐더를 불러 이야기를 했지만, 이윽고 그녀는 귀찮았는지 바 반대편으로 넘어가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우리는 구글 번역기와 손짓 발짓을 해가며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말을 일절 안 통했지만, 술기운이 오르자 꼭 알아듣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쩌면 진짜로 알아들었을 수도 있다.
어느 순간 디에고는 그에게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그는 그제야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탁'치며 "Kurwa!"하고 외쳤다. 그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한참을 껄껄 거렸다. 나는 손가락으로 디에고를 가리키며 "이탈리아", 나를 가리키며 "코리아"하고 말했다. 한 참 웃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짓과 함께 무어라 계속 말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래, 너는 얼굴을 보면 여기 사람이 아닌 건 알 수 있었어. 근데 나는 이 친구는 왜 멀쩡하게 생겨서 폴란드어를 못하지? 어디 아픈 친구인가? 하고 생각했지 뭐야." 정도의 말을 한 것 같다. 물론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니 그냥 내 짐작일 뿐이다.
그는 이미 많이 취해있었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와 뜨거운 악수와 포옹을 나눈 우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술집을 나서 숙소로 돌아왔다.
폴란드에서도 아저씨들은 비슷했다.
그는 내가 뜻밖에 사귄 나이 많은 폴란드 친구다. 아직까지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