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비교해야 할 것은 “어제의 나”
나는 부자다. 당신이 내 책을 샀기 때문이다. 빌려서 봤다고? 괜찮다. 당신이 내 글을 읽어 주니까 그걸로 행복하니 부자다. 내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는 사람이 훨씬 많겠지만 그들도 나도 서로 모르니까 그것까지 생각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언급조차 할 수 없는 가난도 있다. 기초 수급자, 차상위 계층의 사람들의 가난은 감히 내가 가난하다고 뭐라 할 수 없다. 그들의 가난은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선천적이나 후천적인 질병과 사고, 정신적 질환 등으로 인한 사회 부적응적인 측면은 사회가 안고 감싸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가난을 의미하는 빈곤과 상대적 가난은 다르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가난의 대부분은 상대적 가난에서 오는 결핍이다. 자신이 어느 정도 빈곤한 것도 사실이다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면 조심하자.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배부른 소리 한다고 푸념하지 말자.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가난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부자가 되기로 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는 부자다. 형편은 아직 좀 빈곤하지만 나의 빈곤도 상대적이다. 작년까지의 나는 거의 6년간 월세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빈곤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당시의 월세를 4배가 넘는 신축 아파트 대출 잔금을 매달 감당해야 하는데 때마침 하고 있는 일이 내리막길을 향하고 있다. 2020년 여름 남들 다 힘들어지기 시작할 때 난 괜찮았고 2022년 남들 좀 살만해질 때 힘들어졌다. 보릿고개가 찾아온 셈이다. 그러나 이 빈곤을 이겨내면 이제는 정말 생활비 걱정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나의 빈곤은 부자의 길목에서 조여오는 가난 파수꾼의 압박이다.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어느 것 하나라도 최소 조건이 달성되지 않았다면 부자가 아니라 가난하다고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가난은 상대적이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가난은 결핍이다. 그러면 결핍이라고 말하면 되지 왜 가난을 끌어들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맞을 때도 맞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나는 내가 이야기하는 가난은 결핍과 궁핍이 결합된 상태이고 경우에 따라 그 비중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돈이 든다. 숨 쉬는 것조차 돈이 든다. 만일 그대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누군가 대신 돈을 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다. 부모님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 돈이 들지 않는 걸로 느껴진다. 부모님이 내 생존에 필요한 지출을 대신 감당해주고 있다. 집세, 식비, 공과금, 각종 집기류 빨래를 한번 해도 돈이 든다. 음식물 쓰레기 하나를 버려도 돈이 든다. 이 사실의 무게를 모른다면 당신에게 가난은 머지 않아 찾아온다.
돈을 벌려면 출근을 해야 한다. 재택근무가 있으니 요즘엔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쨌든 출근하려면 출근길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지옥철을 이겨내고 그나마 출근할 수 있는 것도 대중교통이라는 인프라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 마을에 구글 지사가 있어도 마을과 구글 사이 밀림이 존재한다면 출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출근할 방법이 없으면 돈을 벌 수 없다. 인프라는 세금으로 구축하는데 세금은 국가에서 집행한다. 밤길의 가로등은 공짜일까? 정글에는 가로등이 없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인프라를 보유한 국가에서 태어났기에 이런 복지를 누릴 수 있다. 재택근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당신 집에 전기가 들어오고 보일러를 돌리기 위한 가스관이 연결되어 있고 재택근무에 필요한 광통신은 누가 설치 했을까?
나라에서 직접 통장에 꽂아주는 돈만이 복지는 아니다. 물론 세금이 다 국민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지만 실상 국민의 대부분은 자신이 낸 세금 이상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세금조차 내지 않는다. 낸다고 느낄 뿐이지 대부분 돌려받을 뿐만 아니라 추가 지원을 받기까지 한다. 우리는 부자들에게 감사할 필요가 있다. 이 많은 것들을 구축하는 데는 부자들의 세금이 더 많이 사용된다.
우리는 인프라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살아가는데 물과 전기가 필요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물과 전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몇 만 년 전 과거로 물리학자가 떨어진다 해도 그도 별수 없다. 이 물리학자가 세상의 모든 인프라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있더라도 그걸 이해해 줄 사람도 없고 이를 계발할 자원도 없다. 2023년에 대한민국에 태어난 건 생각보다 많이 복이다. 지구인 중에서 제법 괜찮은 조건으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대단한 나라에 태어나도 가난은 존재한다. 결핍인 사람도 있고 궁핍인 사람도 있다. 아쉽게도 이 나라도 이 두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고 점점 더 좋지 못한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출산율이다.
출산율이 0.73이라고 한다. 출산율이 2.0이 되면 국가 인구가 딱 유지되는 수준이라고 했다. 한국은 인구 감소를 넘어 인구 절벽을 만들어 버렸다. 출산은 대부분 2030 나이 때에 이루어진다. 인구가 왜 문제일까? 인구가 줄어들면 자원을 덜 쓰게 되고 환경을 덜 파괴하게 되며 이에 따라 정부도 세금을 적게 투입할 수 있으니 오히려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나도 그리 생각했다. 지구에 인구가 너무 많아서 지구가 아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구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다. 지구가 아픈 게 아니라 인류가 생존할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있을 뿐이니까. 지구 환경이 파괴되어도 지구에 생명체가 하나도 남지 않아도 지구는 존재한다. 인구 문제는 경제논리로 접근해야 하는데 이렇듯 사회환경 문제로 접근하면 잘못된 답이 나온다. 물론 인류의 생존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도 인류가 재정신일 때나 가능하다.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왜 0.7일까? 출산율을 보려면 보통은 혼인율을 봐야 한다. 한국의 혼외 출산율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미미하기 때문이다. 혼인을 하려면 연애를 해야 한다. 연애를 하려면 사회 활동을 통해 돈을 벌어야 한다. 끝. 이게 전부다. 정말 쉽다. 사회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이성을 만나고 고심 끝에 결혼을 하고 자연스럽게 아이를 가진다. 그런데 이게 이제 너무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부모님들이 어떻게 결혼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내 친구들도 결혼을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결혼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친구들이 내게 말했다.
"하려고 마음먹으면 다 하게 되어 있다. 다들 그렇게 산다."
뭐 우주가 도와주고 그런 건가? 계획대로 되는 건 없지만 계획도 대책도 없는 이들이 결혼을 약속할 수 있을 리 없다. 만일 그래도 결혼했다면 십중팔구 실수다. 아니면 부모님의 지원이 있었거나. 과연 내 친구들은 어떻게 결혼을 한 걸까. 직접 물어봐도 자기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투명하게 보정 없이 알려줄 리 없으니 어렴풋이 유추를 해야 한다.
반대로 30대도 훌쩍 넘고 40, 50이 되어서 결혼하지 못한 형님, 누님들도 있다. 일단 50이 넘어도 결혼을 하지 못한 분들의 공통점은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통적인 직업을 가지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엄청 잘 사는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적당히 잘 살아간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을 혼자 먹고살만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보험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축적한 재산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큰 병치레 없이 순탄하게 살아가고 있다. 연애도 한다. 그래도 결혼은 안 한다. 안 한다기보다는 못한다는 것에 가깝다. 그들은 왜 결혼을 하지 않을까?
이 질문에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 왜 결혼해야 하는가? 애초에 결혼 제도가 왜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이가 적당히 들면 결혼하고 애 낳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도대체 왜 당연했던 걸까?
지금은 결혼이 법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지지만 과거의 결혼은 여자에게 굴레를 씌우는 계약에 가까웠다.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부의 확장을 위해 자신의 딸을 계약금으로 사용했다. 즉 여자는 인질 가치가 있는 재산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은 과도한 노동을 분담할 조력자가 필요했다. 이 경우에는 자녀들이 노동력으로 이용된다. 이 또한 재산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힘이 강한 가문이 하나 있고 그보다 조금 약한 가문이 둘 있다고 해보자. 이 조금 약한 가문 둘이 합치면 강한 가문을 이길 수 있다. 평소에 강한 가문에게 불만을 품었던 상대적으로 약한 두 가문은 그들의 자녀들을 혼인시킴으로써 두 가문의 힘을 합치고 결국 강한 가문을 몰아내고 그 지역 최고의 가문이 되었다. 결혼은 가문대 가문으로써 혹은 노동력 보강을 위한 생존 전략이었다. mz세대의 부모님의 부모님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산업이 바뀌어 가던 시대에 태어났다. 농경사회에서 자녀의 탄생은 노동력의 보강을 의미했다. 공업사회는 달랐을까?
이랬던 한국이 2000년대 초반 급속도로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유야 다양하지만 인터넷 보급이 가장 크지 않을까. 조금씩 한 가정이 스스로 애를 많이 나아야 할 생각을 할 이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아이는 부부간의 사랑의 결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결혼의 목적과 전통을 두고 보자면 현대인에게는 자손의 번식이라는 이유를 제외하면 결혼을 해야 할 뚜렷한 이유가 없다. 결혼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각자가 적당히 벌어먹고 살 정도의 상태였다면 이제 결혼비용을 많이 사용했으니 생활이 제법 힘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결혼해서 여전히 남자친구의 원룸에서 사는 게 아니라면 어쨌든 신혼집에 비용이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스드메도 돈이 제법 든다. 웨딩드레스를 한번 더 입어보는 것도 돈이 든다. 나는 웨딩 촬영도 스드메도 왜 하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추억을 남긴다고? 웨딩 촬영할 돈으로 여행 가고 거기서 사진 찍으면 안 되나? 솔직히 신혼여행 사진이랑 웨딩 사진 중에 어떤 사진을 더 많이 볼까? 보정이란 보정은 다 먹여서 도저히 자신이라고 인식도 할 수 없는 결혼식장에 크게 장식된 신부의 웨딩 사진을 보며
"저건 누구지? 잘 못 찾아왔나?" 라는 생각이 든건 나 뿐인가?
나는 그게 좀 갑갑하다. 그러나 그 덕에 웨딩촬영 업체가 먹고사는 것은 분명해 보이니 자본주의 관점에서는 옳다. 웨딩 산업 만만세다. 결혼식 당일의 사진 촬영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스튜디오 촬영만큼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해가 안된다기 보다는 사실 이해가 너무 잘 된다. 자본주의는 무섭다.
내가 가난하기 때문일까? 남들이 다 한다는 이유로 하는 것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물론 돈이 차고 넘치면 그냥 하면 된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 애초에 이런 것들이 돈이 차고 넘치는 사람들이 시도한 것들이고 그게 괜찮아 보여서 따라 했을 뿐이고 그게 굳어져 이제는 따라 하지 않으면 거지 취급 별종 취급을 받으니 말이다. 결혼 비용 때문에 결혼을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해가 되면서 이해가 안 된다.
자신이 가난하다고 그 상태에서 대를 마무리하지 말자. 부자의 조상들이 그러했듯 당신의 자녀에게 그리고 그 자녀의 자녀에게 부가 물릴 수 있도록 노력해보는 건 어떨까. 이생망? 당신이 망한 캐릭터이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기회는 주어진다. 게임에는 용사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마법사도 궁수도 상인도 힐러도 있다.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는 npc까지. 각자의 역할을 잘 수행되는 게임이 멋진 게임이며 멋진 게임의 일원이 되는 것은 멋진 일이다. 주인공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론 결코 망한 삶이 아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망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인터넷 때문이다. 인터넷을 잘한다는 것은 정보를 잘 찾아낸다는 말이기도 한데 잘 찾았다는 것은 좋은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잘 비교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가난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눈치챘는가? 맞다. 바로 비교다. 우리가 가난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단 하나의 이유 바로 “비교”라는 습성 때문이다. 비교는 생고기를 구워 먹게 만들었고, 땐석기를 간석기로 만들었다. 청동기를 철기로 만들었으며 마차를 차로 바꾸었고 기어이 달에 사람을 보내기까지 했다. 인류 역사의 발전은 비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렇듯 비교는 인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간의 개쩌는 습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비교가 인터넷을 만나면 우리의 비교를 발전을 위한 비교가 아닌 소비를 위한 비교로 전락시킨다. 비교와 자본주의의 결합이다. 알고리즘 광고는 때로는 섬뜩할 정도로 정확해서 내 대뇌피질에 연결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나보다 내가 사고 싶어 하는 물건을 더 잘 안다. 그걸 단 하나라도 보게 되면 내 머릿속에 쇼핑비교 스위치가 켜지고 도파민이 생성된다. 1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쇼핑 스위치가 켜졌다면 강제로 플랭크를 하게 되는 장치라도 있지 않는다면 나의 1시간은 허무하게 소비된다. 이렇게 부자들은 나의 돈을, 하다 못해 시간이라도 소비시킨다.
21세기 자본주의 인터넷 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습성은 인터넷을 통한 무한 비교다. 어릴 적 동네 오락실에 "던전 앤 드래곤즈"라는 게임이 있었다. 100원으로 가장 오래 할 수 있는 게임이었는데 실수라도 하지 않는 한 보스 드래곤을 잡을 수 있었다.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플레이 방식도 거의 비슷했고 쉬운 루트만 반복적으로 선택했다. 원코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게임은 어떤가? 온라인 게임은 끝이 없다. 말 그대로 엔딩이 없다. 인간은 엔딩이 있는 것에는 아쉬움과 안도 혹은 분노를 느끼지만 엔딩이 없는 것에는 탐욕과 광기를 남긴다.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고 인터넷을 끊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인터넷에 접속할 때는 수명을 깎는 심정으로 좀 더 각오를 다지고 접속했으면 좋겠다. 요즘엔 인터넷 접속이라는 말조차 없을 정도가 되었다. 와이파이와 초고속 인터넷은 없는 게 이상한 세상이다. 21세기 초반에 비하면 지금 세상은 메타버스 그 자체다.
우리가 비교해야 할 것은 “어제의 나”지 타인이 아니다. 특히 부자, 인기 있는 자, 외모가 훌륭한 자, 능력이 출중한 자 들과 비교하지 말자. 그리고 시간을 때우지 말자. 가난으로 가는 직행 버스가 있다면 접속된 상태에서 시간 때우기를 반복하는 행위에 경각심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 상대적 결핍 상태를 인정하고 그곳에서 빠져나오자. 수준에 맞춰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수준이 그 정도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부끄러운 일이다. 시간 때우지 말고 공부하자.
당신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당신이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다. 에르메스 백을 살 수 없다면 주식이라도 한 주 사자. 그렇게라도 소유하고 보자. 아르노는 남들이 루이뷔통 백을 살 때 루이뷔통 자체를 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