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시간, 몽골
몽골 생활 1년 치 짐을 공항 출발 4시간 전부터 싸기 시작한 사람요?
저요.
아, 물론 가져가야지 싶어서 물건들을 한편에 따로 빼두긴 했지만, 막상 패킹할 시간은 없었다. 뭐랄까? 지금 이 순간 몰아닥치는 수많은 일들 중 내게 중요한 것은 짐을 꾸리는 일이 아니었다. 자꾸만 미뤄졌다. 최악의 경우, 여권이랑 카드만 있으면 되지. 물론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하고, 때로는 불편함이 있겠지만 말이다.
지난 2월 말, 엄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삶에 너무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NGO 봉사단으로 몽골 바가노르 지역의 청소년 센터에서 1년간 활동할 예정이었고, 떠나는 날은 4월 10일로 정해져 있었다. 이 시기에 떠나는 것이 맞는지, 수없이 고민했다. 동생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도쿄에 정착한 지 햇수로 10년.
내가 가버리면, 아빠는 갑자기 혼자가 된다.
우리 엄마는 정말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내가 주방에만 들어가도 뭐가 필요한지 알아채고 살뜰히 챙겨주던 사람. 물을 당신 손에만 묻히시고, 가사를 돕겠다는 말조차 "괜찮다"라고 하던 사람. 새우나 생선을 구워 먹을 때도 여전히 내게 살을 발라주던 사람. 그렇게 나는 참으로 귀한 섬김과 헌신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아빠에게도 엄마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늘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까지 엄마가 챙기셨다. 그러니 아빠가 겪게 될 빈자리는 턱없이 클 것이다. 그런 아빠를 두고 떠나려는 마음은 쉽지 않았다.
장례식이 끝날 무렵, 친척들의 말을 통해 무언의 압박을 받았다. “이제 집에 엄마가 없으니 네가 아빠를 잘 돌봐야 한다. 아빠 식사 잘 챙겨드려라.” 걱정과 염려를 담아 내게 건넨 말일 것이다. 다만 압박이라고 느낀 건, 그 말을 듣는 내 마음이 왠지 모르게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아빠를 챙기기 싫다는 뜻이 아니다. 아빠를 챙기기 싫다는 뜻이 아니다. 일본에 있는 동생이 부럽다는 뜻도 아니고, 그가 느낄 마음의 어려움 또한 헤아려진다. 사랑하는 나의 아빠와 동생. 할 수 있는 만큼 잘 돌보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다. 하지만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것과 타의에 의해 마땅히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은 다르다. 친척들은 내가 곧 몽골에 갈 예정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지척에 사는 줄 아셨으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도 동생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이럴 때만) “장녀니까 네가 가정을 돌봐야지”라는 말에 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집안의 중대사는 늘 장남을 찾으면서, 뒷바라지는 늘 장녀의 몫인 걸까? 어릴 적, 남자들은 큰 상에, 여자들은 자투리 음식을 아무렇게나 놓은 좁은 상에 둘러앉아 먹던 기억이 난다. ‘장손’이라는 말에 여자 형제는 포함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페미니스트라고 불리고 싶지는 않다. 그저 우리는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children’인데, 성별로 인해 존중받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지점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친척들이 내가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 가면 안 되겠냐?”, “꼭 가야만 하겠냐.” 그리고 “1년 뒤에 돌아온다"라는 말에 이어지는 긴 침묵과 큰 한숨이 내 마음을 짓눌렀다. 나는, 아빠를 버리고 떠나는 죄인이 되어버린 듯했다.
이런 고민을 아빠와 나눴다. 친척들의 말이 부담된다고 솔직하게 말했더니, “무조건 몽골에 가라. 속 사정을 알지도 못하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거니까 하나도 신경 쓰지 말고. 어떻게 나를 위해 너를 붙잡아 두겠냐. 시간은 걸리겠지만 하나씩 하면서 살아가겠다"라고 하셨다(바보… 매일 출근길에 울면서). 동생 역시 “가는 게 좋겠다"라고 했다. 그게 오히려 아빠의 마음의 짐을 덜어줄지도 모르겠다고. 그 말에 조금은 안심되었지만, 무거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삶은 참으로 야속하게 흘러 출국 날이 다가왔다. 공항버스를 타기 직전까지 엄마를 잃은 상실감을 느낄 틈도 없이 부모님 집과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고, 자취하던 부산의 집까지 정리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아빠가 엄마의 빈자리를 덜 느끼시도록 장도 보고, 난생처음 제대로 된 한식(반찬과 국 요리)을 시도하며 매 끼니를 챙겼다. 전세 대출을 받았던 집은 만기일이 해외 체류 중이라 미리 챙겨야 할 서류가 많았다. 대출할 땐 신경 썼지만, 상환할 때 생길 수 있는 이슈를 체크하지 못했던 내 부족함도 컸다. 집주인의 비협조적인 태도까지 더해져 간단히 끝낼 수 있는 일이 복잡하게 흘러갔다.
그 외에도 행정 업무, 서류 정리…
말하자면 끝이 없다.
마음 편히 자고 싶었고, 이젠 좀 쉬고 싶었다.
공항에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4층으로 올라가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마지막으로 자동차 명의 이전, 보험 수정, 유틸리티 전출 신고 같은 한국에서 해야 할 행정 업무를 끝마쳤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맥북을 덮고 수하물 체크인을 하러 일어날 수 있었다. 출국 전,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보고 싶은 사람도 많았지만,
그건 나에겐 사치였다.
그날의 인천공항에서 바라본 날씨는 꽤 맑고 따뜻했다. 지금 이 기록은 떠나는 발걸음이 왜 그토록 무거웠는지를 기억하고 남기기 위해 쓰는 글이다. 바쁘고 정신없이 흘러갔다는 이유로 머릿속에서 삭제된 이 시간들이 마음에 짙고 선명한 자국을 남기며 존재했음을 기억하기 위해서 말이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나는 곧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다.
아주 잠시.
너무 피곤하면 잠이 오지 않는걸? 지금 딱 그런 상태였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이북 리더기를 꺼내 유발 하라리가 쓴 <극한의 경험>을 읽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에 콕 박히는 구절을 만났다.
며칠 전, 소도읍에서 내가 했던 이야기. 류시화 작가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속 글귀와 “길을 잃는다는 것은 곧 길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라는 동아프리카 속담과 같은 선상에 있는 메시지였다.
인생을 살다 보면 겪는 일은 의도적인 경험, 우연한 경험, 도전적인 경험으로 나뉠 수 있다. 경험은 늘 내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일들 앞에서 아무리 맷집이 세다 한들 버거운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의 나처럼. 슬픔과 황망함 속에서 지금 이 상황은 어느 하나의 감정으로도 정의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나를 더 깊고 넓고 단단하게 만들어줄 거란 믿음도 있다.
지금은 그저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수밖에. 그래서, 눈물이 나면 울고 웃음이 나면 웃으려고.
그렇게 울란바토르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창을 통해 바라본 광활한 몽골의 풍경은 마치 수채화 같다. 엄마, 나 여기서 잘 지낼 수 있겠지? 건조한 바람을 맞자 안 그래도 건조한 손과 피부를 걱정하던 엄마가 떠오른다. 보고 싶다, 많이.
공항에서 본 광경만으로도 이미 몽골은 정말 드넓고 광활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저 멀리를 향한다. 몽골 오기 전 삼촌 가게에서 안경을 새로 맞췄는데, 시력 3.0 되어서 오라는 친구들의 말이 떠올라 어려울 줄 알지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인천에서 울란바토르로 오는 길은 NGO 현지 기관 지부장님 N과 동행했다. N은 4월 초 한국에서 프로젝트 연수가 있으셨는데 종료 후 나의 입국 일정과 맞추어 티켓팅을 하셨다고. 도착해서는 지부장님의 지인이 공항 픽업을 와주셔서 바가노르까지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아 참, N은 한국어를 꽤 잘하시는 몽골 분이다. 누군가는 운이 좋다고 할 수도 있고, 나이스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연인듯하지만 알게 모르게 주변의 도움을 참 여러모로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새벽 5시 10분 공항버스를 타고 시작된 긴 여정은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시차가 -1시간 이니, 17시간 걸렸네. 거의 남미나 아프리카 가는 거리잖아ㅎㅎ
NGO 봉사단원의 경우 보통은 현지 도착 후 호텔에서 머물며 스스로 집을 구하거나 기관에서 몇 가지 선택지를 알아봐 주신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지친 나를 받아줄 숙소는 바가노르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 단원들이 최근 몇 년간 써오던 집이자, 내가 앞으로 일하게 될 센터 바로 뒤 건물에 위치한 곳.
늦었지만 저녁으로 먹으라고 지부장님이 그 시간 유일하게 배달이 되는 한식당에서 김밥을 주문해 주셨다(부족할까 봐 무려 치킨버거까지..!) 피곤해서 씻으면 바로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참기름 냄새가 피곤함을 뚫고 코를 자극하자 김밥 한 줄은 순식간에 뱃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한 입을 먹기 전 아차 싶어서 사진을 찍었다. 몽골에서의 첫 끼가 김밥이라니 웃음도 났다.
바가노르는 작은 마을인데도 GS25와 CU가 여섯 군데는 되는 듯하다. 한국 음식점도 있고! 울란바토르에 이마트도 생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한국 문화가 구석구석 깊이 들어와 있나 보다. 영어보다 한국어를 더 반긴다는 말도, 괜한 말이 아닐 것 같다.
짐을 풀며 아빠와 영상통화를 했다. 숙소를 보여드리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빠가 소파에 기대더니 그새 깜빡 잠이 들었다.
“아빠~! 자는 거야?”
“아니야, 듣고 있었어.” 씨익 웃으며 아니라고 했지만 순간적으로 졸았다고 시인한 아빠.
그래, 아빠도 많이 피곤했겠다. 새벽에 나 데려다주시고, 짐 싸는 것도 도와주셨으니.
그런데 이 숙소… 청소가 시급하다. 한국에서도 청소와 빨래를 엄청나게 하고 왔는데(습진 생겼잖아...), 여기서도 대청소부터 해야 할 판이다. 올 상반기는 공간도, 마음도 청소와 함께 시작해야 할 것 같다ㅎㅎ
하지만, 일단 오늘은 잘래.
도착한 날은 밤이라 몰랐는데 다음 날 아침, 창밖에는 녹지 않은 눈이 보인다. 아이, 삭막해. 간밤에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던지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위잉 위잉 하는 바람 소리에 깊이 잠들지 못했다.
4월의 몽골은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영하로 기온이 떨어진다. 한국에서 드라이클리닝해서 가져온 롱패딩을 입으려 곧바로 꺼냈다.
지금 내 마음이 무겁고 슬퍼서일까? 바다를 좋아하는 여름 사람인 내가 이곳에 정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약간의 염려를 안고, 이곳에서의 삶을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