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 괴는 여자 25.
2. <해리포터> 영화 시리즈
내가 이 시리즈를 처음 접한 건 '불사조 기사단'(5편)이 개봉했을 때였고 그때 난 여덟 살이었다. 이후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 편성을 통해서 그 앞의 네 편도 모두 봤다. 지팡이로 마법을 쓰는 세계관은 어린 눈에도 확실히 화려했다. 둥둥 떠있는 촛불과 움직이는 그림들이 신기했고, 헤르미온느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좋았고, '익스펙토 페트로눔!' 하는 주문을 외치는 장면이 멋있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암울한 분위기가 감도는 에피소드로 처음 이 시리즈를 인식하게 되어서 그런지, 장난감 요술봉 따위로 마법을 배운 나로서는 마법을 쓰는데도 경쾌하지 않은 색감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반짝이고 번쩍이는 마법들을 좇기만 했지,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는 그다지 알고 싶은 게 아니었다는 뜻. 나에게 이 이야기는
나쁜 볼드모트를 이기는 착한 해리포터와 친구들
이게 다였다. 사실 완결편이 개봉한 시점부터가 내가 열두 살이던 해였으니, 그때 이 영화가 무얼 말하고 싶어 하는지를 어쩌다 듣게 되었다 하더라도 아마 마음에 제대로 와닿지는 않았을 거다. 그리고 1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아주 얕고 단순하게 맛보던 이야기가 마침내 나에게 뚜렷하게 다가왔다.
메시지는 사랑.
사랑이었다.
해리가 이겨야 하는 '볼드모트'가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가. 해리포터 시리즈는 이 질문에서부터 나아가고, 동시에 도착한다.
볼드모트와 그를 따르는 '죽음을 먹는 자들'은 순수 혈통이 우월하다는 집착을 퍼뜨리면서 차별을 조장하고 혐오를 이용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니까 볼드모트는 어둠이고, 우리가 지양해야 하는 것들의 집약체인 거다. 타인을 미워하고 해치며 혐오하고 배제하는 마음의 상징인 거다. 시리즈가 진행되는 내내 볼드모트는 'you know who'라고만 불린다. 평범한 영어 표현인데도, 나는 그게 혐오가 나쁘다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는 말처럼 들려서 신기했다. 그런데 볼드모트가 나쁘다는 걸 다 알면서도 영화 속 어른들은 절대 그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하기만 할 뿐 그의 존재를 쉬쉬하고 만다. 너무 방대하고 모호하다는 이유로 혐오를 드러내고 명명하기를 미뤄온 그간의 역사다.
호그와트에서는 이 어둠을 막기 위한 방법을 '어둠의 마법 방어술'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이 과목의 교수는 매번 바뀌고 심지어는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기도 했을 정도로, 어둠을 막는 법을 가르치는 자리는 아주 불안정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건 아마 혐오로부터 사랑을 지키는 것이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이것과는 대비되게, 주인공 삼총사와 친구들은 직접 '불사조 기사단'을 조직하고 서로를 다독이며 함께 어둠을 막기 위한 훈련에 돌입한다. 이야기 속 아이들은 온전히 사랑을 믿고, 어둠을 몰아내겠다는 용기를 키워내는 것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동시에, 볼드모트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겠다는 마법 정부의 선언은 허울뿐이게 되고 만다. 어둠과 싸워야 하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들 본인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청소년기'에 대한 아주 거대하고 완벽한 은유.
원래 아이들은 어른이 되는 직전의 단계에서 자신을 둘러싼 보호마저도 직접 깨부숴야 하지 않는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그걸 생각해 보면 이 은유는 더 명확해진다. 어른이 되는 문턱 앞에서, 우리는 모두 어둠과 싸워야만 한다. 그동안 배워 온 마법들을 총동원해야만 한다. 타인에 대한 혐오가 우아할 수 있다는 야속한 믿음이 우리의 마음에 닿지 않도록 우리는 싸워내야 한다.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가기 전, 청소년기를 마무리 짓는 그 시점에.
오래된 예언은 해리와 볼드모트는 양립할 수 없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해리의 세계와 볼드모트의 세계가 공존할 수 없다는 이 말은 사랑과 혐오가 뒤섞인 시대가 얼마나 고통인지를 잘 보여준다.
해리는 자신이 볼드모트와 닮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부분은 이미 닮아있다는 사실에 좌절을 겪는다. 세상을 어느 정도 파악하는 때가 오면 그동안 스스로 혐오를 내재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균형을 잃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해리는 자신이 그 악과 얼마나 다른지, 또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믿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5편(불사조 기사단 편)의 클라이맥스에서, 볼드모트에겐 없고 해리에겐 있는 것이 정확히 읊어지며 이 싸움에서 누가 이겨야 하는지가 명백해진다.
사랑이다.
해리는 혐오에 잠식되어 가기를 거부하고 거침없이 사랑을 택한다. 타인을 혐오가 아닌 사랑으로 보는 것, 사실은 그게 더 어려운 일인 걸 안다. 반대로 혐오는 아주 쉽고 간단하지. 표적이 뭐라 하든 그 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그에 대해 떠들면 그만이니. 하지만 주인공은 분명히 그 유혹을 뿌리치고 사랑을 택한다.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작중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것도, 본격적으로 싸울 때가 왔다는 걸 알리는 6편(혼혈왕자 편)의 엔딩이 아주 침울할 수밖에 없는 것도 대개 알을 깨기 직전의 마음들은 새카맣기 때문일 거다. 늘 평화롭고 따뜻한 색감으로 비쳐온 '위즐리'네 집이 공격받아 불에 타는 장면은 꽤 충격적이다. 그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화면에 잡힐 때는 처참하기까지 하다. 안전하고 행복하기만 한 시절은 이제 없음을, 청소년기의 끝이 마침내 다가오고 있음을 이토록 잔인하고 분명하게 보여 주면서, 이야기는 치닫기 시작한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단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채로, 아이들은 청소년기 내내 짙게 깔려있던 어둠을 몰아내 이길 준비를 시작한다.
전투는 맥고나걸 교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은 볼드모트'라고 똑똑히 이야기하는 것으로 본격화된다. 우리를 갈라놓는 모든 종류의 어둠. 그 어둠이 몸집을 키워내는 것은, 귀찮거나 무섭다는 이유로 제대로 이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마침내 알아낸 거다. 그리고 어둠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어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이제 어른들은 보호 마법을 발동한다. 아이들이 어둠을 마주하는 데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최 대한의 시간을 벌어준다.
전투는 계속되고, 호그와트의 조각들은 무너지고 망가져 간다. 지켜야 하는 건 사랑이라서 학교와 유년을 조금씩 부숴내야 한다면 그럴 수도 있기 때문에. 호그와트가 망가져도 사라지는 건 사랑이 아니라는 것.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는 이제 없지만 사랑은 남아서 기어코 어둠을 이긴다는 확정적인 선언.
전투가 승리로 끝난 후, 해리는 볼드모트가 그토록 가지려 했던 딱총나무 지팡이를 손에 넣는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그걸 부러뜨려 없앤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지팡이, 그게 있으면 천하무적이 될 순 있겠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따로 있다는 걸, 해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삼총사는 이리저리 부서진 호그와트를 등에 지고 나란히 새로운 곳을 바라본다. 아이들은 그렇게 시절을 보내준다.
대부분의 팬들이 그렇듯, 나한테도 '스네이프 세베루스'라는 캐릭터는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사랑과 어둠 각각에 발 담근 스네이프가 사실은 어둠을 파멸시키고자 했다는 설정과 그가 불행한 청소년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택한 것은 사랑이었다는 결말은 아무래도 잊기가 힘들다. 해리는 이야기가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자신의 아버지가 세베루스의 불행을 만든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를 훌륭한 사람이라고만 믿어왔는데, 사실 그는 혐오와 폭력을 자행하는 끔찍한 인간이기도 했다. 만나는 어른마다 자신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말하는 것을 양분 삼았던 해리는, 자신의 아들 이름에는 '세베루스'를 넣어 세베루스의 가치를 유산처럼 물려주려고 한다. 타인을 바라보는 해리의 시각은, 미움을 바탕 삼고 있던 자기 아버지의 것을 넘어섰다는 얘기인 거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엔딩은 구세대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나가는 '사랑을 선택 한 세대'의 '미래'까지도 담고 있는 셈이다.
젠더 갈등 어쩌구 하는 그것(갈등이라는 표현도 민망하다)을 여기에 빗대볼 수가 있다. 이건 약한 쪽으로 흐르기 쉬운 혐오의 성질에 누군가들이 굴복했기 때문에 계속되는 것이다. 스네이프처럼, 해리와 친구들처럼, 어떤 사람들은 어른의 문턱에서 사랑을 택하는 힘을 발휘하질 못했다. 왜 혐오가 우아할 수 있다고 그들은 그렇게나 쉽게 믿어버린 걸까? 사랑을 택하는 힘은 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스네이프 그리고 해리와 친구들이 사랑을 택하고 힘을 합쳐 볼드모트를 결국 쓰러뜨릴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볼드모트를 '제대로 마주 봤기' 때문이다. 볼드모트의 추종자들마저도 그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데, 그에 맞선 사람들은 그의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악한지를 아주 똑똑히 목격해 왔다. '제대로 마주 봄'으로부터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가 시작되고, 어둠을 이기는 힘이 완성됐던 거다. 그러니까, 이제 '혐오의 명명'은 정말로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이것까지 혐오면 세상에 혐오 아닌 게 어딨냐, 별 걸 다 혐오라 하네, 예민 떠네…그런 생각들. 그런 것들이 정말로 혐오가 끈질기게 살아남는 이유인 거다. 그 모든 회피를 뚫어내고, 혐오는 생각보다 우리 주위에 많이 잔존한다는 걸, 아니 어쩌면, 이미 우리의 일부가 되어있다는 걸, 우리는 끊임없이 '제대로 마주 봐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혐오는 타인을 해치는 비겁한 믿음일 뿐이라는 걸, 그래서 볼드모트는 그렇게 비 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걸, 우리는 끊임없이 설득하고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가 만들어낼 좋은 시대를 끈질기게 상상해야 한다.
사랑을 선택하고 다 함께 볼드모트를 몰아낸 사람들의 아름다운 미래가 네모 안에 펼쳐지는 모양을 지켜보면서, 우리 역시 힘을 합쳐야 한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는 주인공들을 보고 자란 새로운 주인공들을 더 많이 키워내야 한다.
설사 사랑만이 충만한 세상에 닿는 게 우리가 아니더라도, 다음의 시대들이 줄기차게 이어져 결국은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 네모 상자는 더 많은 삶의 모양을, 더 넓은 시야의 세상을, 그리고 사랑을, 줄기차게 실어 날라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혐오를 똑바로 마주하고, 그것이 얼마나 공허하고 징그러운 것인지를 알게 되고, 힘을 합쳐 그것을 몰아내기를 선택하고, 더 나은 세상을 미래에게 물려주기를 결심하고, 그래서 미래가 될 아이들에게 사랑만을 보여주면, 그렇게 네모가 사랑을 싣고 오면, 바라던 시대는 반드시 올 거니까.
우리는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거야.
우리는 반드시 사랑일 수 있을 거야.
주문을 외워보자.
덧.
나는 <해리 포터> 시리즈가 '사랑'을 고대의 방어 마법이라고 설정해 둔 게 눈물 나게 좋다. 사랑은 아주 오래된 것이라 잊기 쉽지만, 절대로 낡지는 않는 마법인 거다. 열두 살 땐 들리지 않았던, 사랑은 결국 이긴다는 속삭임이 시공을 넘어 지금의 나에게로 와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 역시 마법 같다고도, 종종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