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 리뷰 3편 : 7부, 8부
사막의 모래와 별과 엄마가 전부인 세상에서 살아온 덕만의 시간대와 미실이 지키는 궁의 공주로 숨죽인 채 살아온 천명의 시간대가 비로소 맞추어지는 때가 온다. 덕만은 영원도 각오하라는 미실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칠숙을 피하려다 엄마 소화를 잃었고, 천명은 남편 용수가 태자 후보로 거론되자마자 황후를 꿈꾸는 미실에 의해 그를 잃는다. 덕만과 천명, 두 아이 모두 미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실이 둘을 서로에게 이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문노’를 찾는 것인데, 그 이유들을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덕만의 경우, 엄마로 알고 자란 시녀 소화가 서라벌에서 도망친 그날 함께 갖고 온 종이에 적힌 ‘문노’라는 이름 하나를 보고 무작정 뛰어들었다. 태어나서는 안 되는 아이를 숨긴 황실을 문노가 돕지 않았을 리 없다. 그는 칠숙에게 쫓기는 소화를 구해내며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서찰과 함께 항주에 가 있으라 했었다. 소화는 서찰은 받아 들었으나 항주에 가지 않았는데, 이는 덕만이 공주가 되어있을 조금은 먼 회차에 공개될 이야기이다. 어쨌든 이 서찰의 이름을 보고, 덕만은 그를 아버지라 생각해 그를 찾기 위해 서라벌로 간다.
천명의 경우, 그는 용수를 잃은 후 진평과 마야를 찾아 가 북두칠성의 운명을 묻고 출궁해 승녀가 되겠다 말한 참이다. 우리는 그런 그를 보며, 용수의 장례식에서 천명을 안고는 북두의 별 같은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도망치라는 소리를 ‘내 마지막 연민’이라 말하는 미실을 그 이유로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세 용의 이야기, 하늘을 가진 여자와 별의 운명을 같이 안고 태어난 쌍둥이의 이야기이다. 천명은 도망치지 않는다. 천명은 용수의 죽음을 통해 황실의 나약함을 목도했으며, 힘을 키울 기반을 물색하기 위해 직접 나선다. 그 때문에 문노를 찾는 것이다. 진흥으로부터 계시를 직접 받아 누구보다 별을 눈에 들였을 문노는 ‘그날’ 이후 빛을 잃은 개양성, 아이를 데리고 자신에게서도 도망친 소화, 아연하리만치 거대한 미실의 세력을 모두 목격한 후 속세를 떠나 있었다. 태백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나도는 마당에 그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명은 직접 나선다. 진영을 갖추기 위해, ‘사람’을 얻기 위해. 호랑이에 물린 손을 안으로 더 집어넣었다는 그 누군가처럼, 혹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미 손을 뻗은 후였던 그 누군가처럼.
특히 천명이 용수와의 아이 ‘춘추’를 미실의 궁에서는 낳을 수 없다 판단한 것 역시 그가 절에서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데 이유가 되었다. 절에 찾아온 용수의 동생 용춘에게 천명이 자신의 아이의 이름과 그 뜻을 말하는 장면은 묘한 울림을 준다.
“가장 강한 것은 세월이다. 미실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하여 세월을 뜻하는 이름을 지었지요. ‘춘추.’”
정말로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훗날 왕이 될 춘추는 천명이 준비한 가장 강한 다음이 된다. 덕만의 시대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후계로서 춘추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천명은 이미 미실의 것이 되어 있는 궁에 사는 모두에게 일단은 숨기는 것이다. 아이도, 자신이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도.
덕만과 천명은 ‘만노군’에서 서로를 만나게 된다. 당연히 완전한 타인으로, 같은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도 아직은 모른 채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두 아이들은 난도들에게 납치 당해 난도촌에 갇히게 된다. 가뭄으로 인해 죽어가던 난도촌 사람들이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넘겨 잠시라도 목숨을 부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때 덕만은 자신이 비를 내려보겠다며 밤낮을 새 가며 제사를 올리고 수맥을 찾기 위해 땅을 판다. 그에 감동한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았어도 덕만을 그냥 보내주는데, 천명이 따라가려 하자 ‘어르신’이라 불리는 사람이 그에게 말한다.
“넌 뭘 했는데.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저 놈은… 간절한 우리보다 더 간절하게 빌었어.”
황후가 되려 술수를 부리는 거냐 묻는 미실에게 자신은 단지 진심을 다 할 뿐이라고 답하던 천명의 얼굴을 기억하는지. 공주로, 귀한 이로 살아왔기 때문일까. 그는 가림막을 쓰고 있었다. 그 뒤에 숨은 채 진심을 다한 적 없으면서 진심을 운운하는 허세만 배워온 천명. 그래서 넌 무엇을 했냐는 지금의 다그침은, 기죽어서도 고고하게 살 길을 찾기나 했지 한 번도 간절했던 적이 없는 그동안의 자신을 꿰뚫는 말이 된다. 각성의 단초인 것이다.
잠시 후, ‘넌 무엇을 했는데’에 대한 천명의 첫 답이 바로 나온다. 만노군의 난도들을 잡기 위해 미실이 보낸 중앙군이 난도촌을 덮친 와중에 천명이 신경 쓰여 다시 돌아온 덕만이 그와 함께 도망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절벽으로 떨어진 덕만을 구하기 위해, 천명은 뛰어내린다.
한편, 천명이 이 난리통에 휩쓸려 있었다는 소식이 황실에 전해지고, 만노군 태수 김서현의 입지가 위험해진다. 김서현은 곧 천명이 만나게 될 김유신의 아버지로, 신라에 의해 멸망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태자이자 황실의 공주 만명과 야합해 그들을 반대한 황실을 등지고 사랑의 도피를 한 화랑이기도 하다. 황실의 사람이 아닌 미실과는 대립각에 있는 인물이기에, 진평과 함께 만노군까지 내려간 미실은 모두가 보는 앞에 그를 바짝 다그친다. “만노군의 태수로서 실정을 인정하고 먼저 잘못을 빌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난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결국 중앙군까지 출동했습니다.” 결국 그 난도들로 인해 공주까지 실종이 되었으니 천명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김서현의 책임이라 못 박아버리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실 천명의 실종은 다름 아닌 미실에게 독이 될 상황이었는데, 이에 미실과 설원의 아들 보종이 가담했기 때문이다. 천명이 덕만을 구한 후 두 아이는 서로 찾는 사람이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 문노가 상산 여래사에 있다는 천명의 정보로 함께 그곳으로 떠난 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이좋게 손을 잡고 도착했을 때, 문노는 그곳에 없었고 다만 그를 ‘노리는’ 세력의 난입으로 여래사에 참변이 벌어진 후였다. 그 세력이라는 것이 바로 보종과 그 낭도들이다.
미실은 호국선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의 대가인 문노를 죽이라는 명을 아들에게 내린 것이다. 왜 미실이 문노를 죽였어야 하는가는 이후 문노가 화랑도에 복귀하는 시점에 더 자세히 다루려 한다. 지금은 우선 중요한 순간마다 황실을 돕는 문노와의 악연을 끝내려는 기회를 그가 계속 노리고 있었다는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실에게 문노는 살아있으면 안 되는 자이다.
그런데 보종을 보내 은밀한 움직임을 만든 미실 측의 낌새를 눈치채고 용춘이 화랑 임종을 몰래 보냈다. 이렇게 천명과 덕만, 보종, 임종의 세 세력이 여래사에서 통째로 부딪혀 난장판으로 이어지게 됐는데, 어찌 된 운명인지 덕만이 화살을 맞은 보종과 함께 물가에 쓸려 가고, 천명은 ‘유신’과 그가 이끄는 용화향도 낭도들에게 홀로 발견된다.
유신은 천명이 공주인지 알지 못한 채 김서현에게 자신을 데려가라는 그의 말에도 수련이 끝나면 관가에 데려갈 것이라 대응하기만 한다. 그리고는 천명과 낭도들이 보는 앞에서 수련에 돌입하는데, 목검을 쓰며 9995까지 세어놓고는 마지막 벨 때 마음이 흐트러졌다며 다시 1부터 세기 시작한다. 답답해진 천명이 유신에게 소리친다.
“이 미련한 자를 보았나. 네 마음 따위를 누가 안단 말이냐.”
“이게 바로 화랑으로서 낭도들을 통솔하는 방법이구나. 아마도 네 놈은 그리 영민하지도 못하고 무술도 출중하지 못하고 이 촌구석에선 제법 행세하나 집안도 별 볼 일 없고. 서라벌 화랑들을 동경하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지. 헌데 낭도들은 다스려야 할 테니 뭐라도 보여야 할 테고. 그래서 택한 것이 그런 우직함과 성실함. 그런 것이냐? … 맞구나. 낭도들을 통솔하기 위해 그 우둔한 머리에서 나온 네 나름의 술수로구나.”
이에 유신이 답한다.
“술수 따윈 모른다. 단지 진심을 다 할 뿐이다.”
이 말은 천명이 가림막으로 가린 얼굴로 미실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했던 말임을 기억할 것이다. 이에 천명은 미실이 자신의 마음을 부수었던 방법을 대충 빌려오려 한다. 진심이든 술수든 바뀌는 것은 없다고 쏘아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유신이 이런 답을 해버린다.
“모든 게 변한다. 진심을 다 하면 적어도 나 자신은 변할 테니까. 내가 변하면 모든 게 변한다. 그렇게 믿고 있다.”
유신은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자신이 바뀌면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그래서 늘 진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로써 미실의 영향력 아래, 그냥 조용히 엎드려 살기만을 바란 궁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천명은 진심을 다하면 된다고, 맞서면 된다고 알려준 사람들을 둘이나 만나게 된 셈이다. 유신과 덕만, 천명은 이 도망 아닌 도망에서 그 둘을 얻는다.
유신의 수련이 끝난 후 관가에 간 천명은 그곳에서 아버지 진평을 다시 만나고, 자신을 구해준 유신을 자신의 화랑으로 삼고 김서현 일가를 아예 서라벌로 들이겠다고 선언한다. 정말로 진심을 다하는 사람들을 봤으니, 이제 두려워하고만 있기엔 시간이 아깝다. 그는 미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다시 궁으로 돌아가 화랑의 주인으로 복귀하겠나이다.”
또한 천명은 그 자리에 보이지 않는 보종을 물고 늘어져 추궁한다. 미실이 결국 보종을 찾아 데려오며 논란은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덕만이 나타나 여래사의 일을 증언하며 상황이 반전된다. 이는 김서현 일가를 서라벌로 불러들이는 데 새주로서 반대하던 미실을 상대할 카드가 되며, 이렇게 천명은 자신의 ‘사람’들을 얻어 화려한 복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유신을 자신의 화랑으로 삼고는 덕만을 그의 낭도로 삼으라 명하는 것까지 손을 써두는 것으로, 그를 보호하고자, 또 곁에 두고자 한다.
한편, 미실은 그런 천명에게 “공주님에 대한 제 연민은 끝났습니다.”라고 말한다. 너의 도전, 너의 선전포고 그런 것들이 내 측은에 대한 너의 답이라면 난 더 이상 너를 봐줄 이유가 없을 거라는 선언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천명이 도망친 게 아니었고 진영을 갖추는 중이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본다. 그리고는 계속 웃더니,
“천명은 지난 1년 동안 온몸의 피를 돌리고 뼈를 깎고 살을 태우며 큰 그림을 그렸을 것입니다. 그런 자의 도전이라. 그런 공주의 도전…”
조용히 읊조린다.
자, 이렇게 이야기의 세 주인공이 모두 ‘다시’ 서라벌에 모였다. 천명은 도망치지 않았고, 그 옛날 예언이 묻힌 밤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 운명은 그들을 어디로 데려갈까? <4편에서 계속>
덧.
개인적으로 천명의 각성을 알아본 미실이 자신의 수족들에게 “천명이 어린 날 저 같지 않습니까?”라고 평하는 대사를 좋아한다.
덕만과 미실은 영웅의 운명을 타고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서로 정말 다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후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한 이유가 될 것이기도 하다. 덕만은 (해외파라서) 시야가 넓고, 진심을 다하는 투박한 정면돌파, 가끔의 술수로 자신의 비상함을 쏙쏙 증명하는 케이스라면 미실은 (궁내파^^라서) 이미 자신의 바운더리가 확고하고 게임판에 보낼 장기말들도 충분하며 게임판을 홀로 위에서 관전하는 여유까지 갖춘 케이스이다. 모든 것에 매번 일일이 진심을 쏟기보다는 자신이 쓸 수 있는 최소의 수부터 최대의 수까지 계산한 후 상대의 수준에 따라 수를 내보이는, 자신의 장기말들과 그것들에 덤벼드는 상대를 두 수 위에서 유유히 쳐다보고 있는 느낌인 것이다. 이는 세월을 통해 얻어낸 것들이기 때문에 이 극의 인물들 중 아무도 미실을 흉내 내는 것은 불가하다. 덕만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아주 먼 훗날 그를 탐내게 된다. 자신과 미실은 아예 다른 사람이고 자신은 미실'도'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천명은 어떠한가? 따지자면 천명은, 미실이 알아본 대로, 미실을 닮았다. 태어날 때부터 궁에 있었기 때문에 궁의 일들에 기민하고 파악도도 높다. 그가 어리기 때문에 이미 미실이 장악한 곳이 주무대일 수밖에 없어 날개가 펼쳐질 기회가 없었으나, 어린 날 미실이 ‘사람’을 모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천명은 궁 밖으로 나가 진심을 다하는 이를 만나고 자신의 진영을 꾸리기 시작하면서 멀리 미래를 보려 한다.
그러나 미실은 판을 위에서 쳐다보는 사람, 자라나는 싹을 언제든지 발견하고 잘라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천명 또한 용의 기질을 타고난 자이지만 결국은 더 거대하고 노련한 용에게 영영 기회를 뺏긴 것이다. 애초에 궁은 미실의 영역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부터 시작했느냐 (그래서 미실의 시야에 언제든지 들어와 있었느냐)와 그 외부에서 안으로 침투했느냐 (그래서 미실을 당황하게 했느냐)의 차이가 이 싸움판의 흐름을 좌우하게 되었다. 쌍생 중 누가 먼저 세상에 났느냐, 그 차이 하나로 운명은 또 한 번 갈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명은 영웅이 되기를 선택하는 자다. 훗날의 공주 덕만과 황실을 뒷받침하게 될 기반은 모두 어린 날 천명이 손수 다진 것들이다. 나는 이것이 참 찡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