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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궐리버 Feb 02.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한 달 지켜볼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영 별로면 이번 프로젝트에서 깔 거야."


내겐 선전포고의 말이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지 딱 한 달째 되던 날, 오늘 회식자리에서 들은 말이었다.


나는 이번 세 달짜리 프로젝트에 투입된 지 겨우 이틀이 되었고, 이 프로젝트에서 요하는 기술은 내가 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기술이었다. 수습도 끝나지 않은, 아니 수습을 밟은 지 겨우 한 달이 된 상태에서 나는 거의 노베이스인 기술을 한 달 안에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만 했다. 그래야 그의 눈에 좋게 보일 것이고, 고객사의 눈에 좋게 보일 것이다. 걸음마도 못 뗀, 그냥 겨우 뒤집기에 성공해 기어다는 내가 넘어야 하는 것은 요람의 난간이 아니라 마치 태산인 것만 같았다.


변명의 여지는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외려 내게 너무 큰 걸 바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래도 나는 까라면 까야하는 입장이고, 까이면 까일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망연자실을 했을까. 이럴 때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이 기회에 눈 밖에 나서 프로젝트에서 잘리고, 나는 이 길이 내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하여 퇴사를 결심할 생각까지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쏟은 시간만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뒤처지는 나를 보았기에 이 기회에 내 암울하고 답이 없는 이 바닥 인생을 정리하기로 했다.


'겨우 한 달 일하고 적성이 맞는지 어떻게 알아?'라는 생각을 혹자는 떠올릴 수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3주 차가 됐을 때 나는 내게 주어진 과제를 보기만 해도 공황 증세가 오듯 가슴이 말 그대로 답답해지고,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고역이었다. 그날 퇴근시간이 됐을 때,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면담을 신청하고 더 이상 이 일을 진행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목 끝까지 게워냈다가 결국 삼키고 말았다. 이미 적성에 맞지 않는 걸 알고서,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며 일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게 나에겐 너무 부담이었고, 실력도 없는데 돈은 받아가며 계속 내 스스로를 발전시킬 여력도 자신도 없었다. 오죽하면 저번 주말에 취업 후 그만둔 카페에 잠깐 일손 도우러 갔다가 오히려 살아있음을 느낄 정도였다.


나는 회식 중간에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분과 잠시 밖을 나와 바람을 쐬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낯선 회사에서 그나마 적응할 수 있게 잘 도와준 감사한 선배였다. 마침 같은 일을 맡게 되어 나는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일 잘못되면 제가 지시했다고 팔아도 좋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좀 전에 들은 말, 너무 담아두지 마세요. 일 하실 때마다 너무 힘들어하시는 게 보여서 걱정이었는데, 누구나 처음은 힘든 게 당연하니까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자책은 하지 마세요. 스스로 채찍질을 하면 오히려 더 오래 버티기 힘들어요. '할 수 있다'는 말조차 부담스러우실까 조심스럽지만, 그냥 내 부족함을 느끼고 '아 내가 잘 못하는구나' 하고 거기서 끝내버리세요. 더 이상 깊게 빠질 필요 없어요. 그냥 붙잡고 계속 본다고 실력이 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붙잡고 보세요. 결국엔 조금씩이라도 해내고 있을 거예요."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허심탄회하게 내게 조곤조곤 이어나간 말이었다. 내가 식당 안에서 들었던 선전포고는 사실 내가 그만큼 더 열심히 해야 된다는 우회적인 표현이었지만, 총알만큼 직설적인 말이었다. 총알이 머리에 박혀도 흔들리지 않을 나의 마음은 묘하게도 선배의 말에 더 큰 울림을 느꼈다. 나보다 더 내게 진심이었다. 일에 치여 며칠 못한 문자의 답에 내가 이전부터 힘들다고 내색을 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 걱정돼 친구에게 급하게 전화까지 걸려온 오늘이었다. 넝마가 되어 너덜거린 내 마음을 왜 내 스스로도 못 돌아봤을까. 나는 자르겠단 말보다 왜 자책하지 말라는 말이 내 가슴을 후벼 팠을까. 어떻게 혼자 배변도 못 가리는 어린 나를 위해 겨우 한 달 본 선배가 나 스스로도 못 돌본 마음을 보살펴줄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내 차로 돌아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사실 아직도 스스로 이 길이 맞는지 긴가민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끝날지 모를 여기서 일을 하는 동안은 그다지 쓸쓸하진 않을 것만 같다. 일을 알아가는 것보다도 나를 사랑하는 법을 알아가는 값진 시간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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