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순례길에서 벌어진 좌충우돌 스토리.

by 널리

#20


해안가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사이사이로 지나가다 보니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풍경과 발의 물집 때문에 느껴지는 쓰라림에 힘들다는 생각 밖에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도 그럴 게 중간중간 있는 호텔들은 알베르게 가격의 작게는 다섯 배, 크게는 10배 가까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들어갔다가는 다른 날 굶어야 할 판이다. 정신을 집중하고 조금만 더 가보자, 조금만 더 가보자,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을 외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Bom Caminha라는 알베르게를 가려고 하는데 점심 식사를 거하게 하고 나왔더니 꽤나 늦어버린 시간이다. 4시 반, 보통 순례자들은 하루 6-8시간 정도를 걷고 알베르게에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1-2시 사이에 도착할 수 있도록 시간을 조정한다. 그리고 나는 시간 조정에 실패했다. 도착하니 문 앞엔 'Sorry, no available beds'라고 적혀있는 문 판이 걸려있다. 이런... 혹시나 해서 들어가서 리셉셔니스트에게 정말 방이 없냐 묻고 없다길래 문 밖으로 나와서 인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발은 발대로 아프고 마땅한 숙소가 주위엔 없는 것 같다. 피곤과 쓰라림에 몽롱하던 정신에 얼음물을 한 사발 끼얹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면 여기 Caminha는 내륙 쪽으로 들어가는 길(원래 계획했던 루트)과 어제 사샤가 얘기했던 보트를 타고 스페인으로 건너가는 길, 두 갈레로 나뉜다. '그럼 그냥 오늘 넘어가버릴까?' 싶은 생각에 들자마자 '카미노 닌자' 앱으로 스페인으로 넘어간 후 숙소가 있는지 검색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다. 다시 Bom Caminha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도움을 청할 요량으로. 보트를 타고 스페인으로 갈 수 있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한다. 그리고 지도를 보여주면 서 간단히 설명을 해준다. 가장 가까운 숙소가 어디냐고 묻고 Albergue O Peirao라는 곳을 가리킨다.

나: (손으로 짚으며) I would like to go to this Albergue.

그: Okay, that's good.

나: Could you tell me how to get there?

그: I will contact Lina and let's see.

나: Oh, thanks a lot! You saved my life.


그리곤 그가 Lina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묻고 답한다. 전화를 끊고, '지금 시간엔 보트 택시 운행이 없는데 Lina의 남편이 올 수 있다고 하니 ㅇㅇㅇ로 가서 그를 만나 타고 가면 된다'라고 얘길 해줬다. 다행히 Lina의 남편을 만나야 하는 장소는 원래의 선착장보다 훨씬 가까운 5분 거리에 있었다. 혹시 몰라 남편이 어떻게 생겼는지 묻자 그는 '응, 엄청 강한 남자야! 하지만 마음은 한없이 따뜻하다고!'라며 답해줬다. 5분 뒤면 금방이다. 고맙단 인사를 전하고 아픈 발은 끌다시피 하며 약속된 장소에 갔다. 약속된 장소 바로 전 횡단보도를 건너려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보트 한대에 탄 남자분이 손짓을 한다. 딱 때에 맞춰 왔나 보다. 횡단보도를 건넌 후 바다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 보트에 탔다. 지금 이 상황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마냥 즐거운 나는 구명보트를 챙겨 입고 6 €를 지불하고 질문을 막 던진다, 손짓발짓 해가며. 왼쪽은 포르투갈, 오른쪽은 스페인이다.


잠시 뒤 백사장(사진 상 보이진 않지만 휴양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에 나를 내려다 준다, 백사장이 끝나는 곳에서 길을 찾아가면 된다고(뉘앙스로 그렇게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즈음에선 영어가 전혀 안 된다). 호기롭게 내려서는 알겠다고 했다(구글맵으로 찾아가면 될 테니까).


이미 두 발은 의식이 없다. 퉁퉁 부어서 슬리퍼에 꽉 끼인 채 숨도 못 쉬고 물집만 계속 잡힌다.


그리고 그는 갔습니다. 아아... 그는 영영 가버렸습니다.


그렇게 그를 떠나보내고 알베르게를 구글맵에 넣었더니... 어라, 4 km 떨어져 있다고??????? 하아... 그렇네... 배를 어디 세워주는 줄 계산치 아니했네. 당연히 가까운 곳에 알베르게가 있을 줄 알았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발을 끌고 길을 나섰다. 이제 포르투갈이 아닌 스페인이다. 원래 계획으로는 3일 후쯤 도착할 스페인이라 공부해 놓은 것도 없다... 그럼에도 어쩌지 싶은 마음보단 빨리 알베르게에 가서 씻고 침대에 누워 발을 쉬게 하고 싶단 생각만 가득하다.

가는 길이 여타 순례길처럼 표시도 하나 없고 인도가 나있지 않은 찻길이다. 벌써 시간은 여섯 시가 훌쩍 지나버렸다. 해 지는 시간은 7:22분이라는데... 일단 걸었다. 그것 밖에는 다른 방도는 없었으니까.

걷고 걷고 걷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가 라이트를 켜고 오는 걸 보자 약간의 두려움이 일었다. 인도도 없는 이런 곳에서(아주 작은 갓길만 있었다) 차가 날 못 보면 어쩌나 싶은... 아직 2.9 km가 남았고 시간은 여섯 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대략 한 시간에 4-5 km는 거뜬할 테지만 지금은 30분에 1 km 걷기도 벅차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히치 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모 아니면 도다. 몇 분을 기다리고 서있다 차가 보이자 손을 들었다. 나를 보자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더니 차를 세운다. 다행히(?)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성분이다. 흔쾌히 타라고 한다. 마음이 급해 가방을 멘 채로 앞 좌석에 몸을 구겨 넣으려고 했더니 안된다며 짐은 뒤에 두고 앞에는 몸만 타란다(뉘앙스로 ㅎㅎㅎㅎㅎ). 그라시아쓰!!! 만 연발한다. 내가 아는 스페인어는 '올라(안녕)', '꼬모 에스타스(하우 아 유?)', '무이 비엥(매우 좋아요)', 그리고 '그라시아쓰(땡쓰)'가 다다. 아무 데나 더 앞에만 가서 세워달라고 하지만 영어가 전혀 통하질 않는다. 구글맵을 켜서 알베르게 쪽을 보여주니, '씨(Sí), 씨(Sí)'라며 알겠다고 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바디 랭귀지로 침착하라며 손바닥을 펴고 아래로 향한 채로 위에서 아래로 왔다 갔다 한다. 혼자서 히치 하이킹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나도 내가 어리둥절하다. 이 분 스페인어를 막 써가며 내게 얘길 한다. 대략 눈치를 보아서는, 백미러에 걸려있던 십자가를 보여주며, '자긴 신자인데 순례길 걸을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대단하다. 난 할 생각이 없어, 하지만 넌 꼭 산티아고까지 가길 바라'란다.


그렇게 그녀는 스페인어로 나는 영어로 떠들면서 나름의 대화(?)를 하고 몇 분 지나니 도착지에 도착했다. 사실 그녀는 항구(Porto) 방향으로 갔어야 했는데 나를 시 중심지에 내려다 준 거였다. 고맙다는 인살 하며 친구가 보내준 한국 전통 문양 엽서를 주려고 찾았는데 문을 안 닫고 서있자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그냥 가겠단 그녀를 고맙다고 하며 보냈다. 세상엔 착한 사람들이 참 많구나란 걸 다시금 체험하며 바로 앞에 있는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순례길에서의 더 생생한 이야기는 아래의 유튜브로!

https://youtube.com/@humanveings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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