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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일 Feb 23. 2023

툴리

나쁜 엄마는 없다...

* 5년 전 기고했던 글 입니다. 사이트가 사라져서 제 개인 공간에 기고합니다.


엄마가 되는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엄마가 된 사람들 뿐이다. 실제로 엄마가 되어보지 않고선 출산과 육아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대 알 수 없다. 남성이나 미혼 여성들이 엄마의 고충을 이해한다는 말은 거짓이거나 무지에서 비롯된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출산과 육아는 즐거운 경험이어야 한다는 사회적인 강요는 엄마들로 하여금 육아의 어려움을 함부로 표현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 <툴리>의 주인공 마를로(샤를리스 테론)는 이미 두 아이의 엄마이고 셋째의 출산을 앞두고 있다. 마를로의 친오빠인 크레이그는 그녀에게 밤에만 아이를 돌봐주는 나이트 내니(Night Nanny)를 구해 주겠다고 말한다. 마를로는 낯선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셋째의 출산 이후 나날이 망가져가는 자신의 체력과 감정을 수습하기 위해 나이트 내니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다. 드디어 마를로의 집을 방문한 나이트 내니인 툴리(맥켄지 데이비스). 툴리는 마를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은 돌보러 왔어요.”


나는 당신을 돌보러 왔어요.


툴리의 첫인상은 마를로가 상상했던 내니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젊고 세련된 툴리에게선 엄마의 경험을 발견할 수가 없다. 하지만 툴리는 집에 도착한 날부터 마를로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를 돌보고 마를로가 미루고 있었던 집안 일을 해 준다. 가족들을 위해 만들고 싶었던 음식의 재료와 청소 도구의 위치까지도 정확히 알고 있다. 툴리 덕택에 상처 투성이었던 마를로의 체력과 감정은 점점 치유되어 가고, 툴리는 마를로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되어간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이다. 끊임없이 울어대는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야 줘야 할 때 모든 엄마들은 육아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그들이 나쁜 엄마이기 때문이 아니다. 엄마들은 새벽 2시에는 잠을 잘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을 꿈꿀 뿐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야간 보모에게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엄마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경제적인 이유 뿐 아니라 남에게 육아를 맡기는 엄마들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따갑다. 밤마다 방문하여 아이를 돌봐주고 집안일을 해 주는 툴리는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의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라는 책을 통하여 농업 혁명은 인류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주장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인류는 수렵채집을 하던 시기보다 더 많은 시간의 노동을 하게 되었고 더 많은 전염병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가 상대적으로 더 편안한 수렵채집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이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착 생활을 하면서 엄마들은 이웃으로부터 육아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그 부모들이지만 지구상 그 어느 누구도 100% 부모의 힘만으로는 키울 수는 없다. 문명이 있었던 곳에는 언제나 아이 돌보미가 있었고, 우리 이웃의 도움이 없었다면 인류는 결코 지금처럼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를 남에게 맡길 땐 당당해도 괜찮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부모 이외의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았던 사람들이고, 그 덕택에 지금까지 잘 자라오지 않았던가? 


만일 잠깐의 예상치 못했던 자유시간이 생긴다면 나를 위해 쓰도록 해 보자.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아이들을 위해 쓰지 않았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잠깐의 휴식으로 정신이 조금 더 여유로워 진다면 이는 아이와 가족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지금 나를 이해해주는 가장 친한 친구가 내 옆에 있다면 잠시 아이에 대해 잊어버려도 괜찮다. 잠깐의 수다로 당신의 마음이 진정된다면 아이들도 좋아할 것이다. 아이도 당신과 함께 있으며 화를 내는 것보다는 잠시 떨어져 있더라도 화내지 않는 당신을 더 좋아한다. 만일 육아 때문에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다면 만나서 얘기를 들어주자. 내 친구가 나를 위해 툴리가 되어준 것 처럼 나도 친구들을 위해 툴리가 되어줄 수 있다. 

혹시 나의 힘든 육아의 경험에 대해 귀를 막고 있는 남편이 있다면 이번 주말 <툴리>를 함께 보기를 권장한다. <툴리>는 육아에 도움을 주지 않는 남편들도 폭력을 사용하는 범죄자들만큼이나 나쁘게 보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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