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 괴는 여자 28.
네모 상자를 하도 끼고 살아서일까? 난 샤워를 하다가도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을 떠올린다. 피곤이 녹고 맑은 정신이 다시 채워지는 유일한 시간에도 나는 이야기 생각을 집어넣는 거다. 열 살 때 처음으로 밤에 하는 드라마를 보고 잠들기 시작한 이후로 난 그 당시의 캐릭터들은 대부분 따라 하기까지 해 봤다. 샴푸로 머리를 가채처럼 만든 다음 거울 앞에서 '네 이놈!'하고 소리치는 건 기본이고 추격당하다가 절벽 밑으로 떨어져서 물에 빠지는 장면을 따라 하느라 바닥에 드러누워 본 적도 있다. 다 커서는 연기까지 할 시간도, 체력도 없어서 그냥 생각만 하고 있다. 그리고 어제 본 장면들을 되새기며 오늘 회차가 어떻게 펼쳐질지를 상상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드라마에 내 드라마를 덧그리게 되었다.
예를 들어, 아내의 헌신을 받아먹고 살면서 자기 혼자 잘난 줄 아는 심술쟁이 영감 캐릭터를 두고, 저런 사람들은 언제 벌을 받나, 그런 생각을. 그 하나로부터 시작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나중에는 비대한 덩어리로 뭉쳐지고 만다.
만약 잘못을 뉘우치는 순간이 살아서는 오지 않는 거라면? 그러면 그 영감은 사후세계에서라도 벌을 받을까? 그럼 그게 무슨 소용이 있지? 살아있을 때 떵떵거리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마구 으깨놓고 본인은 죽어서야 으깨지는 게 지옥인 걸까? 이미 자기가 만들어놓은 이승의 살아숨쉬는 지옥들은 다 어떡하고?
그 영감이 간 사후세계에는 자기 같은 사람, 자기보다 더한 사람들이 다 모여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자기들끼리만 사는 삶이 또 펼쳐지면 좋겠다. 그거면 지옥일 수 있겠네.
거기엔 또 누가 있을까. 온 세월 바쳐서 모아놓은 돈 가지고 등쳐먹는 사람이 있겠지. 무조건 남들 흉보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이간질 그만하라고 울면서 말하는데도 듣는 척 안 하는 사람도 있겠지. 서로 등쳐먹고, 서로 흉을 보고, 서로 이간질하고, 서로 심술을 부려서 제대로 작동할 수도 없는 세계의 숨통이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진다면, 그럼 그게 지옥이겠네.
미술시간에 시선은 나로 두고 다른 사람과 귓속말을 하더니 체육시간에는 나 혼자 앉게 만든 그 애도 거기 있을까? 그런데 나는 거기 없을 수 있을까?
생각은 이렇게 드라마에서 본 '영감탱'에서 '나'에게로까지 연결된다. 그러다 내 상상은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드라마들에서 뻗어나가기만 하지 않고,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물을 주워 담은 다음 열매를 맺기까지 한다. 드라마에 내 드라마를 덧그려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나만의 드라마들이 만들어진다.
이 드라마들은 모두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늘 시청률 백 퍼센트가 보장된다. 신기한 건 물이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는 거다. 샤워기를 잠그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 차례가 되면 내 머릿속에 누가 다녀갔는지는 까맣게 썩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내 대부분의 상상들은 욕실 안에서만 살아있다. 욕실 밖을 나오면 사라지고 말 것들이지만 나는 다음날이 되면 다시 욕실 안으로 들어가 상념들을 씻어내고 상상들을 덧입히길 반복한다.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고 계속되었던 드라마들이 두 가지 있다.
1. 한 순간에 모든 생명들이 증발해 버리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일단 곳곳이 터지고, 망가지고, 달리던 기차는 벽을 부순 뒤에야 멈출 것이다. 그런 엉망인 시간들이 계속되다가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정적만이 군데군데를 채우고 있는 지구에 마침내 외계인들이 도착할 거다.
골든 레코드를 보고 그 먼 은하들을 달려왔는데 발신자가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니.
당황도 잠시, 그들은 곧바로 탐사를 진행한다. 미끼일 수도 있다, 저들이 보내온 자료만 보고 덥석 지구행을 결정할 순 없다, 내부에서는 그런 말들이 지지부진하게 왔다 갔다 한 끝에 아주 어렵게 외교 쪽으로 결론이 났을 거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것이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곳의 뒤죽박죽 한 흔적뿐이라는 게. 내심 전쟁에도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던 대원 A는 안심했을 것이고, 새로운 세계를 더 편하게 읽고 싶었던 대원 B는 이 상황이 조금 기막히다.
아무튼 탐사는, 내가 잘 아는 나라가 대한민국밖에 없으므로 대한민국에서 시작된다. 외계 대원들은 가장 먼저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몇몇 사진들을 발견하게 된다. 같은 등장인물들이 같은 장소에서 총 네 번의 사진을 찍은 것이 하나의 페이지에 담겨 있는 종이. 부스에서 사진을 찍고 나와 확인하는 와중에 사라진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에 떨어뜨린 조각이 용케도 남아있던 것이다. 각 사진마다 포즈가 각기 다른 것을 보고, 대원 B는 ‘몇몇 포즈가 겹치는 걸 보니 증발을 직감한 사람들이 살려달라는 수신호를 남긴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펼쳤지만 이후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모두 검토한 결과 그런 의미는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대원들이 검토한 자료라 함은 각종 드라마, 영화, 예능 프로그램 등인데, 대부분 드라마에서 등장인물들이 모두 똑같은 휴대폰을 쓰고 있는 걸 보고 대원 A가 여기에야말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설쳐댄다.
조사 결과 그냥 다 돈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 돈은 거의 모든 것의 이유라는 것도 드러나는데, 대원 A는, 어떤 사람들은 일당의 반절을 로또 사는 데 쓸 정도로 절박한 반면 어떤 사람들은 살면서 다 쓰지도 못할 양의 돈을 그 품에만 쥐고 있는 게 희한하다는 감상을 덧붙인다.
대원 B가 흥미롭게 느낀 부분은 총 두 가지다. 그중 하나는 한국 사람들이 김치찌개와 김치볶음밥과 김치 반찬을 한 식사에 먹어도 문제없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이 별의 사람들은 늘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거다. 과거를 불러오고 되살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살아온 것이 인류의 동력이었고, 인류는 그 역사를 한 번에 응축해 놓은 단어까지 미리 만들어두었을 정도로 그들의 과거에 대한 집착을 모르지 않았다. 집착은 그다지 좋은 게 아닌데도 '레트로'는 계속되었고,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술이 끝없이 좋아지는데도 사람들은 필름 카메라를 사 쟁여두고 있었다. 무선 이어폰까지 발명되었는데 무거운 헤드셋을 다시 머리 위에 올려 두는 행태를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가 시작된 지 오래인데 mp3 다운로드를 위해 돈을 더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전 노래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조금씩만 바꿔서 다시 발표하는 일이 허다했고 어떤 영화의 대사들은 아주 많은 사람들의 삶에 남아 죽지 않고 있었다. 대원 B가 이런 그리움은 집착이 아니라 사랑과 낭만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 건 조금 후의 일이었다.
내 상상은 여기서 멈췄는데, 샤워부스 밖으로 나와야 해서 그랬다기보다는 대원 A와 대원 B가 앞으로 더 읽어나가게 될 지구에는 사랑과 낭만보다는 이상하고 잔혹한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아까 대원 A가 탐구한 '돈'보다 훨씬 많이.
가해자의 앞길이 창창하다는 이유로 그가 피해자의 앞길을 막아놓은 사람인데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
‘데이트'와 '폭력'이라는 단어가 한 데 묶여 소개될 수 있다는 것.
상대를 너무 사랑한 탓에 헤어질 수 없었다는 말이 살해의 이유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
어떤 시대에 다다르면 상대가 약자라는 점을 이용해 타인의 삶을 주무르려 드는 쓰레기들이 카메라를 이용하기 시작하는 때도 온다는 것.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한 인간의 아버지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흘린 눈물이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것.
약자를 골라 죽이고 괴롭힌 비겁한 인간이 악마의 현신으로 은근슬쩍 떠받들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세상이 정의하는 두 개의 성 중 한쪽에만 유리하고 다른 한쪽에는 가혹하게 돌아가는 것이 세상의 규칙이라는 것.
대원 A와 B는 이 사실을 파악하자마자 뭐 이런 행성이 다 있냐고 욕을 하며 당장 자신들의 행성으로 떠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기 전에도 내가 미리 끔찍한 기분이 된 바람에 이 드라마는 허겁지겁 종영됐다. 옮겨간 생각이 무어였는지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29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