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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일 Oct 31. 2021

콜럼버스

모더니즘 건축의 도시, 콜럼버스로의 여행 충동

* 3년 전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사이트가 사라져서 제 개인 공간에 다시 업로드 합니다.



2002년도 기억한다. 필자는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에 등장하는 로즈맨 다리를 실제로 보기 위해 미국 아이오와(Iowa)주 매디슨 카운티를 찾아간 일이 있다. 성공한 영화에 등장한 장소인 만큼 이곳이 관광지가 되어있을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당시만 해도 미국인들은 이미 이 영화를 잊은 지 오래였고, 다리도 잊혀진 시간만큼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자가용이 없는 관광객이 다리까지 가기 위해서는 다리에서 60km정도 떨어진 드모인(Des Moines)이란 도시까지 가서 택시를 타야만 했는데 그나마도 왕복 요금을 지불해야만 태워줬다. 어렵게 택시를 타고 다리에 도착했지만 내리자마자 왜 사람들이 그곳을 찾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다리 주변은 영화만큼 아름답지도 않았고, 조명없이 캄캄한 다리 내부는 낙서투성이에 오물 냄새로 가득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다리의 사진을 찍지만 않았어도 내 평생 이런 곳에 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날 거금의 왕복 택시비를 지불하면서까지 그곳을 찾아갔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 다리를 배경으로 남긴 사진 한 장이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샀기 때문이다.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다녀온 후 자랑하는 것 아니던가?


2002년 필자


2014년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아이슬랜드로 향했다. 아이슬랜드가 갑작스레 사람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된 이유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 때문이다. 아이슬랜드는 영화 속에서 월터(벤 스틸러)가 여행하던 수많은 장소들 중 인상적인 곳 이었다. 그곳에서 화산이 폭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월터가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내려오던 세이디스피외르뒤르(Seyðisfjörður)의 긴 언덕도로 때문이다. 영화를 좋아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곳에서 월터처럼 스케이트 보드를 타 보고 싶을 것이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중


2015년에 개봉했던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는 서울이 등장한다. 세빛둥둥섬에 잠복해있던 울트론과 싸우기 위해 캡틴 아메리카와 블랙 위도우가 상암동과 문래동 일대를 질주한다. 영화 개봉 전 한국관광공사는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주는 경제효과가 2조원을 넘을 것이라 발표했고 국내 언론들은 이를 그대로 보도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 영화 때문에 우리나라에 2조원이라는 경제 효과가 있었는지는 궁금하다. 영화 관람료와 캐랙터 상품 판매 수익은 영화사의 몫이므로 결국 우리나라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관광 수익 뿐 일텐데, 과연 영화개봉 이후 1억원씩 소비하는 관광객 2만명이 서울을 방문했을까? <어벤져스>를 보고나서 블랙위도우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월드컵 북로를 질주해야겠거나 세빛둥둥섬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외국인이 과연 있기나 했을까?


영화 <어벤져스 2> 중, 세빛 둥둥섬을 바라보고 있는 캡틴 아메리카


<어벤져스>는 이 시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일지는 몰라도 여행 충동을 일으키는 영화는아니다. 여행 충동을 일으키는 영화들은 따로 있다. <로마의 휴일>이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처럼 이방인의 시선으로 낯선 장소의 일상을 지켜보는 영화들이다. 최근에 대단히 심한 여행 충동을 일으키는 영화가 한편 개봉했었으니 바로 <콜럼버스>란 영화다. 한국계 영화감독 코코나다와 한국계 헐리웃 배우 존 조가 주연을 영화이다.  



도시 이름이기도 한 영화 <콜럼버스>는 미국 인디애나(Indiana)주의 콜럼버스란 도시가 배경이다. 이곳은 미국 모더니즘 건축의 메카와도 같은 곳이지만 미국인들조차 콜럼버스란 도시를 잘 모른다. 실제로 미국인들이 알고있는 콜럼버스는 오하이오(Ohio)주의 수도인 콜럼버스이지 영화에 나온 곳이 아니다. 


영화 <콜럼버스>는 두 주인공들이 이 도시의 건축물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독특한 영화이다. 이 영화엔 두 남녀주인공의 로맨스도 없고 아슬아슬한 성적 긴장감도 없고 유머는 더더욱 없다. 카메라는 늘 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고 간혹 이동을 하더라도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몇몇 관객들에겐 지루한 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남녀 주인공이 건축물에 대한 자신들의 감상을 토대로 자신들의 과거에 받았던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은 영화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위로받고 싶기에 이야기를 시작하고 그 이야기의 시작점은 언제나 건축물이다. 모더니즘 건축물이 지천에 널려있는 소도시인 콜럼버스는 이 저예산 독립 영화 한 편으로 인하여 영화를 본 관객들이 가보고 싶은 여행지 중 하나가 되었다.




케이시(헬리리 루 디차드슨)는 진(존 조)을 자신이 두 번째로 좋아한다는 건물 앞으로 데리고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이 건물을 왜 좋아하냐는 진의 물음에 케이시는 자신의 건축에 대한 지식을 뽐내며 이렇게 말한다.


“모더니즘 건축가 에로 사리넨이 디자인한 이 건물은 미국 최초의 현대적인 은행건물 중 하나이다. 통유리를 사용한 것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디자인이다. 1954년 이 건물이 있기 전 은행이란 곳은 쇠창살 뒤에 직원들이 앉아있던 요새 같은 곳이었다.”


그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진은 케이시에게 관광 가이드처럼 이야기하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고 한다. 이 건물의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 건물을 좋아하도록 만들었는가? 이 건물로부터 받은 당신의 감정은 무엇이었나? 질문을 받은 케이시는 비로소 자신이 왜 이 건물을 좋아하는지 감정을 담아내어 얘기한다. 안타깝게도 관객들은 케이시의 입 모양만 볼 수 있을 뿐 그 이유를 들을 수는 없다. 


케이시가 그 건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좋다’라는 느낌은 추상적이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왜 좋고 왜 싫은지 남들에게 설명을 하려면 어려움을 느낀다. “좋다” “싫다”에는 개인적인 취향이 개입되고 취향은 개인들의 경험이 쌓인 결과이다. 누군가에겐 최고의 영화인 <어벤져스>가 누군가에겐 최악의 영화일 수 있는 이유도 결국은 개인들의 과거 경험 때문이다. 케이시가 콜럼버스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진이 아버지를 미워하는 이유도 자신들이 겪었던 경험 때문이고, 그 결과 같은 건물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해석을 다르게 만든다. 



모네나 르누아르의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19세기 인상주의 미술이 전문가가 될 필요가 없듯이 아름다운 건물을 보고 좋아하기 위해 건축가 될 필요도 없다. 영화 <콜럼버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보듯 자신이 좋아하는 건물을 바라보며, 뜻하지 않았던 위로를 찾아온다면 그냥 그 상태를 즐기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건축물을 좋아하는데 옳고 그름이란 있을 수 없다. 관객들이 케이시의 설명을 들을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콜럼버스>는 나로 하여금 생전 처음으로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만든 영화이고, 또 콜럼버스란 도시에 대해 여행 충동을 심한 여행충동을 일으킨 영화이다.  기회가 된다면 아이슬랜드보다 콜럼버스에 더 먼저 가봐야겠다. 왜냐하면 콜럼버스에 가기 위해 굳이 건축 공부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이슬랜드는… 스케이드 보드 타는 법을 먼저 배우고 나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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