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 리뷰 12편 : 29부, 30부
일식이 일어나고, 또 다른 개양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천신황녀의 이름으로 일식이 없을 것이라 공표한 미실의 위신은 모두가 보는 앞에 떨어지고, 마야가 덕만에게로 걸어 가 손을 붙잡고는 모두의 앞으로 걸어간다. 딸의 손을 이끌고 세상에 발 디딜 곳을 직접 만들어주는 어머니인 것이다. 마야는 예언이 전부 전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불길한 의미만 가졌던 쌍생이 두려웠다 고백하고 부덕을 용서해 달라 백성들을 향해 말한다. 백성들은 ‘덕만 공주’를 향해 만세를 외친다. 등극의 순간부터 백성들이 덕만의 기반이 되었음을 극은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장면이 바뀌고, 마야가 공주 옷을 입은 덕만 앞에 눈물을 보인다.
“이리도 고운 내 딸을. 이리도 고운 공주를. 여인으로 이리도 어여쁜데.”
“천명의 몫까지, 공주로서 모든 것을 누리게 해 주겠다.”
덕만이 감흥 없는 표정으로 답한다.
“황후님. 저는 여인으로 행복하게 살기 위해 궁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공주로서 누리기 위해 궁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버리고 왔사옵니다. 언니, 천명 공주님께도 맹세했습니다.”
마야는 덕만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덕만은 예쁜 꽃으로 살기 위해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미실을 이기고 신라를 먹을 거라는 어린 다짐은 이제부터 크기를 불려 나갈 참이다. ‘딸’과 ‘공주’라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어여쁜 여인’이라는 프레임에 가두고 괴롭히는지. 덕만은 왕의 딸, 나라의 공주라는 이름이 대를 이을 후계, 차기 군주의 이름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다.
다시 한번 장면이 바뀌고, 이번엔 덕만이 죄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진평과 대면하고 있다.
“원망하느냐.”
“예. 폐하.”
“그럴 테지. 그랬겠지. 허나 이해해 다오.”
“예, 폐하. 이제 이해합니다. 폐하시니까. 군주의 자리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군주는 패업을 위해 자식도 버릴 수 있어야 하니까 이해합니다.”
사람이길 포기하고 패도를 선택한 상태의 덕만은 황실이 무너질 위기에서 저주받은 존재로 태어난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던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한다고 말해 보인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다만, 제가 폐하를 원망하는 것은, 저를 버리시면서까지 가셔야 했던 패업의 길이었다면, 힘을 기르셨어야 합니다. 하여 돌아온 저를 다시 잃지 않으셨어야 하고, 언니 천명을, 잃지 않으셨어야 합니다.”
진평이 그동안 한 일이 있다면 그저 나라에 남은 유일한 성골 남자로 왕좌에 앉아 미실이 명분을 쥐기까지만 기다리고 방관하던 것뿐이다. 덕만은 “언니 천명공주 대신 미실과 대적할 것”이라고 진평에게 분명히 선언하며, 왕좌에 앉아 있다는 명분만 쥔 채로 무력한 왕과는 다른 군주가 되기를 꿈꾸는 그 시작점을 곧장 실행한다. 당신이 도대체 미실과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을 던진 월천에게 했던 대답, 다시 말해 어떤 왕이 되어 어떤 시대를 준비할 것인지를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다.
덕만이 준비한 것은 ‘첨성대’이다. 그는 신국을 위해선 황실이 신권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미실에게서 뺏은 신권을 자신이 갖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백성들에게 주는 것을 택한 것이다. 이는 곧 제사와 정치가 분리된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설득이 된다. 과학을 백성들을 현혹하는 데에 쓰는 정치를 끝내자는 설득 말이다. 이렇듯 덕만은 백성을 환상과 공포를 이용해 다스리는 미실의 시대에 종결을 선언하며, 백성이 직접 힘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군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데에 성공했다.
“신국의 천신황녀로서 공주 덕만은 오늘부로 상천관을 폐하고 천문 기상에 관련된 모든 것을 백성들에게 공개할 것입니다.”
“서라벌 땅에 천문 관측의 기준점이자 모든 백성이 볼 수 있는 책력. 그 책력을 건축물로 지을 것입니다. 이름은, 첨성대라 할 것입니다.”
“이로서 신라인이면 누구나 천기의 운행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앞으로는 천문을 독점해 온 신당과 그 누구라도 더 이상 백성들의 무지를 이용해 불안을 조장하고 사익을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
덕만은 이 마지막 대사를 미실을 똑바로 본 채로 한다. 낡고 늙은 관습의 몰락과 세대교체의 시작을 예고하는 장면인 것이다. 이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고 비담은 마침내 덕만을 자신의 ‘주군’으로 삼겠다 선언하며 무릎을 꿇는다.
유신은 평범한 사람이던 덕만을 사랑했고 닿을 수 없는 위치에 갈 덕만과 함께 하기 위해 연인이 되길 포기했다. 그러나 비담은 이미 큰 사람이 되어 있는 덕만에게 사랑을 느껴 연인이 될 생각도 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게 된다. 자신이 어떤 왕이 되기를 꿈꾸는지 총명한 눈빛을 하고 비담에게 말을 해주는 덕만에게서는 정말 빛이 나는 듯하다. 그 눈을 봐버려서, 그 꿈을 들어버려서. 비담은 앞으로의 긴 세월 동안 그에게 모든 걸 바치게 될 것이다.
“무명 비담. 비담의 주군, 덕만 공주를 뵈옵니다.”
복야회의 산채에서 당신은 이제부터 나의 왕이라 말하며 무릎 꿇던 유신을 따라 하며 어색한 몸짓을 해 보이던 비담은 이제 없다. 그는 자신만의 사랑을 해 나갈 것이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한편, 자신을 그대로 복제한 방법으로 자신을 무너뜨린 덕만의 맹랑한 플레이와 그로 인한 후폭풍을 미실은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미실은 지금 중요한 것은 덕만의 공주 등극을 막는 일이 아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의 수족들은 의아해하지만 미실은 이미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상대등께선 덕만 공주에 대한 추인을 바로 진행하세요. 상대등의 주도 하에 단결된 우리 귀족 연합이 황실의 죄를 덮어주는 인상을 주란 말입니다. 그리고 황실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더 얻어내야 합니다. 백성들이 황실과 귀족에게 내던 6:4의 조세 비중을 5:5로 조정하도록 합니다. 그렇게 얻어낸 성과물로 귀족들을 다시 단결시키고 우리 편이 한 명도 빠져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사는 덕만의 계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미실의 통찰력과 그의 실행력을 버젓이 보여주고 있다. 미실은 미실이다, 하는 말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휘청이는 것도 잠시, 그는 다시 균형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등극의 순간에 백성이 기반이 된 덕만과는 달리 그가 어디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슬픈 대사라는 생각도 든다. 미실은 귀족이고 귀족 세력의 수장 격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가 군주가 되겠다고 나서는 순간 귀족들이 미실을 계속 따를지는 불투명해진다. 명분을 찾아 오랜 세월을 헤맨 미실이기에 단 한 번도 어그러짐 없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최대의 권력을 취해 온 미실이다. 그런 그가 그 자신 자체로 명분이 되겠다 나서는 상황이 오면, 다시 말해 그 자체로 골품제의 어그러짐이 되는 시도를 하면 귀족들이 분열하는 것이 결말일 것이라는 얘기다. 미실은 결국 백성을 땅으로 삼는 군주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을 미리 하는 것만 같은 대사인 것이다. 덕만이 신라를 먹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 ‘미실과 같은 방법’으로 그리하겠다고 선언했다는 것, 미실이 그 자체로 그 방법이 통한다는 증거가 되므로 덕만은 아주 똑똑한 수를 준비한 것이라는 얘기를 전편에서 했었다.
“난 신라의 왕이 될 겁니다. 미실이 신라를 차지한 방법, 그대로.”
이 대사 역시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슬픈 것이 되고 만다. 같은 방법인데도 덕만은 왕이 되고 미실은 그러질 못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너무 뚜렷하다. 성골이라는 명분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태어난 근본을 뒤집을 수 없었기 때문에. 천명이 죽고 나서 장례식이 치러질 때 마야가 미실에게 저주를 퍼붓는 장면이 있다.
너도 죽을 것이라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석도 없이 흔적도 없이 죽으리라. 하여 역사엔 네 이름 한 글자도 남지 않으리라.”
이때 미실의 표정은 어이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기분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그의 표정에는 슬픔과 체념 그리고 두려움이 읽힌다. 그 대단한 미실이 비석도 흔적도 없이 죽으리라는 저주에 꼼짝도 못 하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기 때문에. 신국의 최고 권력자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골이 아니고 남성이 아닌 미실은 아무런 이름을 쥐지 못한 채 그저 진흥의 후궁으로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지키고자 애를 써 온 미실은 다음 꿈을 쉽게 꿀 수가 없고, 그 벽을 끝까지 넘지 못한다. 이는 미실도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인데, 덕만이 공주로 등극하는 날 이 부분이 극적으로 표현된다.
적수가 이름을 되찾는 날. 그 아이가 태어난 날과 똑같이 유리잔을 연주하다가 미실은 이내 평정심을 잃고 잔을 다 깨버린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덕만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데, 대화의 흐름이 미실을 심연으로 데려다 놓는다.
“공주가 되신 것을 감축드리옵니다.”
“새주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제가요?”
“일을 도모하는 내내, 새주의 말 하나하나를 떠올렸습니다. 그 말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일을 진행하니 천신황녀가 되더이다. 그 덕으로 공주도 되고요.”
덕만은 미실의 방법으로 미실을 골려준 상황을 약 올리듯 이야기하는데, 미실 앞에 떨리는 입술과 손을 감출 수는 없었다. 미실이 그것을 금방 눈치채더니 덕만의 손을 덥석 잡고 모욕을 주려 한다.
“어찌 그러십니까. 아직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신 겁니까.”
그런데 덕만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엄하구나. 어디 감히, 성골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냐.”
미실은 그대로 굳고 덕만은 손을 빼 그대로 미실을 지나쳐 간다. 이것은 미실이 결국 못 넘는 그 하나이다. 두 숙적의 운명을 가른 하나. 어린애가 당돌하게도 무엄을 가르치는데도 미실은 화가 난 게 아니라 성골이라는 두 글자에 속이 문드러질 뿐이다.
그리고 성골이냐 아니냐의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이 이뤄가는 정치와 두 사람이 꿈꾸는 미래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만다. 첨성대 건립을 선언하며 신권을 포기하고 격물이 정치에 이용되는 오래된 악습을 직접 끊어내려는 덕만에게 미실이 훈수를 두려고 하는 장면이 있다.
“세상을 종으로 나누면 이렇습니다. 백제인, 고구려인, 신라인. 또 신라 안에선 공주님을 따르는 자들, 이 미실을 따르는 자들.”
“하지만 세상을 횡으로 나누면,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세상을 횡으로 나누면 공주와 전 같은 편입니다. 우린 지배하는 자입니다. 미실에게서 신권을 뺏으셨으면 공주님께서 가지세요.”
미실은 신권을 포기하는 것으로는 정치를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신권 없이, 계산될 뿐인 하늘을 홀로 알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 없이, 무엇으로 왕권을 세우고 조정의 권위를 세우며 무엇으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냐는 말로, 미실이 덕만을 다그친다. 덕만은 ‘진실’이라고 답한다. 과학은 본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이를 이용해 개인이 천기를 운행하는 듯한 환상을 만들어낸 미실이 잘못되었다 말하는 것이다. 미실은 바로 그 환상을 백성이 원하며, 그들은 가뭄에 비를 내리고 흉사를 막아주는 초월적인 존재를 원한다고 답한다. 미실이 줄곧 군림해 온 세계와 시대는 이런 것이다. 지금껏 한 번도 틀린 적 없던 방식이다. 덕만은 백성은 환상이 아니라 희망을 원하는 것이며,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자신이 그들에게 줄 것이라 말한다. 이에 미실은 누군가 비를 내려주고 누군가 일식이란 흉사를 막아주면 그만인 무지하고 어리석은 존재들에게 안다는 것이란, 지혜를 갖는다는 것이란 고통스럽고 피곤하고 괴로운 일이라고 말하는데, 덕만은 희망은 그런 피곤과 고통을 감수하게 한다고 받아친다.
“희망과 꿈을 가진 백성은 신국을 부강하게 할 것입니다. 저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그런 신라를 만들 것입니다.”
“공주님, 미실은 백성의 환상을 이야기하고 있고, 공주께선 백성들의 희망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허나 그 희망이라는 것이, 그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가장 잔인한 환상입니다. 공주께선 이 미실보다 더 간교합니다.”
지배하는 자가 지배당하는 자와 함께 꿈을 꾸겠다는 그 말이 오히려 더 위선적이고 덧없이 껍데기만 있는 무언가일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덕만이 희망과 진심을 운운할 수 있는 이유 자체, 미실처럼 술수를 부리지 않고 단지 진심만을 쏟을 수 있는 조건 자체가 그가 성골이라는 근본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미실 역시 덕만의 답에 화가 난 듯 보인다. 언젠가 천명이 미실에게 ‘전 술수 따위 알지 못합니다. 단지 진심을 다할 뿐이옵니다’라는 말로 그의 심기를 달래려고 들었을 때, 미실은 가지고 태어난 것들 때문에 진심이기만 하면 되는 아이, 술수를 몰라도 되는 그 아이를 보며 잠자코 웃기만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천명과 똑 닮은 쌍둥이 동생을 보며 미실은 이제 슬슬 자극을 느낀다.
그리고 덕만의 말들이 웅대한 계획인 듯 얘기하지만 허황되기 짝이 없다고, 철이 없는 순진한 생각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미실은 언젠가 제사와 정치가 분리되고 격물이 발전해 환상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올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지만, 그 시대가 절대 지금은 아니라는 것 역시도 정확히 알고 있다. 법흥제가 불교를 일으킨 지가 100년이 넘어가는 시점이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하늘과 땅과 자신의 조상들에게 복을 빌며 지내고, 백성들은 하늘과 자신을 연결시켜 주는 존재로 미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 무작정 달려들어 판을 바꾸려 드는 덕만은 거대한 벽에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시도를 하는 것에 다름없다.
하지만 과도기를 손수 만들어놓는 덕만을 철없다 생각하면서도, 미실은 과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덕만의 젊음과 배포를 아주 정확한 방식으로 부러워한다. 자신이 구세대의 인물이고 덕만의 신세대의 인물이라는 것을 미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덕만이 자신보다 앞설 수밖에 없는 부분들이 미실에게는 뚜렷이 보이는 것이다. 덕만은 미실과 이야기를 나눈 후 유신에게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마치 오래전부터 고민하고 생각한 것처럼 대답이 나오더라고 신기하다는 평을 남긴다. 아마 그는 백성에게는 환상이 아니고 희망과 꿈이 필요하다는 생각들을 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에게 질문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말로 구체화하지 못했을 뿐. 미실을 만나서, 적수인 동시에 스승인 그를 만나서, 덕만은 점점 명확해지고 뚜렷해진다.
세대가 교체되는 싸움에서, 어른과 아이의 싸움에서 어른은 질 수밖에 없다. 아이가 다음 어른이 되므로. 아이는 어른으로부터 본받을 점은 물론이고 악취 나는 것들까지 전부 배운다. ‘저런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은 인류를 진보시켜 오지 않았는가. 미실은 신권을 놓을 수 없지만 덕만은 그것을 기꺼이 포기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는 어른을 보고 성장과 발전의 틈을 마구 만들어놓지만 어른은 아이보다 먼저 반짝거리는 생각을 할 순 없다. 덕만은 미실을 통해서 더 강해질 것이라 다짐하며 그로부터 최대한 많은 것을 흡수하려 하는 반면, 미실은 덕만에게서 배우려 하지는 않는다. 더 이상 질문을 받지 않는 막강한 세력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구도 속에, 누가 승리할지는 사실 뻔하다.
그러나 이들의 싸움을 단순한 세대교체만으로 설명하기 힘들어지는 지점이 있다. 미실이 가지고 태어난 것들만으로는 그 정도의 위치가, 그 정도의 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실의 ‘지금까지’란 누군가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무너지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애써온 세월이고 그래서 귀를 닫은 투쟁이기 때문이다. 꿈을 꾸며 반짝이는 덕만을 눈앞에서 보고 난 후, 미실은 설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왜 저는, 성골로 태어나지 못했을까요. 제가 쉽게 황후의 꿈을 이루었다면 그다음의 꿈을 꿀 수 있었을 텐데. 이 미실은, 다음 꿈을 꿀 기회가 없었습니다.”
미실이 결코 가질 수 없던 것, 그래서 오랜 세월을 방황하게 만든 것을 덕만은 이미 쥐고 있다. 자신이 준비할 수 없는 세상에만 성립하는 자신의 꿈을 오래도록 찾아 헤맨 사람. 미실은 덕만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명분을 쥐지 못했음에도 신라의 최고 권력을 손에 넣은 미실이다. 미실이 지켜온 세월은 굳건하다. 새로운 시대가 움트기에 역부족일만큼.
화백회의에서 첨성대 건립이 가결된다. 귀족들이 반대해 올 것을 예상한 덕만은 동그랗게 놀라고 미실은 미소를 짓는다. 덕만이 미실에게 찬성하실 필요는 없었을 텐데 무슨 뜻이냐고 묻자, 미실은 반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답한다. 고민에 빠진 어린 얼굴을 쳐다보는 미실. 미실은 덕만이 모순에 빠져 머지않아 고꾸라질 것을 알고 있다. 그 꼴을 볼 생각에 미실은 그토록 혐오하는 ‘시정 잡배들’마냥 씩 웃어 보인다.
“덕만공주는 일식을 이용해 천신황녀의 자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천신황녀의 지위를 이용해 이 일을 하고 있어요. 스스로의 힘을 부정하는 일 말입니다.”
덕만이 백성들에게 지혜를 주기 위해 건립한 첨성대지만, 백성들은 그것을 새로운 천신황녀가 새로운 신당을 짓는 것이라 받아들인다. 귀족과 대신이 모두 나오지 않은 초라한 개공식 현장에서는 덕만이 다짐한 대로 백성들의 말을 듣기 위해 다가가는데, 사람들은 여기 신당에 매일 올 테니 아들을 점지해 달라, 어머니 병을 고쳐달라, 아들 눈을 고쳐달라 빈다. 덕만이 하려는 일은 모두 질긴 관습의 나라의 판 자체를 뒤엎는 일, 사람들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다. 그가 전하려는 뜻은 자주 곡해되고 때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미실은 덕만이 스스로 과도기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지만서도 어쨌든 과도기에서는 아직 덕만이 승리할 수 없다는 걸 파악한 것이다. 이 잔인한 어른은 어린애가 스스로 만들어 갇힌 모순을 짚어내주지 않고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볼 생각이다. 덕만은 이 모순을 뚫어내는 답을 또 한 번 찾아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은 덕만과 미실의 싸움은 성골과 진골의 싸움, 구시대와 신세대의 싸움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 정치인 간의 싸움이라는 점이다. 덕만은 미실에 대해 어렸을 적 읽은 서역의 영웅전의 인물이 튀어나온 것 같다는 귀여운 평을 남긴다. 새주랑 더 얘기하고 싶은 마음에 새주가 오래 사시면 좋겠다는 말을 직접 그에게 하기도 한다. 오래 살라는 덕만의 말을 듣고 미실은 설원에게 이런 평을 한다.
“저에게 신권을 빼앗가 가고 천신황녀의 지위를 떨어뜨린, 죽여도 시원찮을 그 아이를 안아줄 뻔했습니다. 문노에게 빼앗기지 않고 쌍둥이만 아니었다면, 제가 키웠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죽여도 시원찮을 그 아이를 안아줄 뻔했다는 대사를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한다. 미실과 덕만의 관계성을 그대로 나타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실에게서 덕만이 배우고 흡수하는 지점들과, 진심으로 지혜를 구하는 덕만이 기특하다는 듯 웃어 보이는 미실의 표정을 우리는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사이는 미실의 투심(妬心)과 덕만의 투심(鬪心) 간의 질척한 경쟁으로도 읽히지만, 미실이 자신의 시대로 덕만의 것을 열어주는 스승과 제자의 사이로도 읽히는 것이다. 미실이라는 여성 정치인이 존재했기 때문에 성골 신분이기까지 한 덕만이 왕이 되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 된다. 아주 먼 훗날, 결말이 정해진 싸움에서도 굽힐 수 없어 완연한 죽음을 맞을 미실 앞에, 덕만은 고개 숙여 예를 갖출 것이다. <1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