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 드는 시대

드라마 <선덕여왕> 리뷰 21편 : 50부

by 구일삼

미실이 궁을 빠져나가 대야성에서 대놓고 내전을 준비함에도 불구하고, 덕만은 손쉽게 우위를 점하고 반란을 진압할 수 없어 애를 먹는 중이다. 황궁은, 아니 신라는 미실 없이 작동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때문에 대야성이 새로운 서라벌이 되고 있는 상황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덕만은 시대를 갖는 일에 자신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미실의 말을 처절히 깨달을 뿐이었다. 초강수를 두어야 하는 덕만. 그는 소화가 자신에게 선물처럼 남긴 것을 쓰려고 한다. 그것은 칠숙이 소화를 미실의 은신처에 숨겨줄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변칙이었다. 신국의 간악한 독, 미실을 척살하라는 진흥의 밀명을 소화가 그 공간으로부터 훔쳐왔기 때문이다. 이는 애초에 미실이 자신의 정변이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후계로 선택한 비담이 덕만에게 공을 세우게 하기 위해 남겨둔 칙서였다. 그런데 그것을 소화가 가져가 덕만에게만 바치고자 했던 것이다. 이로써 소화를 향한 칠숙의 마음이 미실의 계획을 전부 망가뜨리게 되는 변수가 되어 돌아오는 듯했으나, 덕만이 복야회 산채에 두고 온 그 칙서를 비담에게 가져오라 명하는 변칙이 또 한 번 발생한다. 미실을 부정하고 파멸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 덕만은 그것만은 쓰지 않으려 했는데 써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판단했으나 비담의 정체를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비담은 자신이 미실의 아들인 것은 알지만 후계로 선택했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덕만을 주군으로 섬기며 마음을 다 뺏긴 채이다. 또 덕만은 비담에게 너에게는 은밀한 일을 완전히 믿고 맡길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신뢰하고, 비담은 이 마음에 부응하고자 신이 나 명령을 수행하러 곧바로 달려간다.

그런데 비담이 그 칙서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이미 십수 년 전에 죽었어야 했던 미실. 이미 그의 모든 인생과 꿈을 들어버린 비담은 미실의 세월을 전부 부정하고 있는 이 칙서를 망설인다. 그리고는 대야성에 잠입해 미실과 직접 대면하는데, 덕만의 신하로서 이 칙서를 가지고 미실에게 보여 협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묻는다.

“왜 염종에게 청유를 보내라 하신 겁니까. 말하십시오…. 대답해!”

미실은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답하는데, 이것은 비담이 원하는 답이 아니다. 비담이 듣고 싶은 것은 버려서 미안했다, 하지만 사랑했다는 말들. 그것은 미실이 줄 듯 말 듯 장난을 쳐 비담을 혼란스럽게만 만드는 것들이기도 하다. 비담은 자신이 미실의 꿈에 항상 방해가 된다고 자조하지만, 미실의 진영에 침입한 그를 죽이려 드는 수족들에게 ‘내게 물을 것이 있어 찾아온 손님’ 일뿐이니 그저 보내라는 미실의 말에 선뜻 애정을 기대해 버린다.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사람들을 다그치고 ‘가거라, 어서’라고 말하는 미실을 보며 보호받는 기분을 느끼고, 그것이 그토록 원하던 것과 닮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비담은 다시 길을 잃는다. 그는 덕만에게 가, 명대로 나무 밑을 파보았으나 함만 있었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전하고 만다.

하지만 비담이 완전히 미실의 편이 되어 덕만을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비담과 미실 두 모자(母子)의 관계는, 덕만과 미실의 관계가 적수인 동시에 사제 관계인 것처럼 또렷하게 설명할 수가 없을 뿐이다. 어머니와 아들, 버린 자와 버려진 자, 반란군과 정부군, 태조(太祖)를 꿈꾸는 자와 그의 숨겨진 후계… 둘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애(愛)와 증(憎)이다. 이로 인해 비담이 덕만에게 가지는 마음 역시 복잡해지고 있었다. 비담은 처음으로 덕만에게 거짓을 고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방법으로 반란군을 진압할 계책을 곧장 갖다 바치기도 한다. 미실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부정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지, 비담은 덕만을 여전히 사랑한다. 이러한 그의 무거운 마음과는 상관없이, 진흥의 밀명으로 미실을 제압하고자 한 작전을 더 이상 쓸 수 없기에 반드시 다른 수를 생각해내야만 하는 덕만에게 비담은 큰 힘이 되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앞으로도 한참을 엇갈리게 될 것이었다.




덕만은 비담에게서 얻은 힌트로, 대야성의 수로를 막고 독을 풀 거라는 소문을 군사 기밀이라 퍼뜨리는 것으로 대야성 내의 병사들을 동요시켜 그 안을 지옥으로 만드는 작전을 준비한다. 그렇게 대야성을 고립시켜 놓고 미실에게 손을 뻗을 작정이었는데, 미실이 이를 모두 간파하더니 이내 옅게 분노한다.

“덕만이 싸울 생각이 없군.”

공포로 상대의 발목을 분지르고 손을 내밀어 잡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은 지금껏 미실의 방식이었다. 이 나라 지존인 미실만의 방식. 그런데 덕만이 이 방식을 미실에 대고 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맞수로 보고 달려들지 않는 덕만. 그가 적통 공주라는 고아한 위치에서 자신을 품으려 든다는 것을 눈치채고, 미실은 이 노여움을 풀지 못한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덕만의 요청으로 두 사람이 독대한다. 덕만이 미실에게 ‘합종’을 통해 화친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왜요. 대야성의 약점을 노리고 술수를 부리시지 않았습니까. 반란군을 진압하고 모두 죽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죽이기 아까워서요.”

“아깝다….”

덕만은 이 내전이 본격적으로 병력의 충돌로 이어진다면, 이날의 상처들은 삼한일통으로 가는 길의 ‘방해’가 될 것이라 보고 있다. 특히 이 대업을 위해서는 미실만한 인재가 없다고 판단한 끝에, 미실을 역적으로 선언하는 순간 그를 더 이상 신하로 활용할 수가 없을 것이므로 미실을 품고자 하는 것이다.

“신라엔 대업이 남아있습니다. 해서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습니다.”

“예. 저에겐 많은 인재들이 있지요. 누굴 원하십니까. 설원공? 미생공? 칠숙?”

미실은 모른 척 차를 마시기나 하는데, 덕만이 기어코 어린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문장으로 만든다.

“제가 구하는 인재는 바로 당신, 미실입니다. 새주를 제 그릇에 품을 순 없겠습니까. 새주께선 이미 이기실 수 없습니다. 허면 다음 일을 도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다음 일이라는 것이 공주의 그릇으로 들어와라?”

“표현이 거슬리신다면 이렇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후계자를 키운다… 신국의 주인이 되시지 못한다면 주인이 될 후계를 키우시는 건 어떻습니까.”

“주인… 주인이라…. 이 미실은 주인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입니까."

“개국이 아니고선 방법이 없습니다. 헌데, 개국에 실패하셨습니다. 이제 새주께선 대신국의 주인이 될 방법은 없습니다.”

“주인… 대신국….”

반란군을 죽이기 ‘아깝다’는 말과 ‘주인’과‘대신국’을 운운하는 말들. 미실이 이 대화 속에서 홀로 읊조리는 것들은 전부 그의 신경을 거스를 수밖에 없는, 덕만이 적통 군주의 관점에서만 발화할 수 있는 말들이다. 미실이 덕만을 역적으로 몰고 갈 때 그를 반드시 제거하고자 애를 썼던 반면, 덕만은 미실을 역적으로 만들지 않고 진흥의 밀명을 이제 와 밝히는 것으로 그를 죽이지 않는다. 미실보다는 한 걸음 덜 절박한 덕만의 모습이 미실에게는 필히 거슬렸을 터. 그러나 미실은 덕만을 다그치지 않고 다만 마지막 가르침을 주고자 한다.

“정천군, 도살성, 한다사군, 속함성…. 이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신국의 최남단, 최북단, 최서단의 국경들이 아닙니까.”

“아니… 아니야. 이 미실의 피가 뿌려진 곳이다.”

지난 세월을 다 바쳐 사랑한 나라. 온몸과 온 마음으로, 늘 초심으로 사랑한 나라. 그것을 몰라주는 덕만의 순진무구함이 끔찍하다는 듯, 애가 타고 속이 상해 문드러지는 표정으로 미실이 말을 이어간다.

“이 미실의 사랑하는 전우와 낭도들과 병사들을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묻은 곳이다. 그게 신라다. 진흥대제와 내가 이루어낸 신국의 국경이다. 신국? 주인? 네가 뭘 알아.”

IMG_0527.PNG
IMG_0528.PNG

“사다함을 연모했던 마음으로 신국을 연모했다. 연모하기에, 갖고 싶었을 뿐이야.”

“새주….”

“합종이라 했느냐. 연합? 덕만. 너는, 연모를 나눌 수 있더냐.”

미실은 신라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허락되지 않은 성별과 신분으로 태어나, 그가 신라를 사랑하면 할수록 잔인한 시간들이 쌓여갈 뿐이었다. 미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버텼고, 기어코 한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유는 하나, 신라를 사랑했기 때문에. 푸른 마음으로 신라를 사랑하고 미래를 꿈꾸었을 화랑 시절의 미실이 젊은 얼굴이 저절로 눈앞에 그려진다.




국경 지역의 속함성 당주 여길찬이 새주를 지키겠다며 전 병력을 이끌고 스스로 대야성을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덕만과 미실에게 전해진다. 두 수장은 각각의 신하들에게 곧바로 백제군의 동향부터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미실의 군대에 속함성의 병력이 더해진다면 사실상 내전은 미실에게 무척이나 유리해진다. 그런데 덕만은 그보다는 국경 지역의 병력이 이동해 백제가 움직이지 않을까를 더 염려하고, 미실 역시 마찬가지로 나라 전체를 보는 군주의 시선으로 상황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신하들은 여길찬이 오면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신나 하지만 미실은 이미 여기에 관심이 없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가 조급해하는 것은 자신이 이끄는 반란의 결말이 아니고 신라가 망가지지 않을까에 대한 것이다. 왕의 얼굴이다. 그리고 마침내 백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실은 아예 명을 내린다.

“지금 당장 가장 빠른 말에 가장 날랜 자를 보내세요.”

“여길찬에게 사람을 보내 명을 전하세요. 속히 회군하여 속함성을 경계, 방어하라.”

그리고는 혼란스러워하는 수족들에게 말한다. “그만할래요.”

IMG_0529.PNG

자신이 신국의 혼란이길 원치 않는 마음. 자신이 초래한 내전이 만드는 혼란들을 두고 볼 수 없어 맞이하는 끝. 자신이 지켜오고 가꿔 온 나라의 혼란이 될 수 없어서, 미실은 이 오래된 외사랑을 그저 덮어두는 마무리를 선택한다. 슬픈 표정이 된 설원에게 미실이 마지막 말들을 남긴다.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 화랑 시절 그 노래 가사 기억하십니까.”

“싸울 수 있는 날엔 싸우면 되고,”

“싸울 수 없는 날엔 지키면 되고… 지킬 수 없는 날엔 후퇴하면 되고,”

“후퇴할 수 없는 날엔 항복하면 되고,”

“항복할 수 없는 날엔… 항복할 수 없는 날엔, 그날 죽으면 그만이네.”

처음 신라를 사랑하게 된 시절의 노래로 신라를 포기하는 미실. 그래야만 완성되는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복할 수가 없어서, 굽힐 수가 없어서, 미실은 완연한 죽음을 맞는다. 설원에게 다음을 맡긴 채, 미실은 독약을 마시고 찬찬히 죽음을 소화하며 자신을 찾아올 덕만을 기다린다.


투항을 의미하는 흰 깃발이 대야성에 오르고, 이를 확인한 비담이 가장 먼저 미실에게로 달려간다. 미실은 비담에게 유언을 남기는데, 이 말은 이미 혼란스러운 심정이 된 비담의 남은 날들을 언제까지고 휘감고 있을 것이었다.

“사랑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사랑이란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다. 그게 사랑이야. 덕만을 사랑하거든 그리해야 한다. 연모, 대의, 또 이 신라. 어느 것 하나 나눌 수가 없던 것들이다. 유신과도, 춘추와도, 그 누구와도 말이다. 알겠느냐.”

왕을 꿈꾸는 덕만을 사랑하게 된 비담이 꿈을 이룬 덕만의 왕좌를 빼앗으려 드는 것으로 미실이 그려둔 미래. 자신이 사라진 시대에 왕이 될 덕만을 파괴하는 것으로, 심지어 그것을 비담이 다름 아닌 사랑의 이름으로 하게 만드는 것으로 준비해 둔 다음. 비담은 이를 다 알지 못하고 순진한 답을 할 뿐이다.

“제 연모는 제가 알아서 할 것입니다.”

“걱정이 되어 그런다. 난 사람을 얻어 나라를 가지려 했다. 헌데 넌 나라를 얻어 사람을 가지려 한다. 사람이 목표인 것은 위험한 것이다.”

“덕만 공주님은 사람이자 신국 그 자체입니다. 제가 그리 만들 것이니까요.”

비담의 이러한 다짐은 미실로 인해 완벽할 수 없을 것이지만, 미실의 계획 역시 비담으로 인해 완벽하지 못하다. 비담이 덕만을 사랑하던 처음 마음 그대로 길을 뚫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리고 여린 사람의 마음으로, 너무도 푸른 꿈을 꾸는구나.”

자신을 대신해서, 자신을 이어서 패도를 걷게 만들고자 했던 비담이 얼마나 휘청이게 될지 다 알면서도, 미실은 자신이 더 주인일 수 없음에 죽음을 택한다. 슬프도록 아름답고, 시리도록 반짝이는 최후.


“덕만인 아직인 것이냐.”

독이 퍼지는 시간은 짧고, 기다림은 거기서 끝나고 만다. 미실은 기다리던 덕만을 만나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만약 미실과 덕만에게 남은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아마 미실은 덕만에게 고마웠다고 말했을 것이다. 너의 꿈으로 나의 꿈을 찾을 수 있었다고. 나더러 ‘꿈꾸지 않는 자’라 했던 죽여도 시원찮을 그 말이 나를 마지막으로 한바탕 꿈에 살게 했다고. 덕만 역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지 않았을까. 여성 통치가의 길을 먼저 터놓아 준 데에 대한 감사, 가르침에 대한 존경, 그런 마음. 당신의 시대로 나의 시대를 열어주어 고맙다고 화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가 지난날 미실의 고백을 더 절절하게 만들게 되었다. 신라를 사랑했노라고, 그게 전부라고. 그런 고백이 결국 미실이 덕만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되었다.

IMG_0530.PNG

‘미실. 미실의 시대. 안녕히.’

덕만은 고개 숙여 예를 갖춘다.

IMG_0531.PNG

그렇게 아주 잠에 드는 시대.






내 숨길마저 가리운 싸늘한 어둠

달빛도 날 비추지 못해 찬 이슬만 맺히는데

보이지 않던 별 하나 내게 다가와

지친 날 어루만져주며 속삭이듯 말을 하네

세상을 깨워 바꿀 수 있다면 이 어둠마저 밝혀

날 가둔 세월 불태우는, 모진 세상 빛이 되라고

이 길이 내 길이라면 끝까지 이루라고


(드라마 <선덕여왕> OST '달을 가리운 해' 中에서)


개인적으로 미실을 위로하던 ‘별 하나’란 개양자인 덕만을 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침내,

태양을 위로하던 별이 자신만의 뜨거운 빛을 뿜어낼 차례가 오고 있었다. <22편에서 계속>

이전 20화되돌아오는 화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