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코 부수는 마음

드라마 <선덕여왕> 리뷰 14편 : 34부~36부

by 구일삼

풍월주 비재는 3전 2승을 하는 자가 우승을 가져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스코어는 첫 번째 답을 맞힌 보종과 두 번째 답을 맞힌 유신이 각각 1승씩을 가져간 상황이다. 그런데 보종과 유신 중 결판이 나야 하는 마지막 무술 비재를 앞두고, 비담이 끼어든다. 어찌 된 일일까?






문노가 서라벌로 본격적인 복귀를 한 직후 먼저 돌아와 있었던 소화를 만나던 장면이 있다. 전편에서 밝혔듯 미실과 진지왕 사이의 아들인 비담을 왕제로 만들고 덕만을 그 황후로 만드는 인형놀이가 본래 문노의 계획이었으나, 소화는 황실의 공주를 미실의 아들과 혼인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해 문노를 등지고 사막으로 간 것이었다. 문노는 십수 년 전의 소화의 선택을 잔뜩 다그치면서도, 여전히 그 계획을 이루고자 하냐는 물음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덕만이 살아 돌아온 이상, 또 비담을 자신의 제자로 데리고 있는 이상, 이 계획은 얼마든지 다시 추진될 수 있는 것인데도 말이다. 더군다나 스스로 왕이 되어 패도를 걷겠다 선언한 덕만을 알고도 문노는 그것을 어차피 되지 않을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문노는 왜 이 계획을 망설이는 것인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담이 생각 같지 않구나.”

그렇다. 문노가 생각하기에 비담이 왕의 자질을 가진 자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대화를 전부 비담이 엿듣고 있는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 된다. 그는 자신에게 문노가 실망하게 된 계기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 보이며 ‘그 일’ 때문에 아직도 자신을 멀리하는 것이라 곧장 결론을 내린다. 또 자신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덕만 공주와의 혼인 이야기가 오고 갈 수 있다는 것인지, 자신에 대해서 물음 하기 시작한다.


‘그 일’이라는 것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담이 어린 시절 수십 명의 사람들을 독살한 일이다. 당시 문노는 비담에게 학문과 무술을 가르치는 한편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곳곳에 대해 기록해 둔 ‘삼한지세’라는 책을 준비 중이었다. 신라의 삼한일통에 도움이 될 초석이자 자신이 키우고 있는 비담이 언젠가 왕으로서 이룰 대업을 위한 초석이었다. 어린 비담은 삼한지세를 자신의 것이라 말하는 문노에게 “그럼 모두 제 것이옵니까?”라고 말하며 해맑게 웃어 보인다. 그러다 장터를 홀로 떠돌던 어린 비담에게서 이 책을 뺏는 이들이 나타나고, 비담은 이들의 근거지였던 동굴로 음식을 들고 찾아가 음식과 책을 다시 바꿔온다. 그런데 비담은 그 음식에 초호독을 넣어두었고, 책을 돌려받았음에도 그들이 자신의 책을 뺏어가고 자신을 때린 '나쁜 놈들’이었으니 죽여도 괜찮다는 식의 발언까지 한다. 문노는 큰 충격을 받고, 그때부터 ‘미실의 핏줄’인 비담을 ‘무서워하게’ 된다.

비담이 극 중 첫 등장을 할 때를 기억하는지. 그는 다른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다가 자신의 닭고기를 뭉갰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전부 죽이며 얼결에 덕만을 구해냈다. 옳고 그름, 세상의 이치, 또 자신과 타인의 경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동물적으로 움직이던 그의 성정의 이유가 여기서 확인되는 것이다. 자신의 출신과 배경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다만 문노를 스승으로 알고 자란 것이 전부인 비담에게, 자신의 소유라 이름 붙일 만한 무언가가 생긴다는 일은 곧 그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으로 자라날 씨앗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문노는 양육자로서, 그의 결핍이 곧 상식이 통하지 않는 욕망으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것을 대비했어야 하고 또 그 씨앗이 싹을 틔웠을 때가 오면 속히 잘라내고 비담 앞에 제대로 된 길을 터놓았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 일’ 이후로 비담을 그저 외면하고 그가 무언가를 더 배우려들 수록 그를 자격이 없다며 다그치기만 했다. “전 스승님의 모든 걸 배우고 싶단 말입니다”라고 비담이 애원하는 말을 해도 문노는 오랜 세월 비담을 그저 차단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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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상대가 가진 모든 것이 내게도 있기를 바라는 비담의 애정은 끝내 유기되는 것이다. 그의 마음엔 커다란 구멍이 남게 되었다. 문노와 갈등이 깊어지자 비담이 그에게 “한 번쯤은 따뜻하게 안아주실 수도 있었잖아요"라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장면이 있다. 문노는 그저 자리에 주저앉는다. 비담은 하늘에 대고 크게 울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지만 문노가 따라오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이내 고개를 떨군다.

그리고 비담이 문노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자신의 출신을, 홀로 움직여 알아내게 된다. 자신이 미실과 진지왕 사이의 아들 ‘형종’이며, 그리하여 자신은 문노에게서 유기되기 전에도 이미 한번 황실에서 버려진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무엇에 상처받은 것인지도 모르는 상처받은 눈을 하고 비담은 무언가 결심을 한다. 그는 곧장 덕만을 찾아가 내일 있을 무술 비재를 공주님이 원하는 대로 되게 만들 거라고, 유신이 풍월주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씩이나 버려진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이 몰아치는 고통 끝에 비담이 찾은 답은 다름 아닌 덕만인 것이다. 미실이 버리고 문노가 체념한 아이, 상처받은 그 아이는 두 사람이 모두 포기한 자신을 덕만에게 바치려는 움직임으로 비재에 끼어든다. 그는 이런 식으로 앞으로도 쭉 덕만에게 맹목적으로 움직인다.






국선 문노의 제자이니 화랑들이 치르는 비재에도 참가 자격이 있다며 참가한 비담은 준결승전에서 보종을 누르고 유신과 자신의 결승전을 만들어 보인다. 그리고는 유신에게 일부러 지는 것으로 승부 조작을 하고자 한다. 유신은 화가 나 제대로 하라 말하지만 비담은 너와 공주님이 이뤄갈 대업에 비하면 비재 따윈 하찮은 것이라 속삭인다. 덕만의 곁에서 길을 걷게 될 남자는 비담이 비재를 더럽히는 오욕을 참을 수가 없지만, 덕만의 걸음걸음이 편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하려는 남자에게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 처음부터 비담의 계획은 하나였다. 유신을 풍월주로 만들어 덕만을 기쁘게 하는 것. 덕만이 원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비담은 감히 화랑들의 세계에 끼어들어 비열한 수를 쓰는 것이다. 유신과 덕만이 이루고 있는 촘촘한 정서망을 질투할 만도 한데 비담은 그러지 않는다. 애초에 패도의 초입에 있는 덕만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비담이다. 그는 사사로운 것들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덕만의 곁에 남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상관이 없다. 덕만이 가는 길이 빛날 수 있다면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것이든 그의 가장 옆에 걷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든 그 무엇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승부조작을 하려 드는 비담의 움직임을 국선 문노와 원상화 칠숙이 못 알아볼 리가 없다. 결승전은 무효가 되고 비담은 승부조작 혐의로 인해 바로 탈락한다. 그리고 회의 끝에, 유신이 칠숙을 상대해 10번의 공격을 막아낸다면 유신이 승리하고 풍월주가 되는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결론이 난다. 만약 막아내지 못한다면 각각 1승을 거뒀던 유신과 보종 중 투표를 통해 풍월주가 결정될 것이었는데, 사실상 풍월주 부제까지 하고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받아온 화랑인 보종이 풍월주가 되는 것이 확실시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너무 많은 대결을 겪은 뒤이기 때문에 유신은 일어서서 칼을 잡고 있는 것도 대단하다고 할 정도로 지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칠숙이 가차 없이 공격을 휘두르는 걸 맞고 쓰러지고도 유신은 악바리처럼 다시 일어나 눈을 부릅뜨고 덤빈다. 덕만은 그만하면 됐다고, 이제 쓰려져도 된다고 속으로 애원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 말이 들리기라도 한 것인지 만신창이가 된 유신이 한동안 일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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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보종이 유신에게 버텨내라며, 쓰러지지 말라며 소리를 친다. 이에 화랑들이 모두 동요하고 유신을 응원하기 시작하며, 유신은 결국 마지막 열 번째 공격을 받아내면서 칠숙의 급소에 일격을 가하고 혼절한다. 마지막 일격을 눈치채지 못한 현 풍월주가 유신이 패배했다 선언하려는 것을 두고 칠숙이 그를 말리며 좌중을 향해 외친다.

“나의 패배요. 유신랑의 마지막 일격이 이곳에 닿았소. 진검이었다면 명치를 꿰뚫었을 것이오. 원상화 칠숙이 패했소. 유신랑의 승리요.”

이 장면에는 화랑의 정신이 3가지나 담겨 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유신과, 유신이 버텨내지 못하면 자신이 풍월주가 되는데도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것이 될 거라 믿어온 자리를 유신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소리친 보종과, 보종이 풍월주가 되는 것이 자신이 모시는 이에게 득이 되는 일임을 알고 있는데도 패배를 인정하는 칠숙까지 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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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런 표정으로 지켜본 ‘원화’를 보면, 보종과 칠숙이 왜 그리 했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미실은 그들에게 그것이 화랑의 정신이라고 가르친 사람이었을 것이다. 미실은 그런 어른이다. 권력과 야욕과 계략을 떠나서, 신국을 사랑했고 그 근간을 자랑스러워한 화랑. 미실은 자신의 생의 마지막에 서서 화랑의 노랫말을 뱉을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미실이 유신을 얼마나 탐내고 있을지 감이 좀 잡히는가.

사실 미실은 진작부터 김서현과 김유신이 탐이 난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김서현과 김유신을 수집하려는 욕심을 대놓고 내비치기도 했고, 무려 월식을 이용해 김서현 가문을 손에 넣으려고도 했었다. 심지어 이번 무술 비재 전에는 유신을 직접 찾아가 응원하기까지 했다. 어리둥절한 유신에게 미실은 팽팽한 싸움을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와 다음의 이유를 건넸다.

“아직도 전 유신랑과 적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언젠가 천명이 아닌 자신의 사람이 되라는 미실의 말에 유신은 나의 시신을 가지는 것만이 당신에게 유일한 방법일 것이라는 발칙한 답을 했었다. 자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유신을 보며 미실은 그를 기특하게 생각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는데, 이번에 칠숙의 10번의 공격을 버텨내는 유신의 근성을 보고도 미실은 마찬가지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고, 그래서 탐이 난다는 얼굴. 미실은 풍월주가 된 유신을 더더욱 가져야겠다 판단한다. 그리고 풍월주 최종 재가 회의에서 유신의 발목을 잡는다. 설원이 복야회 관련 혐의가 있던 가야 유민의 상당수가 김유신 가문의 땅에 있음이 병부의 추적 결과 밝혀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실의 수는 지난번 월식 때와 언뜻 비슷해 보인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발목을 분질러 넘어지게 만든 다음, 내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월식 때는 가야 유민들이 김서현 가문에 등을 지게 만들어 정치적으로 고립될 김서현 가문을 손에 넣으려 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지난 수는 기어코 고립을 택해야 한다고 나선 유신에 의해 무효화되었고, 미실은 당연히 다른 계산을 해내었다. 지금은 아예 가야 유민들을 인질로 삼은 상황이다. 미실은 지금, 유신이 자신을 택하지 않는다면 가야 유민들에게 복야회 혐의를 물어 모두 죽이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신의 의지는 확고하다.

“전 풍월주를 못한다 해도 가야를 파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원은 만약 유신이 복야회 수장의 목을 가져온다면 유신에게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며 결코 가야를 팔지 않을 유신의 곧은 성정을 놀리듯 자극한다. 덕만은 복야회 수장을 대충 꾸며 내놓자고 말을 하고, 유신은 절대 안 된다 반대한다. 누군가를 내놓는다면, 그다음에 또 누군가를 내놓아야 하는 일이 반복되기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공주님. 그 의미를 모르셔서 이러시는 겁니까. 설지를 내놓는다면 복야회와 가야 유민들을 연결시킬 것이고, 그래도 제가 굽히지 않는다면 압량주의 가야 유민들을 반란군으로 한 명씩 몰기 시작할 거고, 그래도 제가 굽히지 않는다면 하나씩 하나씩, 저의 백성들이 하나씩 하나씩, 역모의 혐의를 쓰고 죽어갈 거란 말입니다. 저의 백성들을 공주님의 백성으로 봐주십시오. 공주님께선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백성을 그리 내놓으실 겁니까.”

군주가 되는 길의 초입에 서 있는 덕만은 신하로서만 자신을 대하는 정인이 야속하기만 하다.

“허면 제가 유신랑을 내놓아야겠습니까. 제가 말을 하지 않았다 하여, 유신랑에 대한 마음이 작아 보입니까.”

“이것은 공주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설마 군주가 되는 일을 쉽게 생각한 건 아니겠지요. 백성을 아끼는 것을 설마 구휼이나 하고 폭정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요. 군주는 자기의 본을 파는 일이 있더라도 백성을 지켜내야 합니다. 또한 백성은 다른 나라의 백성 만 명을 죽여서라도 자기들을 지켜주는 군주를 원합니다. 전 그리할 것이고 공주님께서도 그리하시길 요구합니다.”

“저는요. 저는요?”

“혼자 가셔야 할 길입니다.”

마음을 둘로 나누지 못하는 유신은 덕만이 택한 군주의 길을 함께 걷기 위해 그를 연인이 아닌 주군으로 삼았다. 더군다나 유신이 부마가 되어 덕만과 함께할 수는 없다. 가야계 인사가 공주의 남편이 된다면 성골 여왕을 받드는 파격과 부마가 왕위에 오르는 관행이 저울질되는 사이에 신라계와 가야계 사이의 내전이 발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삼한을 하나로 만드는 대업을 위해 달려가야 할 신라에 무조건 독이다. 그렇기에 유신은 이미 가야계를 이끌어야 하는 동맹의 수장으로서 덕만이라는 군주를 택했다. 덕만에게 자신과 가야계, 그리고 나라의 대업을 맡긴 유신은 미실에게 자신을 내줄 수 없는 덕만의 마음을 끝내 받아주지 못한다. 그래서 그 마음이 갈 곳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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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비담은 어떤 후폭풍을 맞이하고 있을까. 상술했듯 그는 풍월주 비재 결승전의 승부 조작 혐의로 탈락했고, 그것이 덕만이 원하는 대로 유신을 풍월주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유신과 덕만을 욕보일 뻔한 상황이었다는 것에 틀림없었다. 이에 대해 비담은 아예 덕만의 외면을 받을 위기에 처하고, 덕만을 찾아가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 무릎 꿇고 애원해 보인다. 덕만은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사과를 받아들이지만, 덕만의 시선은 혼절한 유신만을 지켜보느라 한 순간도 비담에게 가지 않는다. 비담은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욕심내지 않는다. 쓸쓸한 얼굴을 하고도 말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에피소드를 통해 비담이 자신이 미실의 아들인 것을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드러내지 않고 혼자 간직한다. 그렇다면 미실은 이를 알고 있는가? 미실이 직접 말을 통해 인정하기 전까지 작중의 분위기는 내내 애매하게 유지되긴 하지만, 아마 처음부터 미실은 알아차리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미실은 문노와의 독대에서, 당신이 데려가 키운 내 아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는 물음을 굳이 하지 않는다. ‘형종’이라는 이름을 지어두었던 그 아이가 혹시 당신이 제자로 데리고 있다는 그 ‘비담’이라는 아이인 것인지 묻지 않는 것이다. 설원이 비담이란 아이가 신경 쓰인다면 은밀히 조사해 볼지를 묻는데, 미실은 버린 아들에 관심 없다, 미련 따위 두지 않는 게 나라는 사람인 것을 알지 않느냐, 쓸데없는 짓 말라는 말을 할 뿐이다.

비재가 끝난 후에 미실이 비담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번 네 놈의 계책엔 어떤 사욕과 과시가 보이더구나. 마치 어린 소년이 좋아하는 여인에게 날 보아달라, 난 널 위한 거라면 뭐든 할 수 있다, 하는 뭐 이런 거. 아니면 내게 관심 좀 가져달라 부모에게 투정 부리는, 뭐 그런 거.”

미실은 잔인한 웃음으로 비담을 흔든다. 그는 우선 덕만이 비담의 이유이자 약점이 되었다는 것을 곧장 알아차렸음을 드러냈다. 또한 부모에 대한 은유는 자신을 향한 것인지 문노를 향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둘 다를 의미하는 것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은 채로 그저 비담이 상처받도록 유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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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에게 비담은 그저 지금까지를 걸어오는 길에 만들어진 우연한 부산물일 뿐이다. 그리고 특히나 지난날의 실수이자 과오이다. 자신을 배신할 진지왕을 통찰해내지 못한 젊은 날의 한 끗이 만든 부수적 조각. 눈앞에 있어 좋을 게 없는 과거. 비담은 있는 대로 전부 꿰뚫려서 찰나에 상처받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미실은 거슬린다는 표정만을 남기고 그를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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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는 가르칠 것이 너무 많다며 비담에게 떠나자고 말한다. 그런데 문노가 풍월주 자리를 포기하고서라도 가야 백성을 지키겠다는 결심을 하는 유신을 삼한지세의 새 주인으로 다시 삼았다는 것을 비담이 알게 된다. 비담은 이제야 질투에 휩싸인다. 문노에게서 애정은 포기한 지 오래인 비담은 그의 인정이라도 받고 싶어 했지만 그것마저 유신에게 빼앗긴 것이기 때문이다. 비담은 삼한지세의 주인이 왜 자신이 아니냐고 묻는데 문노가 이렇게 대답한다.

“넌 그런 놈이니까. 미실처럼.”

이 말이 비담을 또 어떤 식으로 망칠지 정녕 모른단 말인가. 이 모진 말을 끝으로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유신이 결국 미실에 무릎 꿇는다. 덕만이 모든 걸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그걸 빤히 쳐다보며 미실이 유신과 대화를 이어나간다.

“무슨 의미입니까.”

“살려달라는 의미입니다.”

유신은 꼬박 하루가 걸려 자신을 막다른 골목에 밀어 넣은 미실의 계산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무릎을 꿇은 참이다.

“이제야 제 그릇의 크기를 인정하옵니다. 제 그릇에 차고 넘치는 것은 버리려 합니다. 하여, 이제 새주님의 품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미실이 소리 내어 웃는다.

“내 품이라. 내 품? 내가 젊었더라면 직접 품었을 것을. 이리도 안타까울 때가 있나.”

이미 무릎까지 꿇은 상태인 유신을 되는 대로 희롱하며 모욕을 주는 것이다. 하루 종일을 고민하면서 자신을 애타게 만들었던 그 고결한 자존심을 제대로 꺾어놓으려는 의도일 테다. 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지켜보고 있는 덕만에게도 충분히 모욕이 된다.

“하면 유신랑과 나 이 미실의 정의 징표로 우리 가문의 영모와 혼인을 하시지요.”

“예…. 하겠습니다.”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가야 백성을 품으라고 덕만에게 요구한 유신은 이제, 미실 가문의 반지를 끼고도 나를 네 옆에 두라는 요구를 해올 것이다. 군신으로서 함께할 대업만이 둘을 잇는 유일한 방법임을 이토록 잔인하게 알려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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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미실은 유신에 대한 덕만의 마음 역시 꿰뚫어 본 지 오래일 것이다. 그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덕만을 흩뜨려놓는다. 하여 새 역사가 꿈틀대며 부피를 키워가는 이 어귀에서, 수많은 마음들이 기어코 부서진다. <1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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