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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일 Jan 12. 2020

미드웨이

그의 영화는 용도가 다르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재난 영화의 장인이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된 재난을 영화의 장르로 만들어 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70년대에도 <타워링>, <포세이돈 어드벤처>, <허리케인>과 같은 재난 영화들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롤랜드 에머리히만큼 큰 규모의 재난을 실감나게 재현한 사람은 없었다. 


영화 <투모로우> (2004) 중 뉴욕 홍수 장면


하지만 그의 영화는 늘 비평가들로부터 비난받는다. 재난의 원인이 되는 과학적 근거는 거의 초등학생의 상상력 수준이고, 사람들은 재난을 피해 다니기 위해서 등장한다. 영화의 스토리는 오로지 때려 부수는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최소한의 개연성만 유지한다. 모든 재난과 갈등은 영화가 끝날 시간이 되면 장엄한 음악과 함께 해결된다. 영화를 보다가 헛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씨는 롤랜드 에머리히를 3류라고 평했고, 정성일씨는 한 기고문에서 <인디펜던스 데이>를 이렇게 평한 적 있다.


"<인디펜던스 데이>를 보고 난 다음에는 당신이 영화평론가가 아니더라도 이 영화를 사지절단하고 싶은 생각에 어쩔 줄 모르게 될 것이다." (<NEW+, 1996)


롤랜드 에머리히가 연출한 영화들의 로튼토마토 평점들. 이런 감독이 아직 현역으로 활동중이다.


그는 영화적인 체험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파괴할 것인가”에 집중한다. LA에 토네이도가 발생하고뉴욕엔 쓰나미가 일어난다. 고질라는 뉴욕의 MetLife 빌딩을 뚫고 나오고, 고질라의 새끼들에게 점령당한 메디슨스퀘어가든에는 전투기가 미사일을 발사한다. 그의 다른 영화들의 재난과 비교하자면 백악관이 폭발하는 장면은 그냥 귀엽다.


영화 <고질라>(1998) 중, 고질라가 뚫고 나온 뉴욕 메트라이프 빌딩


그는 선호하는 배우도 없는 감독이다. <인디펜던스 2>를 제외하면 그의 영화의 주연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나마도 <인디펜던스 2>에는 윌 스미스가 출연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윌 스미스는 시나리오를 읽어봤을 것이다.) 


어떤 재난을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간의 단 10%만 시나리오에 투자했어도 이렇게 엉망징창인 영화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런 복선도 없이 대통령이 전투기를 몰고 나가는 장면은 그의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엽기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그는 남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꿋꿋이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 영화를 만들고, 그런 그의 영화는 늘 거액의 투자를 받는다.  


비평가들의 한결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그의 영화에 늘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영화는 용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를 볼 때 관객들은 영화적 체험이 아닌 놀이동산의 롤러 코스터 라이드를 기대한다. 영화의 캐릭터들에 감정이입하여 그 스토리에 빠져드는 대신 눈 앞에 보여지는 비현실적인 장면을 보며 즐기는 것이다. 이 느낌은 좋은 영화를  관람할 때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그가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재미는 놀이 동산에서 느끼는 재미와 유사하고 롤랜드 에머리히 만큼 이 일을 잘 해내는 감독도 드물다. 



 영화 <2012>에는 모든 재난의 집대성인 "지구멸망"이라는 재난이 있었다. LA에 지진이 나고 땅이 갈라지며 갈라진 땅속으로 지하철이 추락한다. 캘리포니아 대륙이 마치 항공모함이 침몰하듯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재난이 펼쳐지는 앞에서 희생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건축물들만이 부서지고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장관이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니 관람객들도 윤리적으로 상처받지 않는다. 지구가 멸망하고 인류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위험해 보이지만 안전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웃으면서 즐길 수 있는 놀이동산의 놀러코스터를 탈 때의 느낌과 정확히 같다.    



그의 최신작 <미드웨이>가 개봉했다. 언제나 그렇듯 눈에 보여지는 것을 보고 즐기는 데에는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보다 더 좋은 영화는 없다. 진주만 폭격 장면에서 시작하여 미드웨이 해전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100%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다. 전쟁 영화라기 보다는 재난 영화이고 그가 보여주려는 재난은 ‘전투기’이다. 등장하는 배우들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기대한다면 <미드웨이>를 봐서는 안된다. 

막장 드라마를 볼 때 화가 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 관람해서는 안되는 영화이다.

하지만 오늘 놀이동산에 가고싶은데 날씨가 너무 추워 대신 할 일을 찾는다면 <미드웨이>를 관람할 것을 추천하겠다.




평론가들과 동일한 잣대로 롤랜드 에머리히 영화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이번 영화가 그의 지난번 영화와 비슷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사람의 영화를 굳이 찾아보고 비난하는 행위는 인터넷 악플러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전범인 일본인이 너무 낭만적으로 묘사된 것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2차 대전 영화에 등장하는 독일인들을 처단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미국인들이 유독 일본인들을 이처럼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아마도 원자폭탄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뇌피셜이다.) 


낭만적인 일본인 전투기 조종사들. 영화 <태양의 제국>(1989)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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