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워 담는 슬픔

드라마 <선덕여왕> 리뷰 23편 : 52부~54부

by 구일삼

신라의 새로운 왕은 국방이 아닌 농기구 증진에 더 투자하겠다는 기치를 내건다. 자신의 땅,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백성을 만들어, 그 백성들이 자신의 이와 신국의 이가 일치한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는 덕업일신 망라사방, 삼한일통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이다.

“지켜내야 할 자신의 땅. 백성의 대의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신국이 부강해지면 자신의 삶도 윤택해질 것이라는 그런 믿음을 주지 않고 어찌 삼한일통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모든 백성이 지켜야 할 땅을 갖게 할 것입니다. 반드시.”

그리고 공주 시절 마음 찢겨가며 믿어준 안강성의 백성들이 황무지 개간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미실과 다를 수 있는 지점, 귀족이 아닌 백성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는 군주가 될 수 있는 자신의 이점을 발견한 그날이 비로소 화답하는 것이다.


덕만의 두 신하. 유신은 신라의 상장군으로서 전쟁에서의 승리를 가져오며 땅을 넓히는 데 제 몫을 하고 있고, 비담은 사량부령으로서 덕만이 신국 운영에 필요로 할 각종 정보와 자료들을 취합하고 조사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덕만이 국왕으로서 민생에 몰두할 수 있는 이유 역시 그가 유신과 비담을 양 날개로서 신뢰하고, 이들에게 각각 궁 내부와 나라 밖을 맡겨 활약하게 했기 때문이다.

비담은 부패의 가능성이 있는 대등들을 무기들이 즐비한 사량부 심문 장소로 데려 와 알아서 기라는 협박을 하는 등의 ‘어두운’ 일까지 하고 있다. 덕만이 거슬려하기 전에 자신의 선에서 미리 견제하고 처리하는 식. 그는 덕만의 명으로 ‘칼’이 되었다. 너는 칼날이기만 해서 누구든 널 잡으면 다치기만 할 것이라 했던 스승 문노의 말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줄 덕만, 그가 자신의 손잡이가 되게 내버려 둔 셈이다. 덕만은 비담의 이러한 마음을 모르지 않고, 아낀다. 해서 비담에게 유신을 포함한 모두를 의심하고 감시하는 직무를 맡겨놓고, 그만은 자신의 눈으로 믿어준다.

“저는 누가 감시하고 견제합니까.”

“너는 내가 항상 살필 것이다. 내가 맡을 것이야.”

전방에서 싸워 승리를 바치는 유신과 대비되는, 후방에서 대신 어둠이 되어주는 비담. 그가 장터에서 백성들이 ‘유신군 만세’를 외쳤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는 장면은 이 캐릭터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신국에 어찌 유신군이 있을 수 있어! 모두 폐하의 군대일 뿐이다.”

덕만의 ‘그림자’로서, 빛이 덕만을 넘어서는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비담은 덕만이 민생 안정에 힘을 쓸 것이라 발표하는 장면을 보면서는 왕을 선언하던 덕만을 보고 마음을 다 뺏겨버린 그 언젠가의 표정을 해 보인다. 덕만이 공주 시절 무기가 아닌 농기구 생산에 주력하는 계획을 세울 때부터 그는 ‘설렙니다'라고 말했고, 여전히 같은 마음으로 설레어한다. 덕만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빼앗을 것이라 다짐해 놓고도 말이다. 후반부에 다룰 것이지만, 이 어설픈 다짐은 앞으로 덕만을 한참을 슬프게 한다.


그렇다면 폐하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겠다던 유신의 다짐은 완전했는가? 그렇지 않다. 유신은 결코 덕만에게 다 주지 않았다. ‘가야’가 남았던 것이다.

덕만은 즉위와 동시에, 진흥제 이후로 하나가 된 적 없던 신라와 가야를 하나로 만들고자 했다. 삼한일통을 위해, 하나의 마음을 위한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 그전에 신라부터 하나로 다져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4편 ‘전쟁의 얼굴’에서, 아직 낭도이던 시절의 덕만에게 유신이 한 말이 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 전쟁이 되었다고. 진흥이 찾은, 너무도 작은 나라 신라가 살기 위한 길은 삼한일통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고, 신라의 이러한 발버둥은 가야 정복을 시작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진흥은 살아남지 못해 사라져 버리고야 만 가야의 한(恨)을, 그리고 가야계 사람들에 대한 계속되는 차별과 혐오를 다스릴 방법은 찾지 못했다. 이것이 고스란히 덕만에게 과제로 주어진 것인데, 덕만은 가야인 차별 금지 율령을 반포하고, 가야인들에게 땅을 돌려주고, 세를 감면했으며, 가야계 인재 등용에도 힘썼다. 이때, '복야회’는 이제 사라져야 하는 이름이라는 것이 덕만이 가야계에 약속을 건네며 합의한 지점이었다. 가야를 복권시킨다는 뜻의 복야회는 그 이름 자체가 반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량부령 비담의 보고에 의해 복야회가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상장군 유신의 밑에서 신라 장군으로 활약해 온 ‘월야’가 그 수장으로서 조직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까지. 덕만은 유신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유신은 마음을 둘로 나누지 못해 자신에 대한 연모를 버리고 군신관계만을 선택한 자이다. 해서 덕만은 유신에게 월야를 버려야 한다고 명령한다. 하지만 이것은 한번 더, 마음을 둘로 나눌 수 없는 유신이 납득할 지점이 아니다. 유신은 가야를 버릴 수 없다.

“폐하. 그것이 사실이라면 월야는 대역죄를 지은 것이옵니다. 허나 오랜 세월 동안 핍박을 받아온 가야계가 아니옵니까. 그 불안감에 그랬을 것이옵니다. 다른 불순한 뜻은 결코 없을 것이옵니다. 감히 아뢰옵니다. 가야 백성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겠다던 다짐을 해놓고도, 그가 결코 버리지 못하는 마지막.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족으로서의 자존심, 책임감, 그 모든 것들. 유신은 신라의 장군이지만 여전히 ‘가야인’으로서 덕만에게 ‘진정으로’ 우리를 받아들이라 요구해 오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더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덕만은 함께 앞을 달려가자 내민 손을 잡아놓고도 여전히 안심하지 못해 믿음을 저버리는 가야계가, 또 그들을 옹호하고 보호하려 드는 유신이 원망스럽다. 무엇보다 신라로부터 ‘가야’를 여즉 분리해 생각하는 무도한 망국의 왕족이 노여울 뿐이다.

“가야의 백성?! 세상 어느 천지에 가야의 백성이 있단 말이냐! 모두가 신국의 백성이고 모두가 나의 백성이다.”

왕이 진노한다. 결국 월야의 상관인 유신에 대한 조사도 피할 수 없게 되고, 덕만은 사량부령 비담에게 이를 윤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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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은 한순간에 뒤숭숭해진다. 사람들은 덕만이 비담과 유신 둘 중 어느 쪽에 더 신의를 두고 있었는지를 가늠하기 바쁘다. 유신에 대한 조사를 비담에게 맡겼으니, 결국 덕만이 유신을 저버리고 비담에게 신의를 주는 선택을 한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덕만은 지금 두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유신 하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유신의 세력, 가야 세력 전체를 보고 이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스승인 미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언젠가 화랑 시절 유신이 풍월주 최종 재가 회의에서 가야로 인해 발목 잡힌 적이 있다. 복야회 관련 혐의가 있던 가야 유민의 상당수가 김유신 가문의 땅에 있음이 병부의 추적 결과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미실은 덕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주께서는 유신랑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으십니까? 유신랑을, 믿으십니까? 물론 공주께서는 유신랑을 완전히 신뢰하시겠지요. 허나 유신을 단순히 개인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애초에 가야란, 가야민이란 유신랑의 강점이자 약점이지요. 해서 유신이 아니라 유신의 세력을 신뢰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 둘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유신랑은 어쨌거나 가야를 짊어지고 가야 하니 말입니다. 그들을 버릴 수도 없고 전면에 내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이 모든 것은 미실이 유신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기 위해 던진 수였고, 가야 유민들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유신은 미실 가(家)에 혼인을 약속했었다. 그리고 덕만은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하며 눈물을 흘렸다. 미실은 그 수 하나로, 패도를 걸을 이는 장기말로 다스려야 할 사람에게 진심일 수 없다는 것을, 함부로 사람의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제 유신을 정인도 개인도 아닌 한 세력의 수장으로서만 대해야 한다는 것을 덕만에게 가르친 셈이다. 패도의 초입에 서 있는 이로서 머리로는 알아도 단련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상처를 받았던 덕만이지만, 이제 그는 마음의 굳은살이 쌓인 채 그 정점에 있다.

그러니까 덕만은 지금 왕으로서 철저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후 유신이 조사 도중에 이미 탈출한 월야에 의해 빼돌려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는 복야회와 가야의 부활을 꿈꾸는 월야가 유신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에 아예 유신이 덕만에게서 내쳐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었다. 즉, 덕만이 신라에서 살 수 있던 방법이 신라를 먹는 것 하나였던 것과 똑같은 상황을 조작하려고 한 것이다. 덕만에게 돌아간다면 유신은 곧 역적이 될 것이니, 남은 수는 복야회에 합류하여 그들의 왕이 되는 것밖에 없어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유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만 곁에 남고자 돌아온다. 죄를 물어달라 제 발로 찾아오는 것이다. 길을 뚫는 진심. 그러나 돌아온 유신은 덕만이 조건으로 내거는 복야회 토벌에 협조할 수가 없는 자다. 그는 복야회를 설득해 이끌고 가지 않는 이상 가야 유민과 신라는 융합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덕만에게 다른 길을 찾아달라 간언한다.

“신라에서 배척받는 가야민을 만들고 싶지도 않고 가야민들에게 미움을 받는 폐하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 제발….”

늘 요구하는 신하와 그것을 헤아려야 하는 왕, 정인 관계보다 어려운 길을 택한 덕만과 유신이기에, 두 사람은 지금 군신으로서 명백한 입장 차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추측대로 덕만은 유신을 ‘저버리고’ 비담을 택한 것이 아니라, 군주로서 결단을 내리는 중이다. 그리고 덕만에겐 안강성에서의 기억이 있다. 자비만을 베풀어 품으려 하다가 후회했던 경험 말이다. 미실에게서, 또 백성에게서 받은 혹독한 기억들을 안은 채인 덕만은 군주로서 단호한 명령을 내린다. 왕이 비담에게 명한다.

“사량부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월야와 복야회를 잡으세요.”

이를 보고 유신의 어머니인 만명과 유신을 따르는 무인들이 덕만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린다. 상장군 유신은 그간 폐하와의 정으로 보나 신라에 세운 공으로 보나 또 그 자신의 성품으로 보나 반란을 꿈꿨을 리가 없다고 소명한다. 그러더니 너무하다, 매정하다며 배신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까지 하는데, 덕만이 벌컥 화를 낸다.

“허면 나는, 나는 상장군을 배신했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유신의 수하이자 덕만과 화랑 시절을 동고동락해 온 ‘고도’가 배신까지는 아니라도 폐하가 너무 심하다는 말을 하는데, 덕만이 다음과 같이 답한다.

“심하게 한 것은 상장군입니다. 내가 아니고요. 나만 상장군의 성품을 알고 정이 있습니까. 상장군도 내 성품을 알고 정이 있을 겁니다. 헌데 어찌 하나도 지지 않으려 합니까. 하나도 내놓지 않으려 합니까. 어찌 내게 이런 결정을 내리게 한단 말입니까!”

그렇다. 유신은 ‘덕만’을 봐서라도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을 끝까지 고집 피우는 중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더 이상 사사로운 감정을 주고받는 정인이 아니고, 다만 군신일 뿐이기에. 유신은 지금 ‘덕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왕’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기에. 가야를 안은 채 덕만의 곁에 있겠다고, 아니, 자신은 버리더라도 가야는 품어달라고, 그런 요구를 신하로서 덕만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나누지 못하니, 왕을 택한 너를 더 이상 정인으로 대할 수가 없다던 어린 유신의 말. 어쩜 그리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약속이었단 말인가. 왕은 굳건한 심지로 결연한 명령을 내렸지만, 덕만의 마음은 괴롭기만 하다.






그렇다면 복야회 그리고 유신에 대한 조사를 맡아 진행하고 있는 비담은 어떠한가? 우선 우리는 애초에 복야회가 색출되고 이것이 유신과 연결되는 것 자체가 비담이 힘을 쓰고 공을 들인 일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비담이 유신을 견제하기 위해 일을 부추겨왔다는 얘기다. 비담은 유신을 궁 밖으로 이송시키는 임무를 부러 복야회 첩자들에게 맡겨 유신의 탈출과 복야회 선택을 유도하기도 하고, 귀족들을 모아 유신을 역적으로 몰아가기를 추동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미실의 아들이자 현재는 비담의 수하 관리가 되어 있는 하종이 다음과 같은 평을 한다.

“비담도 참 무섭네. 복야회 문제란 곧 안보의 문제이니 대의에 어긋남도 없고… 정적(政敵)인 유신도 치고.”

그는 슬프게 웃으면서 “누구 닮았네. 그리운 사람 하나 닮았어.”라고 말하며 미실을 떠올리기도 한다. 비담은 정말로 미실처럼, 대의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정적인 유신을 칠 수 있는 복야회 건을 놓치지 않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비열하고도 영리한 술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담이 과연 유신을 ‘정적’으로 보고 그와 그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 맞는지는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다. 비담은 유신을 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연적’(戀敵)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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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은 ‘내 마음이 힘든 줄 모르는 유신에게 서운하다’는 덕만의 말에 상처를 받는다. 덕만이 유신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을 내비치는 것 자체가 비담에게 상처가 되고, 또 그것을 자신이 아닌 유신을 선택하는 것처럼 느끼기에 더 상처를 받는 것이다. 유신을 선택할까 두려워, 비담은 덕만이 유신에 대한 조사를 허락하기까지 망설이는 시간 동안 그를 몇 번이고 찾아간다. 이후 덕만이 “팔을 잘라내는 심정으로” 유신의 유배를 결정하고 나서는, 이 상황에 일조했다는 이유로 덕만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다시 그를 찾아간다. 그리고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그를 위로하려 든다.

“유신을 그냥 서라벌에 두십시오. 폐하께서 너무 괴로우십니다.”

유신을 덕만에게서 기어코 떼어놓은 장본인이면서 유신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 덕만의 마음을 달래려 하는 비담. 이렇게 가증스러울 때가 있나, 누군가는 무명 시절의 비담을 떠올리며 혀를 끌끌 찰 것이다. 전에는 유신과 덕만이 서로에 대해 갖는 촘촘한 정서망에 끼어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뒤에서 걷기만 하던 비담이다. 그런데 지금의 비담은 덕만이 유신을 버리게 만들어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덕만에게는 아닌 척 사랑만을 받고자 한다. 왜? 미실이 사랑은 그런 것이라 알려줬기 때문이다. 덕만을 알게 된 그날부터 비담은 마음을 나눠 쓸 줄 모른다. 그것은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을 것이지만, 미실이 그 마음의 공식에 손을 봐둔 바람에, 비담에게 연모란 ‘덕만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었다면 어머니의 유언 이후로는 ‘유신과 나눌 수 없는’ 것으로 그 초점이 영영 바뀌어버렸다. 덕만을 사랑한다는 결괏값은 같아도 그 과정에서 엄청난 변칙이 생겨버린 것이다. 해서 상황이 여기까지 왔을 때, 미실은 지하에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을 테다. 비담이 유신을 눈앞에서 치워버린 것은, 덕만이 마지막까지 놓지 않을 ‘신국에 대한 연모’마저 거슬려할 때가 와 비담 자신이 신국이 되어 덕만의 마음이 향하는 곳/것이 되려는 부도덕한 계획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담 스스로는 그런 계획을 상상하지도 못한다. 모든 걸 빼앗겠다는 말은 어설픈 다짐이었을 뿐, 지금은 그저 자신만을 봐주지 않는 정인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풍월주가 되기 직전의 유신이 가야 유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실 가(家)의 사위가 되는 선택을 해 덕만을 괴롭게 한 나날들, 그때의 비담은 울고 있는 덕만에게 손을 뻗어 그 어깨를 감싸 위로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옥체가 된 덕만의 어깨에 손을 뻗었을 때 돌아오는 답은 “치우거라”이다. 함부로 위로할 수 없고, 조금의 마음도 허락하지 않고 날을 세우는 정인. 비담은 더 애가 탈뿐이다. 그리고 이 불안이 폭발하는 계기가 되는 일이 생긴다.

덕만이 비담에게 인사 개편안을 올리라 명하고 비담이 이에 따랐는데, 실질적으로는 비담의 초안과 하나도 들어맞지 않은 개편이 진행된 것이다. 비담의 수족들은 비담이 올린 초안이 덕만에게 비담의 세력을 파악하는 용도로 쓰였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본다. 또 복야회 소탕 자체가 사량부의 책임이 된 형국과 소탕 실패 시 유배 간 유신을 불러올릴 것이라는 계획까지, 덕만의 빈틈없는 일처리에 숨통이 조이는 기분까지 느낀다. 그러나 비담만은 이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지를 못한다. 덕만이 유신을 포기하고도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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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입니까.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말한 대로다. 이제는 신료들의 기강보다는,”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잘못은 유신이 했는데 왜 저를 더 멀리하시는 겁니까. 유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저 또한 폐하의 곁에 있을 수 없는 겁니까. 저의 충심은, 폐하에 대한 저의 마음은 보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보인다. 나에 대한 욕망도 보이고 나에 대한 연모도 보여.”

“헌데요.”

처음부터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연모가 들켜 놀라는 표정을 하는 클리셰란 비담에게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사랑이 왜 덕만에게 닿을 수가 없는지 서러울 뿐이다. 그리고 연모 하나로 오롯할 수가 없는 관계가 되었는데도 자꾸만 사랑을 말하는 비담에게, 그 맹목적인 사랑에, 덕만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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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정이 없을 것 같으냐. 그냥 누군가에게 기대어 위로받고 사랑받고 칭찬받으며 살고 싶지 않은 줄 아느냐. … 네가 날 만지면 가슴이 뛰지 않을 줄 알아?”

덕만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담이 덕만을 끌어안는다. 덕만 역시 손을 뻗어 비담을 마주 안으려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다.

“허나 안 된다. 나는,”

“왜요, 왜요….”

“나는 이제 여인이 아니다. 나는 단지 폐하일 뿐이야. 나를 버리면서까지 왕권을 유지하셔야 했던 내 아버지 진평제, 목숨을 버린 내 언니 천명공주, 멀리는 지증제, 법흥제, 진흥제. 그들 모두 내게 내린 무거운 임무는 하나다. 신라를 사라지게 하지 말라는 것, 왕권을 강화하라는 것, 그리고 삼한일통을 이루라는 것. 그때까지 나는 없다. 비담. 날 소유할 생각 따윈 하지 마라.”

“사랑은 소유하는 것입니다.”

“비담, 제발…. 내가 선택하게 하지 마라. 그 어느 누구든 날 가질 수는 없다. 내가 왕으로 존재하는 한.”

왕인 채의 덕만은 유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비담 역시 세력의 수장으로만 보고 있다. 비담이 답답해하는 지점도 이 때문이다. 비담은 왕이 될 여인을 처음 사랑할 때는 몰랐던, 왕이 된 정인의 무정함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담에겐 정녕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패업밖에 남지 않았다 마음먹은 인생에 비담을 또 다른 선택지로 여길까 봐 두려울 정도로 커진 마음이 말이다. 비담은 덕만이 유신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고 착각을 한다. 덕만이 더 이상 그것을 가질 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덕만과 유신이 더는 정인이 아니라는 것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덕만이 유신에게 서운하다는 감정을 내비친 것이 유신이 아닌 자신의 앞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 사적인 감정을 함부로 보일 수 없는 덕만이 비담 앞에서는 흐트러질 수 있다는 것을. 해서 그는 무려 패업과 자신을 같은 선상에 놓게 될 정도로 무거워진 덕만의 마음을, 그 정도의 사랑을, 연모를 말하지 않고 연모를 말하는 덕만의 말들을, 끝끝내 알아채지 못한다. 잔뜩 헤매고 있는 비담을 보면서, 왕이 아닌 ‘덕만’은 슬픔을 느낄 뿐이다. 자꾸 사랑을 말해오는 비담이 슬퍼서, 그가 주는 슬픔이 자꾸 사람의 마음으로 튕겨 나와서, ‘왕’은 그것을 주워 담을 뿐이다. <2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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