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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견과상념 Dec 07. 2020

노트북 하나 들고 제주에서 한달'일'하기

디지털 노마드는 가능한걸까

10월 16일부터 11월 9일까지, 한 달을 조금 못 채운 25일간의 제주살이가 끝났다.

사진도 아주 많이 찍었지만 어쩌면 다시 오기 힘든 이 시간을 좀 더 길고 깊게 추억하고자 나름대로의 후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긴 글 주의!


Part 1. 제주살이, 혹은 Work From Jeju에 대한 환상과 실상

첫번째로 머물던 숙소에서 보이던 바다뷰

 초장부터 흥깨는 내용이라 미안하지만, 환상과 실상의 차이는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려 한다. 처음에 제주살이에 대해 생각했을 때는 막연하게 퇴근하고도 할 것이 차고 넘쳤던 서울의 삶을 생각하며 제주도에서는 얼마나 더 풍요롭게 퇴근 후의 제 2의 삶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해 기대했다. 하지만 내가 갔던 시기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때여서 더 그랬을수도 있지만 생각보다 해가 정말 빨리졌고, 서울처럼 모든게 집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제주에서는 해가 지면 문자 그대로 할 것이 없었다. 일을 정시에 마쳐도 여섯시 반이면 해가 졌고 잠깐 노을을 구경하다보면 어느새 온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였다. 그즈음 밖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면 사실 술마시기 정도인데, 차 없이 이동이 힘든 제주에서는 그마저도 제한적이었다. 친구들과 같이 가서 숙소에서나마 함께 소소한 재미를 찾을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혼자 갔다면...도무지 뭘하며 시간을 보냈을지 모르겠다.


 제주도에서 숙소를 찾을 때 뷰에 꽤 집착하기도 했다. 왠지 모닝커피 한 잔과 함께 여유롭게 창문 너머 바다를 바라보며 노트북을 두들기는 디지털 노마드를 상상했달까. 하지만 실제로 일다운 일을 하다보면 고개를 들어 창 밖 한 번 바라보기도 힘들었다. 오히려 출퇴근시간, 점심시간, 업무시간의 명확한 구분이 있었던 때와 비교해보면 숙소에서 숙소로 출근하고 숙소에서 점심 먹고 숙소에서 일하는 하루는 사실 위례에서 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주 가끔 틈이 나면 잠깐이라도 바다로 산책을 나가거나, 여유있는 날에는 숙소 근처의 예쁜 카페를 찾아가서 일하는 등의 소소한 호사는 누릴 수 있었지만 일을 할 때는 생각보다 '제주에 있다'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기 어려웠다.


 더불어 생각보다 일하기 적절한 공간을 찾는 것, 마련하는 것도 꽤나 난관이었다. 어쨌든 난 해야할 일이 있고 좋든 싫든 평일의 황금시간대는 노트북 앞에 붙어있어야만 했는데 어디 관광지 숙소에서 제대로 된 책상이나 의자 찾기가 쉽던가. 등받이가 있는 의자, 노트북을 적절한 눈높이에 두고 일할 수 있는 책상, 여러 명이 함께 일할 수 있고 미팅이 겹칠 때를 대비해 분리된 공간이 여러 개 있는 숙소를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적절한 숙소를 찾긴 했지만, 그 안에서 내 몸에 맞게 업무 환경을 꾸리고 또 적응해나가는 것은 그 나름의 부담으로 다가왔다.

평일 아침마다 어김없이 네 개의 노트북이 올려졌던 두번째 숙소의 테이블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제주도에서 일한다는 건 사실 서울에서 일한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고 오히려 예상치 못한 결핍과 어려움을 느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Part 2. 그럼에도 제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는 나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가져다 주었다. 재택근무를 하며 생활 리듬이 완전히 망가져 새벽 2-3시에 자고 늦게 일어나 오후까지 피곤해하기 일쑤였던 내가 적어도 제주에 있는 동안은 아침 9시를 넘어서 일어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해가 지면 할 게 없는 제주의 환경도 한 몫 했지만,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지척에 널려있는 제주에서는 내가 애쓰지 않아도 눈이 일찍 떠졌고, 기대와 함께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일찍 하루를 시작한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여러 번의 해안가 달리기, 숙소 발코니에서의 아침 요가, 건강한 아침 챙겨먹기 등이 서울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업무 생활에 refreshing moment가 되었다.

친구들이 떠난 뒤 혼자 머물던 게스트하우스 옥상 위의 요가

그리고 산과 들과 바다를 사랑하는 내게 제주에서 보낸 여러번의 주말은 너무나 충만했다. 온전히 내 시간을 쓸 수 있는 몇 번의 평일 휴가와 주말이 있었기에 짧은 일정으로는 시도해보지 못했을 여러가지 것들을 제주에서 하게 되었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며 기대보다 훨씬 아름다웠던 서귀포 바닷속의 산호 군락을 만나기도 했고, 수 년 전 눈 덮인 모습만 봤던 한라산을 두 번씩 가며 한라산 곳곳의 가을 풍경을 마음껏 누렸다. 길 한복판에 뜬금없이 나타난 메밀밭에 차를 세우고 한참 사진을 찍기도 하고, 산과 들을 쏘다니다 지치면 서점에 들어가 맘에 드는 책을 골라잡아 그대로 엉덩이를 붙이고 몇 시간씩 책을 읽기도 했다. 워낙 많은 것을 보고, 하는 것에 집착하는 성격이 어디 가진 않았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은 덕분에 제주 살이 말미에는 아주 조금 여유를 찾을 수도 있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한라산

 마지막 하나는 뜬금없게도 사람이다. 제주에서도 서울에서 보던 사람들을 그대로 만났지만 다른 환경에서 유대를 쌓으니 같은 사람들과도 (나만 느끼는 걸지도) 특별한 맥락이 생겼다. 특히 초반 2주 내내 계속 붙어있으며 아침부터 밤까지, 평일과 주말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과는 남는 시간에 함께 글과 음악을 나누며 서로의 둥근 부분과 모난 부분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각자의 영감이 되어주기도 했다. 잠깐의 주말이지만 꽉찬 일정을 함께한 영화모임(을 가장한 취미공동체) 사람들과도 10km 달리기를 포함한 어마무시한 일정을 다같이 소화하며 영화라는 하나의 주제로 만났지만 폭넓게 서로의 성향과 선호를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또 마지막 한 주 동안 지냈던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커플과도 그들의 배려 덕분에 걱정했었던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업무도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고, 오히려 서울에서는 미처 나눌 기회가 없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삶의 가치, 방향성에 대해서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제주는 나에게 같은 사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었다.


Part 3. 그래서


 그래서 만약에 내게 또 제주를 길게 갈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최대한 일을 덜 하면서(매우 중요) 제주의 자연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누리고 그 감정을 나누고 싶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제주에 내려갈 때만 해도 길게 느껴졌던 제주살이가 지나고 보니 막판에 비행기표를 어거지로 바꿀 정도로 찰나의 순간처럼 느껴졌다. 우습게도 제주에서 돌아온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벌써부터 사진을 습관처럼 뒤적거리는 내가 어쩌면 곧 생각보다 빨리 또 제주에 가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음엔 더 길게 보자 안녕!

굿바이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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