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의견과상념 Dec 07. 2020

밖순이의 재택근무 5개월차 후기


나는 극한의 밖순이다.

나에게 집은 생산성 있는 활동을 하는 공간과는 아주 거리가 먼, 휴식이자 수면의 공간일 뿐이었다.

내 모든 업무, 취미, 사회활동은 집 밖에서만 이루어졌고, 자연스레 집에서는 침대 위에서 굳건한 와식생활만을 고집해왔다.

그리고 내가 다니는 회사가 재택근무 방침을 내년 7월까지 연장했다는 소식을 지난주에 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바로 든 생각은, '난 망했다.'

하지만 운명을 거스를 순 없는 법.

남은 1년여간의 재택근무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자, 그리고 혹시 더 있을 재택근무 동지들을 위해 극한의 밖순이인 내가 지난 5개월 간 재택근무 생활을 어떻게 버텨내고 또 어떻게 조금이나마 적응했는지 적어보고자 한다.



3월: 카페탐방자 - 산산조각 난 Work from the Cafe의 환상

2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확진수가 늘면서 우리 회사는 3월부터 점차 재택근무 체제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재택근무가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재택근무를 권장한 적은 처음이라 며칠은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달콤함에 젖어 재택근무의 장점을 마음껏 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의 잠만 자고 나오는 용도로 집을 사용했던 내게 하루 종일 집에서 모든 생활을 하는것 자체가 너무나 큰 챌린지였다. 업무를 하기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책상과 의자에서 7-8시간을 내리 일하는 건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어려운 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나는 1일 1카페를 시작했다.

동네에 있는 가까운 카페들을 거의 다 방문해 갈 때쯤, 1일 1카페에도 한계가 찾아왔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 한 잔 하며 프로페셔널하게 업무를 보는 'Work from the Cafe'에 대한 환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카페 Work from the Cafe에서는 아래와 같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화상회의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카페에서 화상회의를 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소음. 아무리 말을 하지 않을 땐 음소거를 해둔다고 해도 카페의 수다 소리, 커피 내리는 소리 등 다양한 생활소음이 당연히 집보다는 훨씬 많기 때문에 화상회의에 참여한 상대방에겐 내 말소리와 섞여 들어가는 소음이 상당히 거슬릴 수 있다. 더불어 내부적인 업무 관련 내용이 유출될 수 있다는 것도 큰 문제. 갑자기 든 생각인데, 화상회의 용으로 노이즈 캔슬링 기술이 들어간 '마이크'가 보급되면 좋겠다.

자세에 좋지 않다. 물론 공부나 업무를 하기 적합한 책상과 의자를 갖춘, 소위 말하는 '카공족'을 위한 카페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노트북만 들고 단출하게 카페에 가서 업무를 하다 보면 낮은 위치의 노트북 모니터를 보기 위해 자연스레 어깨가 말리고, 등이 굽고, 목이 나오게 된다. 집에 있는 책상이 불편하다며 카페를 전전했지만 결론적으로 더 삐딱한 자세만을 얻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추가적으로 들어가는 돈과 정신적 에너지도 역시 문제. 업무를 2-3시간만 할 건 아니니 자연스럽게 한 카페에 있다 보면 예의상 메뉴 한 개 정도는 더 시키거나 중간에 카페를 이동하게 되는데, 그럼 하루에 카페에서 지출하는 돈만 만원이 우습게 넘어간다. 거기에 디저트라도 하나 시키는 날에는 추가 지출과 함께 살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또 카페의 좌석이 업무에 최적화된 공간은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레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추가되는데, 예를 들면 화상회의 시작 5분 전에 노트북 배터리가 10% 남아 이리저리 콘센트를 찾아 돌아다니는 짜릿함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카페탐방자 시기는 채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다.


4-5: 뜻밖의 인테리어 입문기 - 어떻게든 방을 Workable하게 바꿔보자

오피스를 제외하고 밖에서 마땅한 업무 공간을 찾기 어렵다는 결론을 낸 후, 결국 나는 내 방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은 오직 휴게 공간이던 방을 어떻게든 Workable하게 바꾸는 작업과 소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재택근무가 장기화되며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출 수 있게끔 지원해준 $1,200 상당의 회사판 재난지원금(?)도 여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원래 비교적 둔한 편이고 인테리어에 큰 관심이 없던 나도 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나니 방의 '사소하지만 예쁘지 않은 것들'이 상당히 거슬리기 시작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꽃분홍색 꽃무늬 이불, 그럭저럭 베이지/화이트 톤으로 맞춰둔 가구들 사이에서 혼자 튀는 15년 된 체리오크색 책장, 화장대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진 향수병 등이 나를 괴롭혔고, 방에서 화상회의를 할 때마다 내 카메라에 걸리는 그 예쁘지 않은 부분들이 결국 나를 인테리어/소품 사이트로 이끌었다. 그걸 시작으로 4-5월간 계속된 소비 목록은 대략 아래와 같다.

꽃분홍 이불 탈출을 위한 베이지색 체크무늬 침구세트

체리오크색 가구는 이제 안녕. 모던한 화이트 책장

화장대 정리를 도와줄 귀걸이 거치대

각종 잡동사니를 깔끔하게 담아둘 리빙박스 4종 세트

화이트로 맞췄으니까 이 참에 같이 흰색으로 바꾼 휴지통

척추 건강을 위한 모니터 받침대와 노트북 거치대

그래도 앉은 자세가 뭔가 불편해서 구매한 목받침이 있는 시디즈 의자

노이즈 캔슬링 기능으로 화상회의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에어팟 프로

거의 이사할 때 마냥 뭔가를 이것저것 사들이고 재배치하고 가꾸며, 왠지 정을 붙이기 어려웠던 내 방에 정을 붙일 수 있었고 또 실제 업무를 하는 책상 환경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예전보다 불편하지 않게 업무를 할 수 있었다. 공간에 투자한 돈과 시간이 극한의 밖순이인 나도 방에 조금이라도 더 엉덩이를 붙이고 있게 한 힘이 되었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공간에 영 정이 안 간다면 한 번 돈을 와장창 써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6-7월: 나만의 루틴 만들기 - 하루 혹은 일주일의 고정 스케줄 만들기

재택근무 자체도 큰 변화였지만, 재택근무 때문에 평일 출퇴근 스케줄에 맞춰하고 있던 취미나 여러 활동들도 재편이 필요했다. 특히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 일과 일 외적인 삶이 잘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의도적으로라도 전혀 일과 관계없는 활동들 몇 가지를 고정시켜 루틴을 만드는 것이 심리적으로도 '퇴근했다'라는 느낌을 받고 업무 스위치를 off하는데 도움이 된다. 더불어 오피스에서 일을 할 때는 출퇴근에 더해 오피스 안에서도 미팅룸이나 식당 등을 가기 위해 움직이며 자연스럽게 퇴근할 때까지 5천보 정도는 걸었는데, 재택근무를 하며 모든 이동거리가 1분 미만으로 단축되어 운동량이 현격하게 떨어졌기 때문에 이를 보충하기 위해 특히 여러 가지 신체적 활동을 더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6-7월 동안 여러 가지 시행착오 끝에 완성한 나의 일주일 루틴은 대략 이렇다. 아, 그리고 내가 취미 부자임을 이해해주시길.

월요일: 6시 퇴근 -> 6시 30분까지 저녁 식사 -> 7시 30분까지 춤 학원 이동 -> 9시까지 춤 학원 수업 수강 후 헬스장으로 이동 -> 10시 30분까지 하체 웨이트 -> 11시 귀가

화요일: 6시 퇴근 -> 6시 30분까지 저녁 식사 -> 7시 30분까지 드럼 학원 이동 -> 9시까지 드럼 수업 수강 후 헬스장으로 이동 -> 11시까지 상체 웨이트+유산소 -> 11시 30분 귀가

수요일: 파트너 디너는 무조건 수요일로 or 디너 혹은 약속 없을 시 집 근처에서 러닝

목요일: 12시 점심 -> 12시 30분에 동네에서 테니스 레슨 -> 1시 30까지 귀가 후 오후 업무

금요일: 불!!금!!!!!

위 내용만 보면 무슨 운동 중독자 같지만 물론 매주 모든 루틴을 다 수행하진 못하고 때로는 과음으로 다음날을 완전히 망치기도 했다. 그래도 적어도 월요일, 화요일 저녁만은 외부 스케줄 없이 온전히 내 취미와 운동에 할애하고 있고 이렇게 주초를 보내고 나면 찾아오는 나름의 성취감과 뿌듯함이 남은 한 주를 더 잘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신체활동을 꾸준히 해온 덕에 재택근무와 야외활동이 제한이 가져오는 '확찐자'의 마수에 아직은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더불어 루틴을 만든다는 것은 내 삶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데도 도움이 된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이지만, 나의 하루, 나의 한 주만큼은 예측 가능한 일들로 채워가며 자연스럽게 나의 삶에 대한 예측 가능성도 높일 수 있다. 나는 내가 운동을 꾸준히 할 것이므로 재택근무 기간이 길어지더라도 체중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임을 안다. 나는 드럼을 계속 배울 것이기 때문에 세 달 후에는 지금보다 더 복잡한 리듬을 연주할 수 있게 될 것임을 안다. 이러한 사소하지만 확실한 나의 미래들이 쌓여 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도 조금 더 삶의 중심을 잡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뭔가 거창하게 쓴 것 같지만 결국은 5개월간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바꿔보고 부딪혀본 좌충우돌 재택근무기(記)이다.

재택근무가 아니었으면 사지 않았을 베이지색 이불, 가지 않았을 헬스장, 느끼지 못했을 루틴의 소중함이 재택근무를 하며 조금 잃었던 삶의 활력을 돌려주었다. 아직 터널의 끝이 명확하게 보이진 않지만 부디 내 경험담이 누군가에게는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일말의 기회라도 주길 바라며,


앞으로 남은 1년간의 재택근무 기간도 잘 버텨보자!






작가의 이전글 노트북 하나 들고 제주에서 한달'일'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