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월 다섯째주 추천 Thought & Movie
추천 생각 -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폭력을 생각해보기
추천 영화 - 더 랍스터, 미스테리어스 스킨
사회군중 속에서 내 모습을 관철해가며 살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의 룰'이 됬던 '사회 구성원'이 되었던지간에 내가 만나는 대상은 알게 모르게 나를 구속시킨다. (반대로 내가 구속시킬 수도 있음 역시 부정하지는 않는다.) 대상이 주입하는 구속은 사람들을 연기자로 만들어 매우 능청스럽거나 가식적인 모습으로도 변하게 하고 사회에 익숙한 모습으로 바꾼다. 애초에 나는 연기자가 체질에 안맞았다. 고로 "더럽고 아니꼬우면 회사 때려쳐” 를 추천하는 편이지만 이 또한 낙오자가 될까 무섭긴 매한가지다.(사회로부터 도망치는 거 같기도 하고..) 사회라는 시스템과 개인의 정체성은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어 보이고 서로간의 갈등은 끊임없이 양상된다. 아마 죽을때까지 ‘나’와 '사회'사이에서의 괴리감을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갈 것 같다. 특히나 신자유주의 체제 속 무한경쟁, 약육강식의 사회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한국에서는 아마 서로를 이해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잡아먹어야 하지 이해할 시간이 어디 있겠나. 적자생존의 험난한 인생길을 극복해야 하는 현실이니 말이다. 결국 이 괴리감은 폭력의 결말로 치닺는 느낌이다.
이러한 불편한 현실을 자각한 상태에서 눈여겨 보게 되는 영화가 있다. '해결불가능한 사회와 개인간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이 영화들은 결코 이탈할 수 없는 서로간의 관계 속 불안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어 동질감을 선사 한다. <더 랍스터(The Lobster, 2015)>는 개인에게 가하고 있는 사회의 폭력과 구속에 관한 해석을 제공한다. 다시말해 영화는 사회 내부의 규율과 규칙, 법적인 구속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솔로가 아닌 오직 커플만을 인정하는 <더 랍스터>의 세계관은 솔로들을 동물로 변형시켜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다소 독특한 세상이다. 규칙은 오로지 '커플이 되어야만 한다’고 사람들은 커플사회라는 목표를 위해 행동하고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나간다. 주인공 데이빗이 처음 머무는 공간 역시 커플을 만드는 양성소이자 커플이 되어야함을 세뇌시키는 교련소다. 사람들은 이곳을 통해 사회적 시스템을 인지한 '체제 속 인간'으로 육성된다. 다소 엉뚱해 보이는 이 규칙은 공간 속 사람들의 모습마저 멍청하게 만든다. 감정의 표현은 거의 없어지며 소극적이고 어수룩한 행동들은 마치 세뇌된 로봇처럼 부자연스럽다. 커플이 되기 위한 사람들과 공간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그럴듯하고 자연스럽게 잘 돌아가는 시스템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들의 모습에는 진실된 모습이란 부재하다. 특히 동물이 되기 하루 전 머리결이 좋은 여성과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성간의 대화장면에서 내리친 뺨은 사회 속에서 진실된 교감이 사라진 사람들의 행동에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영화는 이러한 시스템 체제에 반기를 드는 세력 역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집단은 솔로로 사는 삶을 추구하며 아나키스트적 성격으로 커플만을 인정하는 사회 지침에 반대하는 반정부적 집단이 된다.
하지만 체제를 전복하려는 반정부적 집단 역시 또 다른 시스템과 규율, 체제가 있다는 점은 데이빗이 어느 집단에서도 도망칠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며 규율과 규칙이 반드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사회의 성격과 사회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선 폭력적인 강요가 동반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커플사회나 솔로사회나 더 이상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순히 생존을 위해 사람들은 사회를 유지시키는 기계적 부품이 된다. 이 영화가 사랑이야기임은 분명하지만 사랑에 대한 가치관도 변화시킨 영화속 세상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차지하고 있다. 자신의 사랑을 위해 규칙을 어기는 주인공 역시 이 곳에서 벗어날 기대는 찾아보기 힘들고 결말의 주인공 모습에서는 사랑을 위한 갈등은 없으며 커플이 되기 위한 암묵적 시스템의 구조만 드러내고 있다. 사회를 벗어나 개인의 삶을 살아가려 하지만 결국은 벗어날 수 없는 오늘날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스테리어스 스킨>은 직접적으로 개인과 사회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은 적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한국의 혼돈안에서 이 영화는 사회집단 안에서 생기는 고민들로 썰을 풀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 특히나 떠들석하게 연예면을 차지했던 아이유 이슈에 관해서 퍼져나온 ‘소아성애(Pedophilia)’와 이 영화는 예술가적 해석의 자율성에 대한 논의를 넘어 개인의 성적 지향성 권리와 사회집단 내에서의 ‘범죄’, ‘금기’사이에서의 갈등을 생각하게 한다. 동성애가 합법화된 세상은 앞으로 어떤 다양한 성적 취향이 봉기를 들고 등장할지 두고볼 일이 되었다. 그 중 가장 선봉에 선 것은 소아성애인데 한창 논란이 뜨겁다. <미스테리어스 스킨>은 소아성애자 대신 이와 관계를 맺은 어린 아이를 주목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온다. 소아성애자가 말하는 성적지향성에 대한 권리를 말하기 앞서 영화는 관계를 맺은 대상, 즉 어린아이의 성장과정을 보여주고 이들의 변화하는 모습과 혼란을 보여준다. 이는 한 개인이 집단 내 다른 구성원들에게 취하는 행동이 초래할 가상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인데 영화 속 성관계는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관계를 만들고 갈등을 야기하며 삶의 방향을 만드는 사회 구성의 기본 단위 요소로써 작동한다. 관계, 더 나아가서는 사회를 형성하는 기본적인 방법, 규칙, 툴로써 섹스가 야기하는 고민들은 성적 지향성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과 선입견에 대한 비판은 물론이거니와 이와는 반대로 다른 사회구성원에게 끼칠 파장의 카오스로 확장된다. 특히나 동성애 같은 쌍방의 합의가 전제되는 점과는 달리 소아성애는 일방적으로 행해질 여지가 대다수이고 아직 자아형성이 되지 못한 어린 아이들에게 끼칠 영향이 어떤식으로든 폭력이 될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분명 소아성애는 본능적인 끌림과 사랑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동성범죄와 결을 달리하여 사회적 취급에 대한 논의와 성욕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점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어린아이에게 끼친 영향으로 말미암아 어떤 논의보다도 자신 이외의 생명을 소중히 대하는 방식과 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사회구성원으로써 개인은 인간 본연의 불가항력적인 본능보다도 지켜야 할 사회적 규율과 기본 도리가 있는 것이다. (물론 기본 도리라는 것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 뒤바뀔 여지가 있는 불안정한 것이고 불변의 진리로 취할 필요는 없다. 사회의 규율은 세포처럼 계속해서 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관이 작게는 개개인끼리의 갈등, 크게는 지역이나 국가와의 갈등으로 확장되는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서로간의 다른 의견은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부분 이런 상황은 서로를 이해하기 보다는 힘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 한 쪽이 일방적으로 비난이나 비판을 받고 제거당한다. <미스테리어스 스킨>대로라면 이러한 행동은 상대방에게 전혀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안겨주고 괴물로 만들어 버리고 <더 랍스터>에서는 시스템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숨긴 연기자가 되고 사랑이 부재한 커플만을 양성한다.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 개인이 사회에게 구사하는 폭력. 아마 과거 아이유 사건을 통해 상처를 받은 대중들도 있거니와 아이유 역시 자신의 모습을 더이상 드러내지 않는 연기자의 모습으로만 나타날지 모른다. 우리는 복수의 정답이 있는 문제를 가지고 한 가지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회와 개인 사이의 갈등은 한쪽이 승리할때까지 싸우게 되면 그 것은 정답도 아니거니와 그 과정은 너무 처참하다. 애초에 데이빗은 자신의 눈을 찌를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사랑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 내가 당하는 폭력, 내가 가하는 폭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