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는 일

드라마 <선덕여왕> 리뷰 22편 : 51부

by 구일삼

덕만은 이제야 비담과 미실의 관계를 듣게 된다. 미실의 죽음 옆으로 울고 있던 비담. 덕만이 그를 쫓아가 먼저 다그치는데, 이는 그가 비담을 계속해서 곁에 두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대체 왜 비담이 미실의 죽음을 보고 울어야 한단 말인가. 비담은 사랑하고 증오하던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리고 자신이 미실의 아들임을 밝혔을 때 덕만이 그를 내칠까 두려워서, 답하기를 피한다. 스승인 문노가 죽고 어머니인 미실이 죽으면서 한편으로는 완전히 세상으로부터 혼자 남겨진 그가 덕만에게까지 버려진다면,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상처가 될 테다. 그런데 덕만이 “여기서 이대로 그냥 가버린다면 우린 끝이야”라고 말해 보이고, 비담의 눈이 크게 흔들린다. 덕만은 입을 다물고만 있는 비담을 보고 애가 탈뿐이다. 결국 비담이 모든 진실을 털어놓는다.

“엄마… 랍니다. 미실이 나를 낳았대요.”

“제가 안 어울리게 폐주 진지제와 미실 새주 사이의 아들이랍니다. 진지제를 폐하면서 내가 황후가 되는 데 필요 없어졌고, 해서 새주는 버렸답니다. 날, 가차 없이…. 문노공이 그런 날 데려다 키웠고요.”

“어느 순간, 어느 순간 알았지만 새주는 가는 마지막 날까지 날 아들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헌데 관계를 자꾸 물으시면 어찌 대답을 해야 합니까. 어미가 아들을 인정치 않았는데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아들이라 한단 말입니까. 정변을 일으키는 그날, 날 왜 죽이지 않고 청유를 보냈는지 내가 더 궁금합니다.”

답답한 심정에 눈물을 보이며 자신의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비담. 비담은 폐주 진지제의 아들이기 때문에 미실에게서 버려졌고, 또 미실의 아들이기 때문에 문노에게서 버려졌다. 그런데 덕만은 누군가의 아들로서가 아닌 ‘비담’ 그 자체를 바라봐준다.

“왜…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느냐. 아니다. 싫지…. 버려졌다는 거, 말하기 싫어. 그건 정말, 싫어…. 그래도 내겐 말하지.”

“그래서, 말해서, 공주님한테도 필요 없는 자가 되면요?”

당신에게도 버려질까 두려웠다 고백하는 비담. 사랑받은 기억이 저 멀리 있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건네주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자신의 모험에 함께하게 해 주고, 은밀한 일을 완전히 믿고 맡길 수 있다고 믿어준 덕만이다. 그렇게 맹목적이 된 마음의 주인인 사람에게서 내쳐지기 싫은 게 비담의 사랑인 것이다. 덕만은 그런 비담을 품에 안아 쓰다듬고 위로한다. 비담 역시 덕만을 마주 안고,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울며 마음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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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과 덕만 두 사람은 태초에 유기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같다. 덕만 역시 저주받은 쌍생의 하나라는 이유로 황실에서 버려졌고, 신라에 돌아오고 나서는 모두가 그를 죽이려는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다. 이렇게 같은 상처를 갖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사랑을 펼쳐나갈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이 관계에 깔린 다른 바탕이 바로, 미실이 비담의 마음을 흔들어 덕만의 패도를 흔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미실만이 이것을 직접 스케치하고 또 혼자 알고 죽었기 때문에 이들의 사랑은 영문도 모르고 고난을 만나게 되어 있었다. 특히 같은 날 진평이 죽고, 덕만이 왕위를 이어받게 되기 때문에 왕이 된 덕만이 더 이상 비담을 ‘비담’으로 볼 수 없고 신하로서만 대해야 하는 간극이 발생하면서 두 사람의 마음은 더 힘들 것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의 비담과 덕만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덕만은 ‘많이 힘들었을 것인데’라고 속삭이며 아직 신하가 아닌 비담을 마음껏 안아줄 수가 있었다.






당시에 덕만과 비담의 러브라인을 생뚱맞다고 하는 시청자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 덕만을 연기한 이요원 배우의 연기력 논란도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눈으로 보기에 둘 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시의 시청자들이 미실이나 비담처럼 한국드라마 역사에 깊은 자국을 남긴 캐릭터들에 압도당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은데, 강렬해야만 연기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덕만이라는 캐릭터는 낭도부터 국왕까지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를 거치는 어려운 캐릭터이다. 그런데 이요원 배우는 업그레이드 때마다 표정과 목소리 톤이 자연스럽게 달라지는 지점을 아주 섬세하게 표현해 낸다. 덕만의 위치가 끊임없이 달라지는데도 그 캐릭터에게서 여전한 일관성이 느껴지게끔 말이다. 특히 천명의 죽음으로 인해 각성하는 덕만을 연기한 부분은 압권인데, 도망치지 않고 신라를 먹어야겠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이 이요원 배우가 보여주는 텅 비었지만 확실한 ‘눈깔’ 하나로 설득이 되는 것이다. 이 서사의 주인공은 덕만일 수밖에 없도록 배우가 중심을 정말 잘 잡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미실이 죽음으로 퇴장하고 전혀 다른 챕터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 압도적인 캐릭터의 빈자리가 느껴지기보다는, 이제부턴 완전히 패도를 걸으면서도 다시 사람이고 싶어서 고통스러워하고 고독해하는 왕으로서의 덕만에 몰입하게 된다. 이는 전부 배우의 연기 덕이다.


또 픽션인 이 드라마가 실제 역사에서 차용하고 있는 부분들을 탁월하게 처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드라마에서는 진평왕 말기에 ‘미실의 난’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칠숙과 석품의 난’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이 서사가 잘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주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칠숙은 무장해제와 병력 인수를 거부한다.

“오늘 처음으로 새주의 명을 어길 것이다. 대신 새주께서 내리신 명령 중 수행하지 못한 단 하나의 명. 지키지 못했던 단 하나의 명을 오늘 행할 것이다. 덕만 공주를 죽일 것이다.”

이는 미실이 열어준 삶을 소화의 죽음과 함께 체념하게 되었던 칠숙이 결국 발악하는 척 자결을 택하는 것이다. 다음번에는 죽을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 미실에게 고백했던 것처럼, 칠숙은 미실이 선물처럼 남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 화랑 석품이 미천한 신분의 자신을 중용해 화랑으로 살게 해 준 미실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합세하며 반란을 이어간다. 알천이 석품을 진압하고, 칠숙은 유신과 비담에 의해 제거된다. 그리고 칠숙이 마지막 순간에 덕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지독한 악연의 끝을 알린다.

“이제야 끝이 나는구나. 결국…. 덕만, 나, 소화….”

그리고 덕만은 미실이 합종 제안을 받아들여 투항 명령을 내렸으나 그에 응하지 않은 칠숙과 석품의 난이 벌어진 것으로 정리해 만천하에 공표한다. 수족들은 어떻게 역사에 거짓을 기록할 수가 있느냐 따지고 미실 가문은 반드시 처형해야 한다며 조언하지만, 덕만은 이를 전부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라에 남아있는 대업, 삼한일통을 위해서는 미실의 사람들을 처형하고 또 이 원한을 잠재우기 위해 많은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실 역시 이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대업을 위해선 자신이 남긴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고 덕만은 이들을 다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이미 판단했다. 홀로 완연한 죽음을 맞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지키고 책임지기 위해 오욕의 날들을 참는 선택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됐던 것은, 자신이 키워 온 인재들은 여전히 신라에 필요한 자들이므로 자신이 죽고도 건드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할 수 없이 나라의 지도자였던 큰 어른인 미실이 죽고, 또 진평마저 죽으면서, 그 뒤를 이을 부군으로서 덕만은 본격적으로 왕으로서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조각난 나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결단을 내리고, 단호한 말로 역사를 다시 쓰라 하는 것이다.

“여기 저보다 더 원한이 깊은 사람이 있습니까. 전 미실 때문에 인생 자체를 빼앗겼었습니다. 또 엄마를 잃었고 언니를 잃었습니다. 저라고 엄마, 언니, 그리고 제 원한을 처절하게 갚고 싶지 않겠습니까. 허나 이미 미실은 죽었고 남은 것은 신라… 신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칠숙과 석품의 난’을 드라마만의 서사와 영리하게 섞어낸 지점이다.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기록을, 삼한일통의 대업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군주로서의 덕만이 선택한 첫 결정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덕만은 낙향을 선택한 세종을 제외하고 설원, 보종, 하종, 염종을 사량부 관리로 임명하고 이들의 수장으로 비담을 선택한다. 사량부는 감찰 부서인데, 난의 주모자인 미실의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활용할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또 미실의 사람들의 기를 누를 수 있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충성하는 비담을 한 데 엮어놓았다. 이 기가 막힌 수는 언뜻 완벽한 듯보이나, 포스트 팀-미실을 손수 구성해 준 셈이 될 수도 있어 위험했다. 유신 역시 미실의 아들인 비담을 그렇게까지 믿어도 되는 거냐고 걱정하지만 춘추가 이렇게 말한다.

“믿지 않을 거다. 어제까진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허나 이제는 비담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믿지 않으신다. 왕의 길을, 가시기 시작했어.”

비담에게 사량부를 맡겨 미실의 사람들을 견제하는 한편으로, 비담 역시도 견제하는 것이 덕만의 결정이라는 얘기다. 이는 자신에게 모든 걸 바칠 비담의 충성도, 사랑도 전부 알지만 그것에 화답하지는 않을 거라는 덕만의 결심이기도 하다. 이제 더 미룰 수 없는 왕으로의 길을 걷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미실은 사람을 살피고 다스리나 사람에게 기대지 않는다’는 그 언젠가 스승의 말대로, 덕만은 홀로 헤쳐 나가야 한다.

“가여우십니다. 사람을 믿길, 따르길 좋아하시는 분이신데…. 온마음을 열어 사람을 품으시는 분이신데… 이제 그 길을 못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

모두를 믿어서도 믿지 않아서도 안 되는 길, 고독을 두려워않고 맞서야만 하는 길, 사람을 얻어 천하를 얻었지만 스스로는 더 이상 사람일 수가 없는 길. 덕만의 즉위식 전날, 마야가 이 길을 정말 혼자 걸을 수 있겠냐고 덕만에게 물으며 조용히 딸을 안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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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는 진평의 죽음 이후 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설정으로 앞으로의 전개에서 하차한다. 여자가 왕이 되는 서사에서는 전임이었던 아버지가 이를 이끌어주는 것을 상상하기 쉬운데, 이 작품은 어머니가 딸을 왕으로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었다. 신국의 저주를 재해석한 덕만을 지지한 것도 마야였고, 일식 때 덕만의 손을 잡고 직접 무대로 이끄는 사람도 마야였다. 그러나 앞으로 왕으로서 혼자 외로운 길을 가야 하는 덕만을 보이기 위해 마야는 왕이 된 딸을 응원하는 마지막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다음날, 즉위식이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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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자리에서 패도를 걷게 되는 덕만. 그 뒤를 유신과 비담이 따른다.

‘폐하, 아낌없이 제 모든 것을 드릴 것이옵니다.’

덕만이 사람의 마음으로 처음 사랑했던 남자가 이렇게 다짐한다. 그리고 이제 왕이어야만 하는 덕만을 다시 사람의 마음이고 싶게 만들 남자가 이렇게 다짐한다.

‘폐하, 아낌없이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옵니다.’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미실의 말을 되뇌고 있는 비담. 그러나 유신은 모든 것을 바치겠다 해놓고 다 주지 않아서 덕만을 외롭게 하고, 비담은 모든 걸 빼앗겠다 어설프게 다짐해 놓고 다 주려고 해서 덕만을 슬프게 할 것이었다. 이다지도 괴로운 길을, 덕만은 홀로 걸어야 했다. <2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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