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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일 Apr 07. 2019

강변호텔

그녀들은 망자였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탐정이라도 영화를 관람하면서 영화의 제작 시기와 기간까지 알아낼 수는 없다. 영화의 제작 기간이란 관객들이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정보일 뿐 영화를 보면서 추리해 낼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다. 몇 초에 불과한 영화 <사이코> 샤워씬의 촬영기간이 무려 1주일이나 걸렸다는 것은 감독의 주장일 뿐이다. 게다가 영화의 제작기간은 흥미로운 정보도 아니다. 



영화 <강변 호텔>은 2018년 1월부터 2월까지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리고 시작한다. 여지껏 영화의 제작 시가와 기간을 영화의 크레딧에 포함시킨 영화는 없었다. 이 정보를 굳이 알리고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강변호텔>에서 가장 이상했던 것은 여자들이 잠을 자는 장면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잠이 죽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여주인공들이 망자(亡者)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서울 관객 1만명도 채우지 못한 영화를 이틀 연속 관람하였다. 누군가는 죽음에 관한 철학적인 영화였을 <강변호텔>은 나에겐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추리 영화였다.


 지금부터 여자들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근거를 이야기해 보려 한다.


아무도 그녀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주인공 영환(기주봉)은 상희(김민희)와 연주(송선미)와 두 번 마주친다. 한번은 눈 밭에서, 한번은 식당에서. 영환이 이미 죽을 각오를 했다는 단서는 영화의 여러 장면에서 목격할 수 있다. 이미 삶을 포기한 영환이었기에 망자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환 이외에 그 누구도 그녀들에게 말을 건 사람은 없다. 


눈 내린 강변

폭설 때문에 불과 몇 분만에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이는 것은 흔하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현상도 아니다. 게다가 영화 초반에 들은 제작 기간에 대한 정보 - 1월에서 2월 사이에 만든 영화 – 때문에 눈 내린 강변 장면을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양의 눈이 단 몇 분만에 사라지는 일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상희와 연주의 시선으로 바라본 강변에는 눈이 덮여 있었으나 경수(권해효)와 병수(유준상)도 카페의 창문 너머로 바라본 강변엔 눈이 내린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상희와 연주의 세상은 경수와 병수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곳이고 오직 죽음을 결심한 영환만이 이 두 세상을 오갈 수 있는 것이다. 영화의 포스터에도 등장한 눈 내린 강변은 오직 망자들만 볼 수 있는 사후 세계이다. 

가장 힘들게 찍은 장면이 살인 사건에 대한 손쉬운 단서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홍상수 감독은 영화 초반에 제작 시기를 알려줌으로써 관객들의 의심에서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눈 덮인 강변. 현실 세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불과 몇 분 사이 강변을 하얗게 덮었던 눈은 다 사라졌다.


그녀들의 과거

상희의 팔의 상처를 통해 관객들은 그녀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도록 상처 부위를 조절했지만 상희의 사인은 자살이다. 

연주의 사인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연주의 대사를 통해 자동차와 관련된 사고를 당했으며 지금 경수의 차는 예전 연주의 사고 차량이자 자신의 차였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연주가 키 없이도 경수의 차 문을 열 수 있던 이유는 원래 자신의 자동차였기 때문이다.


식당의 그녀들

그녀들이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추리하기 위해 식당 장면들은 매우 중요하다. 식당에서 주인공들이 밥을 먹을 때 여자 주인공들은 남자 주인공들과 인접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있다. 남자들은 술에 취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지만 그녀들은 남자들의 대화를 100% 이해하지 못한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건만 대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그녀들이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연주가 병수의 사인을 받아내려고 하는 이유는 아마도 병수를 사후 세계로 데려가기 위한 절차였을 것이다. 상희는 연주가 사인 받는 것을 막음으로써 병수를 죽음에서 구한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거짓말로 아들들을 따돌린 영환은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 그녀들을 만난다. 180도달라진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 식당은 첫 느낌보다는 큰 식당이었다. 그처럼 큰 식당에서 굳이 남자들의 옆자리를 선택해서 앉은 이유는 그들 중 누군가를 선택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의 근거이다.


영환이 아들들을 따돌린 이유

영환은 너무나 오랜만에 아들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보낼 궁리를 하기 시작한다.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남성 캐릭터들처럼 영환도 젊은 여자를 만날 마음에 들떠 아들들을 따돌릴 궁리를 하는 찌질한 노인네로 보인다. 하지만 영환은 아들들을 여자들과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영환은 처음부터 상희가 망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녀들에게서 아들들을 떼어놓기 위해 고분분투 했던 것이다. 끊임없이 아들들을 돌려보낼 궁리를 하고 아들들을 방에 올라오지 못하게 한 이유도 아들들을 죽음과 마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자주 오해되고 잘못 해석된다. 홍상수 감독에게 물어보기 전까지 내 생각이 맞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그럴듯한 오독을 하는 것도 재밌지 않은가? 홍상수 감독이 나타나 내 추리가 완전히 다 틀렸다고 하더라도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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