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 리뷰 13편 : 31부~33부
62부작의 절반을 지나는 시점이 되어, 칠숙과 소화 그리고 문노까지 모두 세월을 돌아 궁으로 복귀한다.
먼저 소화의 경우 미실이 칠숙에게서 그를 떼어놓으려는 목적으로 빼돌려졌으나 을제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는 것까지가 마지막 행적이었다. 이 즈음이 되어 미실이 그를 죽여 치우라는 명을 내리고, 미실 휘하의 화랑들이 소화를 쫓게 된다. 그 과정에서 소화는 평생을 도망쳐 살아온 사람답게 그들을 피해 덕만의 첨성대 개공식 행사까지 흘러들어 가게 된다. 동시에 소화를 계속 찾고 있던 칠숙과, 덕만을 살펴보려 현장 가까이에 있던 문노가 마주하게 되며 십여 년 전의 삼자대면이 다시 그려진다. 그리고 그 삼자대면의 이유가 되는 덕만이 소화를 보게 되고, 두 사람이 눈물 속에 재회한다. 덕만은 모래가 엄마를 죽인 줄 알았다며 서러워 운다. 공식적인 정치 데뷔전이나 마찬가지였던 개공식 행사가 처참했음에도 덕만은 가장 큰 위로가 될 선물을 받게 되었다.
덕만의 곁으로 돌아가게 된 소화를 칠숙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그날 밤 궁에서 잠깐의 대화로 그간 함께 해 온 방랑에 매듭을 짓는다.
“나를 보고 놀란 걸 보니 사막에서의 일이 생각이 난 모양이구려.”
“살려주셨고, 여기까지 절 데려오셔서, 공주님을 뵐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우리 둘 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구려.”
“예. 전 폐하와 공주님의 시녀로.”
“난, 미실 궁주의 무사로.”
이렇게 서로에게 긴 세월 잠시 머물다가 다시 엇갈리는 두 사람인 것이다. 어긋나는 인연이라야 제자리라니 참으로 기이하고 구슬픈 연이다.
소화가 덕만의 유모로 황실로 돌아갔다는 소식과 그 과정에 문노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까지 전부 미실의 귀에 들어간다. 문노가 돌아왔다는 것은 미실에게 아주 큰 문제이다. 지난날 덕만과 천명이 문노를 찾으며 서로를 알게 될 때 미실 역시 자신의 아들을 보내 문노를 찾아 죽이라는 명을 내렸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는 중요한 순간마다 황실을 돕는 문노와의 악연을 끝내려는 기회를 미실이 계속 노리고 있었고, 미실에게 문노는 살아있으면 안 되는 자라는 설명을 하고 넘어갔었다. 이제 그 이유를 조금 더 파헤치고자 한다.
문노와 미실의 사이는 단지 황실을 돕는 자와 황실을 무너뜨리려는 자의 대결 정도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어린 시절 진흥이 직접 키워낸 인재들이라는 인연으로 묶인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미실의 대사에 따르면 이들은 진흥의 명으로 화랑의 체계를 잡는 일을 함께 했다. 또 미실이 진지왕을 폐하던 일에도 문노는 뜻을 보태었고, 가야 출신인 문노가 진골이 될 수 있게 하는 데 미실이 자신의 친척과 결혼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니 미실에게 문노는 어린 시절을 화랑으로 함께 보낸 친우이자 뜻을 같이 하는 든든한 정치적 동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지왕 폐위 때에 미실의 뜻대로 하라는 말을 설원을 통해 전하긴 했지만 문노가 아예 이 일에 뛰어들었던 것이 아니기도 하다. 그때부터 무언가 삐걱거렸던 것일까. 미실에게 대적할 자가 북두의 일곱 별이 여덟이 되는 날 올 것이라는 진흥의 예언을 전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문노는 덕만으로 자랄 쌍둥이 공주 한쪽을 빼돌리며 미실에게 본격적으로 등을 졌다. 그렇다면 미실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 온 문노가 자신이 아닌 황실을 택했기에 그 배신감으로 사무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뛰어난 자일수록 죽이는 것이 아니라 꼭 같은 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미실의 지난 말을 생각해 보라. 그 원칙대로라면 미실은 문노를 사로잡기 위해 애를 써야 하는 것이지만, 미실은 문노를 갖고 싶은 것이 아니고, 그를 죽이고 싶은 것이다.
문노는 미실과 함께 화랑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원화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미실은 남성의 영역으로 굳혀진 화랑도에서 더 이상 설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인첩’이 되는 방법으로 궁에서 살아남았다. 그가 살아남으면 살아남을수록 신라를 먹어치우면 먹어치울수록 그에게 쏟아지는 말은 ‘악녀’와 같은 것이었다. 반면 문노는 어떠한가? 문노는 진흥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선인이라는 의미의 ‘호국선’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온 화랑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어갔다. 문노가 누구의 편도 되지 않고 속세를 떠나는 선택을 한 뒤로도, 세상은 문노가 태백산 신선이 되었다는 말을 떠들며 그 명성을 알아서 이어가주었다. 그런 문노가 돌연 나타나 손을 들어주는 쪽이 덕만이라면, 문노라는 이름 하나로도 덕만이 가진 힘은 걷잡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문노가 대놓고 미실의 적이 된다면, 진흥의 후손인 진평을 위협하는 간악한 여자로 프레이밍 되는 미실은 어쩌면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 무려 국선이 미실에 등 돌리며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그 하나로 미실의 모든 것이 흔들릴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이 누구를 더 믿어줄지, 슬프게도 너무 뻔하지 않은가. 화랑도에서 영원히 배제되던 순간, 그래서 누구는 국선이 되는데 누구는 인첩이 되는 길을 선택해야 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야금야금 세상을 먹어치워 온 미실이지만, 그 순간이란 것이 사실은 멈춘 적 없이 지금껏 이어져왔다는 듯 큰 위기를 맞이해 버렸다. 일식 사건에서 덕만을 도우며 자신 앞에 섰던 비담이 바로 문노의 제자였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문노가 이미 진작부터 덕만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왔다는 것인지 의심되어 미실은 아주 불안해한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덕만 공주를 돕기 위해 (문노가) 화랑으로 복귀한다면 이는 첨성대를 짓는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화랑. 국선이 나타나면 화랑들이….”
이에 미실은 칠숙의 자리보전은 물론이고 그를 통해 화랑도를 미리 장악해 두기 위해 칠숙에게 ‘원상화’가 되라는 명을 한다. 원상화란 화랑 출신으로 화랑들의 무술 등의 스승이 되는 자로 소개된다. 미실이 망설이는 칠숙에게 이렇게 말한다.
“국선이란 허명으로 문노가 화랑에서 너무 크게 자리 잡았다 생각지 않느냐?”
“네가 국선보다 못할 게 무에야.”
소화를 쫓는 과정에서 문노에게 칼을 맞아 피를 뚝뚝 흘리던 젊은 날의 칠숙을 떠올린다면 그가 문노에 대해 갖는 증오와 열등감을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실 역시 이를 자극해 칠숙이 원상화의 자리를 수락하게 만들려는 뜻에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나, 사실 국선을 무려 ‘허명’이라 부르고 그것이 과하다고 평하는 것에서, 미실은 그동안 몸체가 사라진 지 오래임에도 화랑도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한 문노의 이름을 스스로 줄곧 의식해 왔음을 슬프게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슬프게도, 미실 혼자만의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이 아니다. 미실의 지원 아래 화려한 원상화 등극식이 이루어져야 하는 날, 행사를 난장판으로 만들며 문노가 등장한다. 미실은 다 뛰어넘었다고 생각했고 지나온 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어린 날의 라이벌에게 왜 여길 또 왔냐는 물음을 하고 싶은 듯한 얼굴로 그를 맞이한다. 문노는 너무나 평온하게도 이렇게 말한다.
“지나던 길이었습니다만 오늘 원상화의 등극식이 있는 날인가 봅니다. 아직 저의 자리가 비어있어 다행입니다.”
정말로 화랑도의 행사에서는 태백산 신선이 되어 나타나지 않을 문노의 자리를 매번 남겨두고 있었다. 존경의 표시로 그를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서. 즉, 미실은 문노가 없는데도 문노와 줄곧 싸워야 했다는 얘기다. 자신은 철저히 배제시킨 영역에서 국선의 이름을 얻은 사람, 그래서 궁을 떠났는데도 궁이 기다리고 기억하는 사람, 궁을 거의 다 먹어치웠는데도 끝까지 고고하게 남아있던 이름. 평생의 무력감을 절대 알 리가 없는 고고한 성품으로 자신에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거는 이 사람. 문노는 자신의 방황이 끝났다며 곧 있을 풍월주 비재를 자신이 주관하겠다 선언한다.
미실은 문노가 비재를 주관하겠다고 하는 것을 굳이 말리지 않는다. 이는 설원의 조력에 의한 것이다. 설원은 사다함의 매화 에피소드 때는 미실에 대한 욕망과 그가 자신과 공유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조급함을 드러내며 신하로서는 아주 무례한 태도를 고집했다. 충실한 신하인 동시에 그의 연인이고도 싶어 균형을 맞추지 못했던 것이다. 자주 가차 없고 가끔 기대어서 그렇게 모든 걸 빼앗는 미실에게, 설원은 젊은 날 이미 모든 걸 바치기로 결심했지만 그 결심대로는 제대로 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일식 에피소드 때부터의 설원은 미실의 연인이길 마침내 포기하고 충직한 신하로의 포지션을 굳히는 듯하다. 미실의 통찰력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한편으로, 미실의 심기가 설원의 선택들을 결정짓는 전부가 되고 있는 모습들이 자주 보이는 것이다. 이번에도 설원은 문노가 공명정대한 심사를 할 성정의 위인이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아들 보종이 풍월주가 될 것이라는 계산을 갖다 바치는 충실한 협력자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 계산대로 풍월주 비재의 첫 번째 문제를 보종이 수월하게 맞히며 3전 2승을 거두어야 하는 상황에서 1승을 선점한다. 문노가 그를 완벽하다고 평하기도 한다. 미실과 설원은 진흥에게서 함께 받은 수련을 회상하며 웃음 짓는 모습을 잠시 보인다. 진흥이 키운 아이들로 함께 시작한 미실, 설원, 문노 이 세 사람이 마주한 현재는 아주 다르지만 말이다.
한편 문노가 첨성대 개공식 현장에 가는 것을 시작으로 서라벌에 돌아온 것은 앞서 언급했듯 덕만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분명히 짚어두어야 할 것은 이 복귀의 이유는 덕만에 대한 응원이나 도움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덕만을 돕기를 원한다며 떠났다가 돌아온 비담에게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참이었다. 비문을 조작해 공주로 등극할 명분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미실의 신권을 공격해 놓고 그 신권을 가지지 않고 백성들에게 주려하는 덕만에 대해 신이 나 종알대는 비담에 비해, 문노의 표정은 좋지 않다. 문노의 원래 계획은 미실과 진지왕 사이의 아들인 비담을 왕제로 키우고 덕만은 그의 황후로 혼인시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을 소화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화가 미실의 아들과 황실의 공주를 혼인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항주에 가 있으라는 문노의 명을 거역하고 사막으로 갔던 것이다. 이 선택은 덕만을 왕으로 만든 초석이 되었다. 맥락이 완전히 같다고 할 순 없지만 마야가 덕만의 유모로 공식 복귀한 소화에게, 네가 진정 공주-왕이 될 자-로 키웠다는 말을 해주는 장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미실에게 대적할 자의 운명을 타고난 것은 덕만이라는 것을, 그 예언을 직접 받은 자로서 뻔히 알 것인데도 편협한 사고에 갇힌 문노는 인형 놀이를 할 뿐이다. 그래서 비담이 덕만을 왕이 될 주군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가감 없이 드러낼 때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이 어두워진다.
“그런 분입니다. 포부나 배포가 남다른 분이죠.”
“그러니 스스로 왕이 되겠다 선언하지요.”
비담이 마치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얼굴로 자랑스레 말하자 문노가 놀라 되묻는다.
“뭐라? 스스로 왕이 돼? 여인이 아니냐. 공주가 되니 남편을 왕을 만들겠단 얘기겠지.”
비담은 그의 착각을 곧장 짚어준다.
“아닙니다. 스스로요. 스스로 왕이 되어 패도를 걷겠다 했습니다.”
문노는 이 때문에 덕만을 직접 살피러 궁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덕만을 마주해 하는 말을 보면 그가 원하는 것이 아예 덕만을 꺾으려는 것인 듯 보인다. 왕이 되길 포기하게끔 끊임없이 덕만을 종용하는 것이다.
“왕이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신라 왕의 대업은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물론 천명공주께서 그리 되신 것은 저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픕니다. 미실에게 분노하고 있고요. 허나 그 분노가 왕이 되는 동력은 될 수 있으나 그 목표를 이루게 해주진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왕의 자질 중 가장 안 좋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보복을 하려 들 테니까요.”
덕만은 어린 날 그가 아버지인 줄로 알고 무작정 서라벌로 왔었기에, 얼굴도 모르고 그리워한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는 기쁨에 그를 반가워했지만, 공격적으로 나오는 문노에 이내 정색한다.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빙빙 돌려 말하지 말라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저는 공주님께서 왕이 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지금 말씀드린 것은 그 첫 번째입니다. 하여 공주님께 도움을 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끝내 하시겠다면 제게 스스로 증명하십시오. 미실보다 무엇이 더 나으신지를. 제 힘이 필요하다면 말씀입니다.”
문노는 덕만에게 자격을 운운하고 있다. 그런데 성골 남자들은 지금껏 자질을 증명해서 왕이 되어왔단 말인가? 이 논리대로라면 진작에 진평을 폐위시켰어야 하는 것 아닌가. 문노는 그저 미실을 들먹이면서까지 덕만의 기를 죽이려 드는 것이다. 넌 절대 왕이 될 수 없다고.
그런데 덕만은 문노가 낸 풍월주 비재의 두 번째 문제의 답을 가져오며 그에게 반박한다. 두 번째 문제는 ‘신라’라는 국호의 진의 세 가지를 알아오라는 것이었다. 무력 증진과 신흥 세력을 키우라는 두 가지 의미는 전해져 내려오지만 세 번째는 알려진 바가 없던 것이다. 이 답은 ‘삼한일통’, 즉 삼국통일인데, 나라의 대업을 날로 새롭게 하여 사방을 망라하라는 뜻의 ‘덕업일신 망라사방’의 의미를 풀이한 결과이다.
이것은 진흥의 유품이자 현재는 덕만의 소지품인 소엽도에 적혀 있는 것이기에 덕만의 화랑인 유신이 두 번째 비재의 1승을 가져가게 된다. 그러나 덕업일신 망라사방의 진의인 삼국통일은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는데, 이는 발설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뜻으로, 힘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지금의 신라가 꾸면 위험한 꿈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은 그 자체로 왕권의 강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귀족권이 비대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현재의 신라에서는 더욱 은밀한 비밀이 되고 마는 것이다. 비재 현장에서 유신이 밝히지 못한 이 답은 덕만이 문노를 찾아가 직접 전하게 된다.
“그것 때문입니까. 제가 왕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가. 제가 신라 왕의 대업을 이룰 수 없을 거라서요.”
“예.”
“제가 여인이라서요.”
“송구하지만 그렇습니다.”
삼국통일은 결국 전쟁을 통해 이루어질 일이라 생각하는 문노는 여인인 덕만이 이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라 믿는 듯하다. 그런데 덕만이 이 대답을 듣고 피식 웃어 보인다.
“여인의 능력은 인정치 못하시겠다. 그런 말씀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미실의 능력을 보면서 누구도 여인의 능력을 폄하하지 못할 것입니다.”
“헌데요.”
“대업을 이룰 수 있는 무엇을 가지셨습니까.”
대업은 남근으로만 할 수 있단 말인가?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는 나라에서 덕만은 성골의 신분을 갖고 있는데도 문노를 포함한 그 누구도 덕만을 다음 후계로 상상하지 않는다. 귀족권과 왕권 중 무엇이 커져야겠느냐는 덕만의 물음에 문노는 물론 왕권이지만, 여왕은 아니라고 답한다. 백성조차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말하며, 지난 첨성대 개공식 행사에서의 처참한 현실을 덕만에게 잔인하게 비추기까지 한다.
“하늘을 공개하려 첨성대를 지어도 거기서 아들 낳게 해달라고 비는 백성들이 여인인 왕을 이해하겠습니까?”
“그 모든 분란과 조각난 국론을 모아서 대업을 이루신다고요? 그게 되는 일이었다면 왜 공주님이 하셔야 합니까. 우린 이미 역사에서 본 적 없는 위대한 여성 정치가를 갖고 있습니다. 미실이 했어야지요.”
문노는 지금까지 여왕이 한 번도 없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를 지배해 온 틀을 깨겠다는 사람에게 지금까지 그 틀이 지배해 왔으니 안될 거라고 이상한 초를 치는 격과 다름없다. 게다가 미실을 들먹이는 것은 상당히 꼴불견이다. 문노는 미실의 능력을 인정한 것이 아니고 미실이 손에 넣은 권력에 굴복한 자일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에서 본 적 없는 위대한 여성 정치가가 둘이면 좀 어떻단 말인가. 셋이면 어떻고, 앞으로 수만 명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많은 남자들이 역사에서 정치를 독점해 오는 내내 그들은 모두 위대했는가? 상징성 하나 확보했다고 성차별이 없다고 웃어재끼는 꼬락서니와 이것이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문노에게도 덕만은 침착하게 답한다. 분란과 조각난 국론을 어찌 모을 것이냐는 문노의 물음에 ‘분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문노가 덕만을 반대하는 여러 이유 중 가장 첫 번째라고 말했던 바로 그것이며, 덕만은 흔히 히스테릭하고 감정적인 동물이라 폄하되는 여성의 자질을 왕의 자질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분노로 지난 미실의 치세 동안 핍박당해 온 백성들의 분노를 어루만질 것이라 말해 보이며, 조롱에 가까운 반대를 보란 듯 소화해 낸다. 또한 문노가 낸 두 번째 비재 문제 덕분에 길을 찾았다며 모욕을 주려 한 의도를 철저히 뭉개기까지 한다.
“내가 불가능한 꿈을 꾸듯이 신라도 불가능한 꿈을 꾸게 할 겁니다.”
“어떻게요. 무엇으로요.”
“미실의 표현대로라면 천신황녀보다도, 일식보다도, 신당보다도 더 간교한 환상으로요.”
“그게 무엇입니까.”
“희망이요. 신라인이라면, 무인이라면, 화랑이라면 가슴이 벅차올라 모든 걸 감수하고 뛰어들만한 그런 것. 공께서 나는 절대 이룰 수 없다고 한 그것. 신라의 불가능한 꿈. 그런 희망. 삼한일통. 그 희망을 나도 귀족도 백성도 모두 같이 가지도록 할 겁니다. 넓은 영토와 하나 된 땅에서 지금보다는 더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말입니다. 그것이 덕업일신 망라사방의 진의가 아닙니까.”
그렇다. 이것이 덕만이 찾은 왕으로의 길이다. 여자가 왕이 되는 불가능한 일을 덕만이 정말 해낸다면, 삼한일통도 진실된 희망과 꿈으로서 오히려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으로 분위기가 반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패도와 희망을 공생시킬 덕만만이 할 수 있는 계획이다.
돌아온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고, 모든 것은 늘 그랬던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그중 하나는 지난 모든 세월이 만든 벽을 자처하며 미실마저도 막아섰다. 그런데 덕만이 그 벽에 흠집을 내기 시작한다. 균열을 내고 그로 인해 무너질 벽 너머의 다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선언한다.
그러나 덕만도 곧 다치게 될 것이다. 벽에 상처를 낸다는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벽을 부수려 들수록 덕만에게도 생채기가 생기고 굳은살이 박히게 된다는 얘기다. 그것이 덕만을 강한 군주로 만들 것이지만, 덕만은 아직은 그 초입에 서 있는 아이의 마음으로 아파할 것이었다. <1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