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이의 이야기를 믿기로 햇다
* 라이프 오브 파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가 재개봉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재미있고 훌륭한 영화를 넘어 영화사에 기록될 걸작 중 한편이다. 3D 기술을 이용한 영화 중에는 단연 최고다. (그 이유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의 국내 출판 제목은 <파이 이야기>이다. 이 소설 제목의 ‘이야기’는 ‘토이 스토리’처럼 내러티브의 서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왜 파이라는 이름의 소년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이유가 담겨있다. 이는 인간들이 지성을 지니게 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냈던 이유와 동일하다.
인간은 동물처럼 본능에 따라 살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본능을 억누를 수 있는 지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성을 가지기 위해선 먼저 지식이 필요한데, 문자가 없던 시절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복잡한 지식을 전달할 수 있었던 가장 쉬운 방법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처럼 문자로 기록되기 전부터 구전되던 영웅담을 통해 공동체가 공유할 수 있는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이솝우화’를 통해 윤리적인 규범과 생활의 지혜를 배운다. 이야기로 만들면 이해하기도 쉬워지고 복기하기도 쉬워진다. 이야기의 효용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문자가 발명된 이후에도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고, ‘소설’이나 ‘동화’와 같은 형태로 진화되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파이의 두번째 이야기는 파이가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구명보트에서 실제 일어났었던 사건이다. 생사를 넘나들며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동물적인 본능까지 경험한 파이는 아직 10대 소년에 불과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배 위에서의 일어났던 사건을 잊을 것인지, 아니면 영원히 기억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고, 파이는 기억하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실제 있었던 사실 그대로 기억하는 것은 어린 파이에게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 이었다. 그래서 파이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는 200일간의 생존기를 자신만의 우화로 만들었고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중요한 점은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경우 다소 덜 고통스럽고 낭만적인 모습으로 떠올릴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재개봉 한 이 영화를 다시 한번 관람하고 싶어 극장을 찾았다. 그리고 인간의 기억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파이가 실제로 들려준 두번째 이야기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이야기가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여지껏 파이가 시체들의 인육을 먹으며 생존했다고 믿고 있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듯하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파이가 누구의 인육을 먼저 먹었는지 논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파이의 진술에 따르면 파이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인육을 먹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다리를 다친 일본인 선원의 시체는 낚시를 하기 위한 미끼로 사용되었고, 엄마의 시체는 바다에 버려졌다고 말했다. 자신이 죽였다고 실토한 프랑스 요리사의 시체조차도 먹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파이가 인육을 먹었다는 추론이다. 인간은 먹어야만 살수 있는데, 200일동안 구명보트 위에서 표류한 파이는 살아남았고, 배 위에 시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파이가 그 시체를 먹었을 것이라는 것은 타당한 추론이다. 그러나 이 추론이 사실이라면 파이의 두번째 이야기도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카니발이 벌어진 세번째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배 위에 있었을 수도 있고,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파이가 말하기 싫었을 정도로 그 잔혹함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믿어야 할 것인가?
나는 영화에 나온 대로만 믿기로 했다. 나는 파이가 기독교와 이슬람을 모두 믿듯이 파이의 두 개의 이야기를 모두 믿는다. 단, 파이가 말한 것 이상의 확대 해석은 하지 않기로 했다. 파이가 말하지 않은 식인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파이가 인육을 먹었다는 주장은 파이의 두번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추론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파이 뿐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파이의 진술이다. 난 감독이나 작가가 사실을 말해 줄 때까지 파이의 진술만을 믿으며 오래도록 이 멋진 영화를 즐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