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일 Jun 16. 2019

엑스맨 다크피닉스

분노, 그리고 용서

* <엑스맨 다크피닉스>의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엑스맨 다크피닉스>가 관객들이나 비평가들로부터 모두 외면받고 있는 것 같다. <엑스맨> 시리즈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이동진 평론가조차 이번 <다크피닉스>에 혹평을 내린 것으로 보아 이번 <엑스맨 다크피닉스>은 망작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엑스맨 다크피닉스>가 나쁘지 않았다. <데이즈 오브 퓨쳐패스트>나 <로건>만큼 훌륭하진 않지만 못 봐줄 수준의 영화였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울버린> 외전들과 <아포칼립스>보다는 훌륭한 영화였다. 하지만 진 그레이의 외모와 영화의 주제는 많은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든 것 같다.



이번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엑스맨은 진 그레이이다. 진 그레이는 유일하게 캐릭터명이 없는 엑스맨이기도 하다. 로건은 울버린, 에릭은 매그니토, 스캇은 사이클롭, 레이븐은 미스틱이라는 캐릭터명을 가지고 있지만 진 그레이는 오로지 자신의 본명으로만 불려진다. <다크피닉스>라는 캐릭터는 영화 제목을 통해 알게 된 캐릭터 명일 뿐 영화 속에서도 진을 <다크피닉스>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비평가들이 기존의 엑스맨 영화들에 호의적인 이유 중 하나는 소수자들의 인권 문제를 유치하지 않은 방식으로 마주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엑스맨에는 인권 문제 대신 심리학적 은유가 많이 등장한다. 어린 시절에 해소되지 못한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된 성인의 위험한 심리에 대한 묘사는 훌륭하다. 



진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는다. 정황상 진의 초능력 때문에 일어난 사고였다고 추정되지만 영화는 그 사고가 누구 탓이었는지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진은 이 사고를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고, 이 자책은 트라우마가 되어 진의 무의식 한 편에 자리 잡는다.


찰스 자비에(혹은 프로페서 X)는 사람의 생각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엑스맨이다. 찰스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진의 의식이 트라우마를 기억해 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사건에 대한 기억을 잃은 진은 평범하고 모범적인 학생이 되었다. 진이 행복하기만을 바랬던 찰스의 의도는 선했지만 문제를 마주하지 못하고 피해 가려던 찰스의 방법은 심리적으로 나쁜 결과를 만들게 된다.



진이 성인이 되고 의식이 강해지면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된다. 오랫동안 사건에 대한 기억을 피해 다녔던 진의 정신은 건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진은 갑자기 기억난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없다. 결국 진의 트라우마는 분노가 되어 희생양을 찾아다니게 되고 사건과는 관련 없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진의 분노에 희생당한다. 


정신이 건강할수록 자신의 허물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반면 정신이 건강하지 않을수록 남 탓을 한다.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르면서 끊임없이 남들에게만 손가락질하다가 더 이상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을 땐 사회 탓을 하기도 한다. 남의 탓을 한다면 잠시 책임에서 자유로움을 느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트라우마가 해소되지는 않는다. 그 원인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심리란 매우 오묘하여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은 잠시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찰스가 아니었어도 어린 진은 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며 살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트라우마가 갑자기 기억난다면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도 된다. 이제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진정 그 트라우마를 해소하기 위해선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자신의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다치게 만들던 진은 에릭(혹은 매그니토)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When it comes, people get hurt.” - “it”이란 anger, 즉 분노를 의미하다. 


자신이 분노할 때마다 사람들이 다친다는 뜻이다. 이때 에릭은 진에게 인류가 오랜 시행착오를 통해 터득한 분노 해소법을 알려준다. 분노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바로 사과와 용서이다.


진은 이제 과거의 사건에 대해 누구의 잘못이었는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기억을 정면으로 마주하기엔 고통스럽다. 진이 폭주한 이유는 그 기억에서 벗어나고픈 마음 때문이다. 한번 폭주가 시작되면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체력이 소진될 때까지 폭주하고 체력이 소진되는 순간 후회하는 삶을 반복한다. 이런 분노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사과와 용서이다. 만일 용서할 수 없다면 폭주를 멈추지 못할 것이고 결국 범죄자가 되고 말 것이다. 


진은 결국 찰스의 진심 어린 사과 때문에 마음이 풀리게 되고 그녀 역시 용서를 구하게 된다.



사과와 용서는 우리의 본능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의 본능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한다. 최근까지도 인간 사회를 지배하던 제 1의 법칙은 복수였다. 살인범은 똑같은 방법으로 사형당해야 한다고 믿는다. 남의 귀한 자식을 다치게 한 사람은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의 자식도 다치게 만들어야 분노가 가라앉는다. 우리의 이성은 죄인의 자식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의 본능은 그 자식들도 죽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현대 문명국가들은 사적인 ‘복수’를 불법으로 규정하였고 국가가 개인 대신 복수를 해 주고 있다. 복수가 개인의 분노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본능은 복수에 끌리고 국가의 처벌은 늘 성에 차지 않는다. <엑스맨>이나 <어벤져스>가 인기 있는 이유는 이러한 우리의 본능 때문이기도 하다. 만일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결말이 타노스를 용서하는 것이었다면 영화는 망했을 것이다. 



<엑스맨 다크피닉스>는 사죄와 용서가 주제인 액션 영화이다. 어쩌면 이 영화가 현재 관객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의 본능과 충돌하는 '용서'라는 주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복잡하게 얽힌 캐릭터들의 감정이 용서하면서 너무 쉽게 해결되는 설정도 문제이고, 영화에서 만이라도 마음껏 폭력적 쾌감을 느껴보고 싶은 관객들의 본능도 만족되지 않는다. 용서라는 인간의 본능에 위배되는 대의명분이 관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이처럼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엑스맨>은 여전히 <어벤져스>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퍼히어로 영화이다. 영화의 내용보다 시각적인 묘사가 뛰어난 수퍼히어로들의 전투가 보고 싶다면 <엑스맨 다크피닉스>는 <어벤져스>의 대용품 역할은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끝까지 관람한다면 꽤 뭉클한 엔딩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선택했다면 영화를 보면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진 그레이의 외모를 비판하며 관람하지 말기를 당부하는 바이다. 영화의 맥락과 상관없이 영화 보는 경험을 망치고 말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