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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일 Mar 14. 2019

어느 가족

그들은 그렇게 가족이 되지 못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관람하겠다고 결심한 관객이라면 같은 감독의 전작들에서 느꼈던 것과 유사한 감성을 기대할 것이다. 최근 개봉했던 <어느 가족>의 경우 이 기대감이 더 커지는 이유는 영화 제목에 이미 ‘가족’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 포스터 속 주인공들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이 영화가 가족에 대한 행복한 영화일 것이라고 기대한다. 주인공들이 해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또 다른 포스터를 보면 <어느 가족>이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유사한 영화일 것이란 선입견까지도 생긴다. <태풍이 지나가고>가 <걸어도 걸어도>의 속편이듯, <어느 가족>은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속편이리라. 그러나 이 선입견은 완전히 틀렸다.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들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였다. 비교하고 싶은 영화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 영화가 끝난 후의 아픔은 더 커진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눈물을 흘렸다면 애틋한 마음과 동정에서 흘리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 때문에 흘리게 되는 고통스런 눈물일 것이다.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중... <어느 가족>의 해변 포스터와 닮았다.

‘가족’이란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테마이다. 관객들이 고레에다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자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늘 같은 주제로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은 그의 영화들에 대해 영화 평론가 정성일씨는 한 때 이렇게 평한 일이 있다.


“그의 영화는 점점 나빠지고 있다.”


만일 <어느 가족>의 클라이맥스가 포스터에서 본 해변 장면이었다면 이 영화는 – 비평가의 시각으로 – 점점 나빠지고 있는 영화들 중 한 편에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 속 ‘가족’들은 해변에서 돌아온 후 이전의 고레에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속 가족들은 사회의 통념 속 가족들과는 달리 한번 해체(혹은 이별)를 겪은 후 다시 재결합이 된 사람들이 많다. ‘해체 후 재결합’이란 공식은 <어느 가족>의 구성원들에도 적용 가능하다. 하츠에(키키 키린)를 중심으로 뭉쳐진 이 들 중 누구도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없고 결혼이라는 계약을 맺은 사람이 없다. 이들은 생존을 목적으로 모인 경제 공동체일 뿐이다. 그런 이들을 가족의 모습으로 결합시켜 준 사람은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유리란 어린 소녀이다. 


유리와 사랑에 빠지게 된 이들은 자신과 유리와의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하고, 생면부지의 유리와 가장 쉽게 연결이 되는 방법은 유리의 가족이 되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이들 각자는 모두 유리의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언니라는 역할극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어린 쇼타만이 유리의 오빠가 되기를 거부하지만 쇼타를 유리의 오빠로 만들어주는 것은 본인이 아닌 오사무(릴리 프랭키), 의 의지다. 현실 세계의 오빠들이 한번도 원한적 없었던 동생을 부모의 강요 때문에 인정하게 되는 일이 쇼타에게도 발생한다. 이렇게 그들은 유리를 중심으로 가족이라는 역할극을 하면서 행복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가족이 된다…고 믿었다.


한번의 해체를 겪은 후 재결합을 통해 행복을 찾은 것 같던 이 가족들은 다시 붕괴되기 시작한다. 고레에다 감독 본인이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가족에 대한 공식에 또 한번의 ‘해체’를 추가시킨 것이다. 게다가 이번엔 다시 재결합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어떤 단서조차도 남겨두지 않는다. 


하츠에가 죽자 오사무와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망자의 효용이 오직 돈 뿐이었다는 본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연금을 수령하기 위해 하츠에의 시체를 집안에 묻은 후 그 위에서 생활하는데, 집 안에 무덤을 만들겠다는 공포 영화 적인 발상을 이들이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이유는 돈이다. 가족 중 돈 문제에서 자유로운 줄 알았던 아키(마츠오카 마유)조차 하츠에가 자신을 돌봐준 이유가 돈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은 가족에서 다시 경제 공동체로 퇴행하고, 사랑한다고 믿었던 쇼타가 다치자마자 병원비에 대한 걱정 때문에 도주를 감행한다. 최초 결집의 목적이 돈이었던 이들은 돈 문제가 발생하자 가족이라는 상징을 버린다. 그리고 이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최초의 목적이 위협당하는 순간 이들은 더 이상 연대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잔인하다. 영화 포스터에서 봤던 느낌의 행복한 영화가 아니다. 가족이 되기 위해선 혈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노부요의 주장은 고레에다 감독이 그의 전작들을 통해 늘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부요는 “혈연이 없었다면 애초에 가족이 없을 것”이라는 냉혹한 반론을 듣는다. 그렇게 아버지가 되고, 그렇게 어머니가 되기 위해선 사랑이나 헌신만큼이나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족이라는 상징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고레에다 감독 본인도 타인들이 결합하여 가족이라는 상징을 만들어 내고 연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그 무언가를 끝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항복 선언이다.


아이들이 당신을 뭐라고 불렸냐는 질문에 노부요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어머니라고 불리우지 못한 노부요의 눈물은 사회적으로 공유되어 있는 가족이라는 관념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아무리 엄마이고 싶어도 엄마라고 불리지 못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다. 



가족들이 서로 사랑할 땐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을 때이다. 서로 사랑하지 않을 때에도 가족들이 헤어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족이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어느 문화권에나 존재하는 가족이란 상징성은 가족들이 함부로 헤어지지 못하게 만드는 안전장치와도 같다. 어쩌면 인류가 가족을 만들어 낸 이유도 가족끼리는 서로 사랑할 때보다 미워할 때가 더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워할 때 마다 헤어질 수 없기에 가가족을 만들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유리는 노부요가 가르쳐준 노래를 부르며 그 가족들을 기다린다. 관객들이 이 장면을 보고 가슴이 아픈 이유는 ‘어느 가족’들은 해체되었기에 영원히 유리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늘 진짜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기적을 영화로 만들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은 그렇게 가족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원일 소속 직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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