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 리뷰 16편 : 39부, 40부
덕만이 무려 구휼미로 장사를 하는 패기를 보이며 곡물가를 진정시키고 귀족들을 제압한 후, 미실과 독대하는 장면에서 이런 말을 한다.
“새주께선 현명하십니다. 모든 것에 대한 통찰도 뛰어나시고, 행동력, 지도력, 모든 것이 뛰어나십니다. 헌데 왜 진흥제 이후의 신라는 발전을 안 한 겁니까? 뛰어난 지도자가 있다면 당연히 발전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헌데 요즘 모든 기록을 보면서 느낀 건, 발전이 없었습니다. 진흥제 이후로는 아무것도. 어찌 그런 걸까요. 이유를 아십니까?”
이는 덕만이 미실을 도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로 순수하게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묻는 것이다. 대화를 듣던 유신이 왜 이리 약을 올리냐는 질문을 하자, 덕만은 자신도 나라를 이끄는 군주가 되었을 때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라고 짚기도 한다. 나는 이 대답이 참 슬펐다.
미실은 신국을 사랑했지만 신국을 가질 수가 없었다. 신국을 가지려 하는 것만으로 벅차서 그다음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저 진심이기만 하면 되는 어린애들을 짓밟아버리고 싶으면서도 부러워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진심을 다하기 이전의 과정들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천명을 보면서, 권력을 가지기만 하면 되는 덕만을 보면서, 미실은 자주 슬펐을 것이다. 자신에겐 매일이 권력을 지켜내는 치열한 날들이라서, 원망이 섞이지 않은 마음으로 신국을 사랑하기란 어려운 일이라서. 미실이 왕이기만 했다면, 미실이 왕을 꿈꿀 수 있는 시대였다면, 나라는 진흥제 때보다 부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이라는 타이틀, 그 명분이 없기 때문에 미실은 투쟁을 계속해올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진흥제 이후로 나라가 현상유지를 해온 것 자체가 그녀의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덕만과 유신이 문노가 낸 풍월주 비재 두 번째 문제를 풀 당시에, 사실은 그 답을 미실이 알고 있었음에도 침묵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삼한일통’이라는 답을, 미실은 진흥이 가장 처음 꾸었을 때부터 알았지만 모른 척 묻어두었다는 것이다. 삼한일통을 신라의 꿈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증제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신라 왕조의 뜻은 진흥제 때 편찬된 ‘국사’에 진작 실렸다. 그러나 진지제가 이 모두를 불태워버렸고, 이에 분노한 이사부, 노리부, 거칠부 등의 귀족 관료들은 진지제를 폐위시키고 백정 왕자(진평)를 왕으로 만들자는 미실의 뜻에 동조하게 된다. 알다시피 미실이 내건 조건은 ‘황후’이다. 그리고 이사부, 노리부, 거칠부가 따로 모여 대화를 하는데, 이사부가 미실을 지지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미실은 그저 황후가 되고 싶을 뿐이니. 황후만 된다면…. 누구보다 더 폐하를 성심껏 섬기지 않겠소. 허니 미실이 황후가 되는 데까지는 힘을 보태주시오. 그것이 신국을 위하는 길이 아니겠소?”
즉, 남성 관료들은 황후가 단지 왕의 여자, 왕의 부속물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미실은 ‘그저’ 황후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므로, 누군가의 부속물이 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냥 내버려 두자는 얘기를 하고 있다. 미실로서는 시대가 진골 여성에게 허락하는 꿈의 범위와 자신의 야망이 마주 닿는 지점이 황후라는 지위이기 때문에 그 길밖에 보지 못했지만, 이미 위계질서 상단의 패권적 위치에 있는 남성들은 그게 정말로 어떤 의미인지를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야가 진평의 황후로서 복귀하면서, 미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거칠부는 안타깝지만 새주께서 황후와는 연이 없으신 듯하다고 말한다. 미실은 이렇게 답한다.
“참으로 쉽게 말씀하십니다.”
미실에게는 일평생의 꿈인 자리를, 쉽게 발을 붙이고 살 수 있는 자들은 한마디 말로 뭉갤 수도 있는 것이다. 거칠부는 자신이 미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힌 줄도 모르고, 진지제가 없앤 국사를 다시 편찬하여 진흥제의 뜻을 이어받자는 말만 할 뿐이다. 그런데 이때 미실의 답이 압권이다.
“진흥제의 … 뜻?”
“진흥제가 후세에 전하려 하시는 그 불가능한 꿈(삼한일통)은 단지 왕권 강화에 목적이 있는 것이옵니다. 왜 해야 하옵니까?”
“전쟁을 하면 왕권이 강화됩니다. 귀족 세력은 약해지지요. 헌데 우리가 왜 해야 합니까?”
거칠부는 당황하며, ‘우리’가 선대의 유훈을 계승하기 위해 진지제의 폐위를 함께 도모한 것이 아니냐며, 대체 진지제를 왜 폐위한 것이냐는 질문을 한다. 미실의 답은 다음과 같다.
“내가 황후라면, 왕권 강화가 곧 나의 힘이니까. 내가 황후라면, 지증제의 꿈을, 제가 꾸려했었지요. 헌데 이제 전 황후가 아니질 않습니까.”
눈치챘는가. 미실은 정말 아주 오래전부터 ‘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도 몰랐던 모든 순간에.
자신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인정하지 않는 나라. 그까짓 거 망하게 내버려두고도 싶었을 테지만 미실은 다만 신국을 사랑해서, 자신이 가질 신국을 자꾸만 상상하게 되어서, 나라를 가꾸는 일과 지신의 세력을 유지해 황실에서 버티는 일을 동시에 해온 것이다.
미실에 비해 덕만은 버틸 필요가 하나 준다. 귀족을 누르고 당당히 왕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자격 하나를 갖고 태어났기에 왕좌를 향해 진심을 다해 전력으로 뛰어들기만 하면 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미실은 자신은 절대 왕으로 정의될 수 없는 시대를 살아서 자신이 왕좌를 갖고 싶었다는 것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 애초에 그런 자격이 주어지지 않아서 귀족을 업고 가야만 왕좌 가까이라도 갈 수 있었다. 전력을 다해도 아무것도 가질 수 없던 세월을 견딘 사람이 미실이다. 그런 세월을 ‘우를 범한다’라고 표현하는 어린 공주님이 괜히 원망스러워지는 대목이다. 무모해도 되고, 순수해도 되는 덕만을 보고서. 그런 반짝임을 보고서. 미실은 아무 말하지 않고 덕만을 이런 눈으로 쳐다보기만 한다.
덕만이 곡물 장사로 남은 이문을 전부 투입해 철로 농기구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본래 좋은 철은 무기를 만드는 데만 활용했는데, 이것으로 농기구를 만들어 실질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미실을 뛰어넘을 무언가가 이제 잡히기 시작한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무척 설레는 마음이다.
그런데 미실이 덕만의 곡물 장사에 대한 반발을 바로 진행한다. 세종을 시켜 그의 땅인 안강성에 대고, 병충해로 인해 수확할 양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임에도 조세를 원래대로 받아낸 것이다. 그 결과 안강성에 농민들의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세종과 하종은 덕만이 설친 탓에 피해가 너무 커서 조세를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며, 황실이 나서서 조세 감면을 하든지 알아서 하라는 태도로 일관한다. 국고가 비는 것이 무서워 감세를 해주지 않는다면 고리대 문제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므로, 마땅한 수가 아예 없는 듯했다. 하종이 어머니 미실에게 가 덕만이 잔뜩 당황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미실은 “그 정도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더냐”라고 중얼거리며 웃는다.
덕만이 미실의 귀족 세력에 한방을 먹이자마자 미실이 그를 막다른 골목에 집어넣은 상황이다. 오래도록 신라를 지탱한 정쟁의 규칙대로라면, 이 상황에서는 황실과 귀족 세력 간에 합의를 보고 각자의 기브 앤 테이크를 다시 챙겨야 한다. 그런데 덕만은 백성을 인질로 삼아 황실과 귀족이 서로 먹을 것을 챙겨드는 꼴 자체를 바꾸려 든다. 안강성으로 직접 행차해 백성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덕만은 공주의 이름을 걸고 그들에게 곡식을 돌려주며 그 대가로 농기구와 땅을 줄 테니 황무지를 농토로 만들어내라는 거래를 제안한다. 황무지 개간에 성공한다면 그 땅은 너희의 것이고 그 곡식 또한 너희의 것이 될 거라고 약속하기도 한다. 앞서 덕만이 좋은 철로 만든 농기구 생산을 추진한다는 언급을 했었다. 덕만은 지금, 그 농기구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하여 백성들이 자신의 땅과 곡식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군주로서 이룰 자신의 장기 계획을 시험할 토대로써 안강성을 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것이 어떤 ‘희망’을 위한 처음인지 알 길이 없고, 당장에 곡식을 돌려준다는 이야기에만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유신과 알천은 안강성 민란에 대한 처벌은 해야 한다는 간언을 올리는데, 덕만은 혼란스러워한다. 지배자의 위치에서 촌주를 민란의 주모자로 여겨야 하는데 덕만은 그를 촌민을 위해 목숨을 건 이로 보기 때문이다. 군주로 가는 길목에서 서성이는 덕만. 그는 기어코 반대 의견을 권력으로 제압하고 촌주에 대한 처벌을 유예한다. 권력을 백성에게 향하게 하지 않고 대신 백성을 위하는 자신의 뜻을 전하는 식으로 쓰려는 것인데, 이 올곧고 순진한 마음은 이내 무너지고 새로운 모양을 갖춰 다시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 된다.
안강성 백성들이 곡식과 농기구만 챙겨 도주한 것이다.
이 소식이 온 황실에 전해지고 미실과 덕만이 독대한다. 미실은 일전의 독대를 통해 알게 된 서로 다른 정치 방향성(12편 참조)을 다시 끄집어내며 덕만을 다그친다. 진실과 희망과 소통으로 백성을 다스리고자 하는 덕만의 정치는 되지 않을 일이라 말하는 것이다. 백성은 ‘떼를 쓰는 아기’와 같은, 그래서 무섭고 힘든 존재들일뿐이라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처벌은 폭풍처럼 가혹하고 단호하게” 그리고 “보상은 조금씩 천천히”라고 풀이하는, 자신이 일생 동안 해 온 지배의 기본을 그에게 주입하려고도 든다. 그러나 덕만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한다. 도망간 안강성 백성들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미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제 말을 믿질 못했겠지요. 새주께서 통치하시는 동안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니까요. 그렇게 늘 공포로만 다스려 오셨으니까요. 이제 알겠습니다. 그것이 진흥대제 이후로 신라가 발전이 없는 이유였습니다.”
“…새주님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새주께서 나라의 주인이었다면 백성을 자기 아기처럼 여겼을 테고, 그럼, 늘 얘기하려 하고, 늘 이해시키려 하고, 늘 더 잘 되길 바랐겠죠. 허나, 주인이 아니시니, 남의 아기를 돌보는 것 같지 않았겠습니까. 늘 야단치고 늘 통제하고 늘 재우고만 싶었겠죠. 주인이 아닌 사람이 어찌 나라를 위한 꿈을, 백성을 위한 꿈을 꾸겠습니까. 헌데 어쩌죠? 꿈이 없는 자는 절대 영웅이 되지 않습니다. 꿈이 없는 자의 시대는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합니다.”
미실이 던지는 말들 중 좋은 부분만 흡수하면 되는 덕만과 덕만의 꿈 하나하나가 악인으로 살 수밖에 없던 세월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라 좌절한 미실의 차이가 보이는가. 미실의 좌절은 꿈꿀 기회가 없던 자가 결국 맞이할 결말이 되고 만다. 그는 이런 표정으로 덕만이 던지는 말을 받아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덕만의 좌절 역시 근본적이다. 미실이 버티며 만든 시대가 정말로 맞으면 어쩌나, 자신이 준비하는 모든 것들이 그 단단한 벽 앞에 힘 없이 깨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물음이 그를 늘 휘감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덕만은 안강성으로 다시 가 붙잡힌 백성들과 마주한다. 촌주가 어차피 공주님도 귀족들이 하는 것처럼 이자 놀이를 하기 위해 자신들을 이용한 것이 아니냐며, 우리에게 제안한 말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는 말을 한다. 덕만이 이렇게 답한다.
“난 그 귀족들로부터 너희를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공짜 구휼미를 받아 하루하루 연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땀 흘려 일해 이자를 갚고 땅을 개간하여 너희들이 스스로 땅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귀족들의 노비로 전락하지 않도록 한 것이야. 그냥 노비로 살아야겠느냐. 짐승처럼 귀족들에게 묶여 너희들의 자식들도 그 자식의 자식들도 계속 노비로 살게 할 셈이냐. 정녕 모르겠느냐. 너희들에게 땅을 주려고 한 것이다. 매년 곡식이 나는 너희들의 땅. 자식들에게 대대로 물릴 수 있는 너희들의 땅 말이다.”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너희에게 땅을 갖게 해 줄 것이다. 하여, 이 땅에서 단지 곡식이 아니라 삶의 기쁨을,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네 놈은 약속을 버렸고 나와의 신의를 버렸고 너의 촌민들의 미래를 버렸다. 미래를, 희망을 너희 스스로 깨닫게 할 것이다. 난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 희망을 다짐함과 동시에, 덕만이 촌주와 부촌주를 직접 칼로 벤다.
희망의 정치를 꿈꾸는 자신의 방향을 잃지는 않되 ‘처벌은 폭풍처럼 가혹하게 단호하게’ 해야 한다는 미실의 말을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온 것이다. 패도를 걷는 일이란 결국 가혹하고 잔혹한 일들 위에 서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군주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그는 공포를 닮은 위엄을 얻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을, 언제까지고 순수한 진심이기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덕만은 미실이 만든 현실을 통해 알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미실과 덕만, 서로가 주고받은 상처들이 짙어지고 또 서로를 명확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덕만이 직접 칼로 형벌을 집행했다는 소식을 들은 미실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덕만의 마음이 힘들겠군요.”
그리고는 설원과 함께 한 젊은 시절의 마운령 전투를 떠올린다. 고구려 병사에 밀려 퇴각 중이었을 때, 그는 도망치던 탈영병 일곱을 잡은 일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미실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던 총애하는 낭도였다. 그런 낭도가 탈영하려 했다는 배신감, 제 목숨의 은인을 처벌해야 한다는 당혹감 속에서 미실은 일곱의 목을 직접 베었고 한참을 울었다. 미실은 한동안 손이 떨려 칼을 잡을 수가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인다.
“…허나 얼마 후. 어느 날 손의 떨림이 멈추었고, 달라진 제 자신을 느꼈습니다. 난, 이제 다른 사람이구나. 덕만도… 그리 될까요.”
덕만이 망설이다가 마침내 패도의 길목에 들어섰다는 것을 미실은 정확히 알아챈 것이다. 자신도 걸어온 길이므로.
그리고 자신이 하려는 것이 패업이라는 것을 드디어 가슴으로 이해한 덕만,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듯 보이는 그에게 정말로 길이 펼쳐지게 된다. 진평의 병세가 나빠져 후계가 필요한 상황이 들이닥친 것이다.
미실 역시 상황을 인지한다. 그리고는 황실이 부마(공주의 남편, 왕의 사위)를 세워 후계를 안정시킬 것을 예상하고 후보들을 확인하느라 바빠진다. 그는 수족들에게 알천이 가능성이 있으니 그 부친을 만나볼 것, 새 국면이니 유신과 춘추도 한 번씩 더 확인할 것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미 미실 가(家)의 사위가 되어 있는 유신과 곧 그리 될 춘추이니 무엇이 문제였겠는가. 부마가 누가 되든 전부 미실의 손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덕만은 그 손아귀를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공주 덕만은 혼인하지 않고 스스로 신국의 후계를 이을 부군이 되려 합니다.”
이 아이의 꿈, 그리고. 그리고 한 번도 꿀 수 없었던 내 오랜 꿈.
여왕이라는 최초의 혼란이 황실을 중심으로 신국에 퍼져나간다. 모두가 말도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가운데 딱 두 사람만이 이 선언에 울림을 느낀다. 하나는 칠숙이다. 화랑과 낭도가 황당무계한 일을 들은 듯 덕만의 부군 선언 소식을 칠숙에게 전하는데, 칠숙은 사막에서의 어린 덕만을 떠올리고 씩 웃는다. 서로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로 함께 지내던 때에 ‘백성들의 말을 들을 시간이 없는 자는 황제가 될 시간도 없다고 했습니다’라고 또렷이 말하던 덕만을, 그는 기억하는 것이다. 덕만을 그저 황실에서 자라지 ‘못해’ 엉뚱한 생각만 하는 공주로 여기는 사람들과 황실에서 만들지 않아 더 특별한 덕만의 근간을 아는 이의 차이일 것이다. 과연 백성을 생각하는 시간이 있는 황제로 자라주실 지를 기대하는 얼굴.
다른 하나는 당연하게도 미실이다. 덕만의 꿈이 줄곧 자신의 꿈이기도 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버린 미실은 멍하니 그간의 세월을 복기한다.
그의 수족들이 아무리 성골이어도 그렇지 어떻게 여자가 왕을 할 수 있냐며 반발하니, 같은 여성 지도자로서 미실은 그 말들을 딱 잘라 비웃는다. 어차피 골에 기대지 않은 왕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애초에 미실의 시대에서 진평이 왕의 이름으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 성골 신분이라는 무기가 없었기에, 덕만과 미실의 꿈의 크기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미실은 진골로서, 신국이 골의 나라라는 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다.
또한 여성으로서, 덕만이 성골임에도 왕이 되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떠드는 세상의 관념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 잡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덕만은 골품제의 나라에서 유일한 성골로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앞으로 여론에 대해 투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미실은 자신의 다음 카드로 진골 남성인 ‘춘추’를 내세울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억압 구조가 골품제와 성별 이 두 가지인 상황 속에 골품제가 억압 구조인 춘추가 먼저 천장을 뚫을 것인지, 성별이 억압 구조인 덕만이 먼저 천장을 뚫을 것인지를 가늠해 봤을 때, 성별이 더 센 억압구조로 작동하는 현 상황을 미실이 계산해 냈다는 이야기이다. 심지어 춘추는 진지제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가 폐위돼 족강되지 않았다면 여전히 성골로 해석할 수 있다는 여지도 갖는다. 따라서 미실은 부군에 관해 논의하는 화백 회의에서 춘추를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춘추가 자신에게 적용되는 억압 구조를, 비겁한 방법으로 설득시키는 게 아니라 아예 부정하는 방식으로 달려들어버린다.
“골품제는 천한 제도이옵니다. 소신, 아직 미령하고 식견이 넓진 못하나, 골품제 같은 천박하고 야만적인 제도는 중국, 서역,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사옵니다.”
덕만은 성별이라는 억압 구조를 설득하거나 부정할 방법이 없고 다만 골품제도를 유일한 전략으로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춘추보다 두 발은 더 뒤처져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춘추가 자신은 남성이고 엄밀히 따지면 성골이라는 전략을 쓰면 더 쉬운 길을 가는 것인데, (그리고 이것이 미실이 춘추와 손을 잡을 때 예상한 바인데) 아예 억압 구조 자체를 부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만약 이 부정이 설득된다면, 덕만은 두 발 뒤처져있던 그대로 춘추가 왕좌를 차지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 이렇게 춘추는 자신의 원래 계획대로, 덕만의 후광도, 미실의 후광도 거부하며 둘을 동시에 적으로 돌려 자신만의 날개를 펼치고 올라서는 용이 되어버린 것이다. 천명을 죽인 신라를 반드시 자신의 손에 넣어야겠다는 다짐대로 말이다.
그리고 미실은 이 배신에 허탈함을 함께 느낀다. 어제는 자신이 못 넘은 성별 억압을 덕만이 보란 듯 뛰어넘고, 오늘은 골품이라는 억압을 춘추가 제 손으로 직접 깨부수는 것을 모두 목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뚫고 온 지난 세월 전부가 조롱당하는 이 상황에, 미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자신을 짓누르던 두 개의 억압을 별 거 아니란 듯 뛰어넘어 버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른은 한참을 허망해한다.
그러나 무력하게 주저앉는 것은 미실에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제 한 용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17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