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 리뷰 2편 : 3부~6부
진흥이 세상을 떠나며 문노에게 남긴 예언은 둘로 쪼개진다. 첫 번째는 북두의 일곱 별이 여덟이 되지 않는 한 미실에 대적할 자는 없다는 것. 이는 북두칠성이 북두팔성이 되지 않는 한 신라는 영원히 미실의 손안에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하늘이 하늘로 남는다면 미실의 권력을 넘볼 자는 감히 세상에 오지 않는다는 것인데, 하늘이 늘 같은 하늘이 아니며 별은 태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함부로 영원을 짐작하는 서라벌에 북두의 일곱 별이 여덟이 되는 밤이 찾아오고, 한 아이가 태어난다. 잠시 후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나고, 진평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황실을 끝장낼 오랜 예언과 함께 온 이 어린 얼굴을 바라본다.
어출쌍생 성골남진(왕이 쌍둥이를 낳으면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른다).
쌍생을 들킬 수 없고, 그리하여 마야 부인을 잃을 수 없는 무력하고 젊은 왕은 시녀 ‘소화’에게 둘째 아이를 맡긴다. 최대한 멀리 도망쳐, 제발 아이를 살려 달라는 비겁한 부탁과 함께.
마야의 손목을 진맥한 신녀가 그의 사람이라 이미 쌍생을 알고 있던 미실은 황실의 종말을, 그리고 황후의 자리를 손에 넣을 작정을 진작에 하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하나, 어출쌍생 성골남진의 예언과 함께 태어난 아이들을 세상에 보이는 것뿐이다. 황실이 나라에 큰 죄를 지었다는 증거를 만천하와 공유하는 것이다. 진평이 아이를 빼돌릴 것을 계산해, 미실은 궁내의 모든 병력에 궁을 빠져나가는 자가 없게 하라는 명을 내린 상태다. 그리고 근위병 하나가 보자기에 싸인 아이를 품에 안은 소화를 발견한다.
이내 소화와 근위병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다. 그런데 그 모양이 희한하다. 못 가게 막으려는 근위병과 뚫고 나가려는 소화의 모습이 아니다. 막중한 임무에 부담을 느낀 소화가 아이를 대신 키워달라며 근위병에게 냅다 아이를 넘기고, 근위병은 멍청이로 이름 날린 이 시녀가 어디서 사고를 쳐 낳은 아이를 자신에게 주는 줄로 알고 빨리 보내버리려 한다. 그렇게 소화가 아이를 데리고 궁을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훗날 미실에 대적할 개양자는 그렇게 살아남는 것이다. 어이없게도.
운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미실, 문노, 이런 거대한 이름들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점이 재미있지 않은지. 오히려 그 거대한 이름들은 자신을 둘러싼 소용돌이가 손에 들어오지 않아 괴로워하는 이들이고, 정교하고 복잡한 큰 틀에 갑자기 끼어든 허점 같은 변수들이 사실은 운명을 좌우한 모든 것이라는 게.
그리고 그렇게 진흥이 남긴 예언의 나머지 조각이 맞춰진다.
“미실을 대적할 자, 북두의 일곱 별이 여덟이 되는 날 오리라.”
진흥이 떠나는 날 전해진 계시가 모두 미실로 시작해 미실로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미실의 ‘사람’ 중 하나가 실수를 해버렸다. 그렇게 운명이 운명으로 흐르게 돼버렸다. 자신에게 ‘사람’의 중요를 얘기한 진흥.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 한 진흥.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미 그의 사람까지 먹어치워 온 미실은 그가 예고한 대로 흘러갈 시간을 두고 볼 수가 없다. 자존심이 상해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미실은, 사람은 능력이 모자랄 수 있고 부주의할 수 있으며 실수를 할 수도 있으나 ‘내’ 사람은 그럴 수 없다는 그 유명한 대사를 하기에 이른다. 직접 칼을 들어 병사들을 죽인 피 묻은 얼굴을 하고 미실은 침착하게 웃는다. 그래도 참아지지가 않아서, 미실은 화랑 ‘칠숙’에게 얼마가 걸리든 얼마가 죽든 상관없으니 쌍둥이 한쪽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내 기억으론 이 장면은 당시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재현되고는 했다. 이 장면을 시작으로 미실이 하던 대사나 미실이 등장할 때마다 나오던 노래 따위는 한껏 과장되어 우습게 다시 티브이에 나왔다. 고만고만하게 유치했던 당시의 10살들이 따라 하기 좋은 표적이 되었다. 나도 ‘내 사람은 그럴 수 없어’ 하는 이 대사를 앙칼지게 발음하며 칼을 휘두르는 척을 해 보이는 10살들 중 하나였다. 이 대사가 사실은 낮은 목소리, 힘이 많이 들어가지 않아 오히려 모두가 자신을 듣고 있음을 아는 듯한 힘 있는 목소리였음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미실’이라는 역대급 캐릭터에 따라붙은 ‘희대의 악녀’라는 말 역시 찬사가 아니라 멸칭이었음을, 그때 함께 깨달았다.
미실에 대적할 자가 태어났다는 그날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멀리 도망치라는 왕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소화는 ‘타클라마칸 사막’에 터를 잡아 상단이 머물다 가는 여관을 운영 중이다. 15년 전 그날, 칠숙에게 쫓기다 들어간 동굴에서, 그는 불길이 타오르는 중에도 아이에게 숨을 나눠주었다. 그러느라 폐를 다치고, 불만 보면 놀라 벌벌 떨게 되었는데, ‘덕만’이라 이름 지은 그 아이는 소화를 엄마로 알며 그를 지켜주겠다는 다짐으로 살고 있다.
한편 칠숙은 시간도, 목숨도 상관없어야 한다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15년을 헤매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시점에 그는 타클라마칸 사막에 다다른다. 빛바래버린 명령을 위해 살던 세월을 접고 상단의 호위무사 자리를 알아보기로 한 참이다. 그런 그의 앞에 덕만이 나타났다. 덕만은 자신이 매일 만나는 것이 상단 사람들이기 때문에 칠숙이 자신을 정말 잘 만난 거라며 그를 이끈다. 서라벌에서부터 쫓고 쫓기던 관계인 칠숙과 소화는 15년의 세월 탓에 처음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덕만은 상단의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다양한 책과 문물과 함께 자라고 있다. 세상에 모래하고 별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책 속 영웅들이 나라를 뺏고 지키고 토론하며 사는 것을 보며 가슴 설레하는 하루하루들이다. 제국 이야기에 들뜬 덕만이에게 상단 사람 중 한 명인 ‘카탄’이 네 생각만큼 좋은 곳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은 어떤 복선이 될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덕만은 씩씩하기만 하다. 차 교역을 금지한 제후를 속이려다 들켜 상단 사람들과 칠숙, 엄마(소화), 그리고 자신까지 모두 죽을 위기에서도 “백성들의 말을 들을 시간이 없는 자는 황제가 될 시간도 없다고 했”다는 책 속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눈을 크게 떠 보인다. 그런 시간도 잠시, 이내 칠숙과 소화가 서로를 알아보고 악연이 재연된다. 세 사람의 추격전이 15년만에 재개되고, 그들은 쫓고 쫓기다 사막의 모래 폭풍을 만나는데, 덕만이 혼자 살아남는다.
엄마를 잃은 슬픔을 애써 누르고, 덕만은 아버지가 서라벌에 있다는 그 언젠가의 엄마의 말 하나를 붙잡아 사막에서의 생활을 접고 신라로 떠난다.
천명은 적통 왕자인 아우들을 벌써 셋이나 잃은 참이다. 그 언젠가 자신에게 동생들이 줄줄이 죽는 것이 “너 때문이다”라고 알 수 없는 말을 한 미실에 감히 맞설 생각은 하지 못한 채다. 남편 ‘용수’와 결혼하고는 아예 족강(성골 신분을 진골로 만듦)을 해 황후가 되려는 공공연한 미실의 꿈에 거슬리지 않으려 애를 쓰고만 있다. ‘용수’를 태자로 삼겠다는 진평의 발언 이후에는 미실이 천명 네가 황후가 되겠다 술수를 쓰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자 “전 술수 따위 알지 못합니다. 단지 진심을 다할 뿐이옵니다.”라는 말로 그의 심기를 달래려고도 한다. 가지고 태어난 것들 때문에 진심이기만 하면 되는 아이, 술수를 몰라도 되는 그 아이를 보며 미실은 잠자코 웃기만 한다.
“개양성 쌍둥이 별 중 하나가 빛을 잃은 지 벌써 15년”이라는 상천관의 대사에서, 우리는 그것이 계림에서 자취를 감춘 덕만일지, 미실이 지키는 궁에 갇힌 천명일지 생각해봐야 할 것도 같다. “공주님.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래야 삽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삽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는 미실. 숨죽여 살라는 그 말에도 천명은 이후 기어코 맞서게 될 것이다. 어쩌면 미실에 대적할 자의 운명은 같은 날 태어난 동생의 것이었는데도,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서워도 한 발 한 발 내디뎠을 천명.
그러나 지금의 천명은 아직 어리고, 태자 후보로 거론되자마자 살해된 용수의 죽음 앞에 눈물만 흘릴 뿐이다.
용수는 누가 죽였을까? 미실이다. 15년을 잠들어있는 예언, 미실은 권태롭다. 그 언젠가 세상에 온다던 '미실에 대적할 자'는 여태 눈에 보이지 않으며, 미실이 선택하는 이가 왕이 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상대등 ‘세종’과, 그와의 아들 ‘하종’이 미실의 오른팔이라면, 미실의 정부이자 병부의 장수인 ‘설원’과 그와의 아들 ‘보종’이 미실의 왼팔이다. 명분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는 있지만, 미실은 오른팔을 황좌에 앉힐지, 왼팔을 황좌에 앉힐지 고르기만 하면 된다.
6부에서, 미실의 동생 ‘미생’이 세종과 설원 중 누굴 군왕으로 생각하고 있냐는 물음을 하고, 미실이 답한다. 아주 느리고 흥미 없는 듯한 목소리로.
“보이겠지요. 군왕의 운명을 향해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덤벼오든, 차갑도록 냉정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든… 어느 순간 내 앞에 나타나겠지요.”
그 ‘누군가’가 세종과 설원도 아닌 덕만과 자신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지금의 미실은 황후만을 상상할 수 있는 자이며, 그의 오만한 권태 앞에 서라벌 모두가 함께 무기력해져 가고 있다. 먼저 나서야 할 개양자는 누구인가. 미실의 권태와 함께 잠든 예언을 깨울 자 누구인가.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