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여자

드라마 <선덕여왕> 리뷰 27편 : 61부, 62부

by 구일삼

“넌 또 버려진 거야…. 늦지 않았어. 덕만을 차지하고 싶다면 신국을 빼앗아.”

염종이 비담을 부추기며 쐐기를 박는다. 비담의 인생을 스쳐간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덕만 역시 비담을 버리고 말았으며, 이는 덕만이 신국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담은 덕만에게서 유신을 떼어내려 했을 때의 마음 그대로, 미실이 스케치한 그대로, 이번에는 덕만에게서 신라를 떼어내 자신이 그 자리에 설 마음을 먹게 될 것이다. 이는 덕만이 비담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자마자 곧잘 사멸한 마음이었지만, 일이 최악으로 치닫은 지금 기어코 부활하고 말 것이다. 내가 신국이 되어 덕만을 가지고야 말겠다는, 검고 질척이고 악취가 나는 마음.

반란군들은 본래 비담의 이름만을 함부로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비담이 합류해 이 난은 '비담의 난’으로 명명된다. 이들은 대야성에 근거지를 마련했던 미실의 난 때보다도 더 비열하게 근거지를 택한다. 서라벌 왕경 안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이다. 왕경 안에 두 개의 권력이 생기게 되는 초유의 상황. 이 무례함은, 당 사신을 이용해 여왕불가론을 주창한 그대로를 밀고 나갈 이들의 계획에서도 드러난다. 미생의 주도 하에 귀족들이 단결한다.

“왕경 안에 전선이 생긴 초유의 상황입니다. 그동안은 비담공과 유신공, 그리고 우리 귀족들이 모두 충성을 하여 폐하께서는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왕권은 선제 때보다 더 강화되었었지요. 허나 이 일이 알려지면 이제 모든 귀족들과 백성들이 폐하의 능력과 왕권에 의문을 품게 될 겁니다. 애초부터 있어왔던 의심. 여인이 과연 될까, 하는….”

전편에도 언급했지만 이는 어불성설. 지금의 ‘여왕’은 민생과 무력 모두를 다잡아 삼한일통이라는 신국의 대업에 훌륭한 징검다리가 된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 진평은 무능한 왕이자 왕권을 약화시킨 장본인으로 그려지지만 그 왕권의 존립과 왕좌에 있어서는 한 번도 의문이 가해진 적이 없었다. ‘여왕’에게만 굳이 의문을 제기하는 이 저열한 수법은 덕만이 즉위 이후 내내 받았을 답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담이 상대등의 자격으로 ‘여왕’의 폐위를 안건으로 하는 화백회의를 소집한다.

다음날 폐위 결의문이 발표되고, 궁으로는 시위부 무사의 시체와 덕만이 비담에게 주었던 반지가 말에 태워져 돌아온다. 속삭였던 연모는 처음부터 거짓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의미로, 당신이 그리도 죽이고 싶어 하던 나는 버젓이 살아있다는 의미로, 비담이 덕만에게 보낸 것이다. 하지만 덕만에게는 이것이 연모는 변한 지 오래고 당신을 무너뜨리는 데 바로 앞까지 왔다는 선전포고로 들렸을 터.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의 탓이 아닌 상처들을 주고받게 된다. 왕은 이제 상황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판단하고 마침내 비담을 신국의 적으로 선포한다.

“비담을 상대등의 지위에서 박탈하며 신국의 적으로 선포합니다.”


왕은 두렵지 않다. 미실이 남긴 비담의 귀족들이 똘똘 뭉쳐 여왕을 폐위시키겠다 떠들어대더라도, 그의 백성들은 왕을 믿기 때문이다. 왕은 공주 시절부터, 백성은 무지한 채로 두고 황실과 귀족 간의 싸움으로 움직였던 세상의 범위를 크게 넓혀 놓았다. 백성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아 키울 것이라고 했던 그 약속을 왕좌에 앉은 내내 지켜내었고, 패도와 희망을 공생시키겠다는 계획을 결국 성공해 내었다. 귀족들은 백성들이 여왕의 능력과 왕권에 의문을 품을 것이라 쉽게 예상했지만, 백성들은 왕에게 대적하는 비담을 함께 적으로 돌리며 왕을 적극적으로 옹립한다. 지금의 왕은 언젠가 문노가 백성들이 여왕을 받아들이겠냐고 물으며 반대하자 여왕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증명해 자신이 보여줄 미래도 믿게 하겠다는 답을 주었던 이다. 땅을 주고 농기구를 주고 믿음을 주려 했으나 덜컥 겁을 먹은 백성들이 그를 배신했던 상처를 견디면서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킨 이다. 그런 왕의 신념과 그간의 눈물들이 분명한 보답을 받는다. 왕이 반란 세력을 제압하고 망라사방의 길로 달려가자고 백성들 앞에 선언하자, 백성들이 왕의 곁에서 함께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하지만 덕만은 혼란스럽다. 그는 비담 세력을 진압한 뒤,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추화군에 따로 가 있을 비담과 여생을 함께하고자 했었다.

‘이번 일이 내가 서라벌에서 왕으로서 처리할 마지막 일이 될 것 같다. 이 일을 끝내면 선위를 할 것이다. 왕위를 넘기고, 추화군으로 갈 것이야. 허니 작은 사찰을 지을 만한 자리를 마련한 뒤 기다리고 있거라. 짧은 시간이라도 너와 함께 하려 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날 믿고, 기다리고 있거라. … 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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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아닌 ‘덕만’으로, 누구도 불러줄 수 없고 자신조차도 잊고 살아야 했을 그 이름을 겨우내 꺼내어 편지를 남겼건만, 비담은 추화군에 당도하지 않았고 이를 받아볼 수도 없었다. 반지를 쥐어주며 보냈던 정인은 그 반지를 다시 돌려보냈고, 왕인 자신을 욕보이며 폐위시키겠다 한다. 그리고 덕만은 왕으로서 ‘시위부 무사’에 대해 조사하라 명을 내린 뒤, 정인이 염종의 손에 놀아났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미 비담을 신국의 적으로 선포한 왕은, 그와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마음, 그 찰나가 신국을 휘청이게 둘 수가 없었다. 왕과 덕만, 이 모든 것이 어지럽게 뒤얽힌 때, 그가 유신에게만 털어놓는 슬픈 말들이 남을 뿐이다.

“염종의 짓으로 벌어진 오해라고 들었습니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든, 오해든, 어차피 우연이 겹쳐져서 벌어지는 것이 필연이 아닙니까. 언제나 역사는 그리 결정되는 것이지요. … 저도, 비담도, 이미 선을 넘었습니다. 다만 내게 확인조차 하지 않은 비담의 마음이 서운하기도 하고, 비담에게 또한 미안하기도 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씀은,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귀족들에게서 사병을 수월하게 뺏고자 그가 갑자기 좋아진 것은 아닌지…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지닌 세력을 털어내고자 혼인을 택한 것은 아닌지… 그것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덕만이 비담을 상대등으로 올려 귀족들의 사병을 그 밑으로 편재하고 특별군을 형성했을 때,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였다. 해서 귀족들의 반발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고, 이때 국혼을 결심하자 비담이 자신의 모든 세력을 내놓을 것이라는 맹약을 갖다 바쳤다. 이 모든 것이 행복하기만 하던 때도 분명 있었는데, 스스로가 덕만인지 왕인지, 그런 것들이 어지럽게 뒤섞이는 세월을 계속 걸었을 덕만은 이제 와 자신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조차 헷갈려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왕의 자리를 선위하고 비담과 조용히 지내려 한 것이 제 마지막 꿈인 것만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래 괴로운 끝에 찾은 답은 물거품이 되려 하고 있었다.






덕만의 기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월성에 별이 떨어진다. 실제 기록에서는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승하하였고 이때 유성이 떨어졌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당연히 이를 본 반란군의 기세가 올라갔을 것인데, 김유신 장군이 불붙은 연을 하늘로 띄워 별이 다시 올라간 것처럼 보이게 해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시켰다고 한다. 작품에서는 이것을 유신이 입안한 작전을 덕만이 윤허한 것으로 풀어낸다. 또한 다시 올린 별은 의지를 고양시키는 목적과 동시에 군사 신호로서 이용된다. 비담은 이것을 공격 신호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지만, 이미 정부군이 동서남북으로 조여들어 반란군을 진압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바탕 난리가 나기 전, 비담이 마침내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덕만이 시위부 무사에 대한 조사를 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수하에게 일을 시켜두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을 맡긴 이가 돌아오고, 비담에게 모든 것을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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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염종의 손에 놀아났다는 것을 깨달은 비담. 그는 전투를 준비 중이던 염종을 곧장 찾아가 분노한다. 하지만 염종은 비담과 처음 세력으로 맺어졌을 때처럼 혀를 구슬릴 뿐이다.

“연모가 이루어졌으면 그럼 뭐가 달라졌을까? 아니. 넌 그래도 난을 일으켰을 거야. 왜? 불안하니까. 폐하가 언제 널 버릴까 언제 내쳐질까 두려우니까, 믿지를 못하니까. 넌 원래 그런 놈이야. 내가 저 사람을 믿어야지가 아니라 언제 저 사람이 날 안 믿을까, 언제 버려질까 그 생각뿐이지. 헌데 너 그거 알아? 폐하는 너 끝까지 믿었다.”

비담은 고개를 저어가며 상황을 부정하지만, 염종은 비담이 그 배를 가를 최후 직전까지도 말을 뱉는다.

“믿지 못한 것도 너고, 흔들린 것도 너야. 니들 연모를 망친 건 폐하도, 나도 아니야. 그건 바로 너야, 비담.”

염종이 처음부터 끝까지 얄밉다 못해 가증스러운 느낌을 주는 캐릭터인 것은 맞지만, 사실 그가 하는 말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다. 미실의 목적으로 태어났고, 문노의 목적으로 길러졌으며, 결국 귀족들의 목적에 이용되기까지 했다고 비담을 가여워만 할 수 있는 것일까? 살해된 염종과 시작된 파멸을 목격한 미생은 그의 조카를 ‘불쌍한 것’이라 부르며 안타까워 하지만 자신을 망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다. 이 말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사실 비담은 음모로 인해 덕만에 대한 배신감을 갖기 전에도, 덕만이 건넨 반지를 단 한 순간도 낀 적이 없다. 덕만은 그것을 내내 끼고 있는 반면, 비담은 그 반지를 손에 쥐거나 품에 넣기만 하지 그것을 덕만에게 돌려보내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손가락에 끼워 넣지 않는다. 결국 진짜 믿지 못한 것은 비담이라는 은유일 테다. 그렇다면 비담은 정말 그의 변명대로 사람을 믿지 못하도록 길러진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궤변이고 결국 그 스스로가 자신도, 연모도, 모든 걸 망쳐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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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것이 명확하게 나누어지지 않아 이 캐릭터가 더 오래 기억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 이유였든, 이제 이 이야기 속의 비담은 그저 뚜벅뚜벅 덕만에게로 걸어갈 뿐이다. 덕만이 자신이 왜 비담을 사랑하게 된 것인지, 그를 사랑하며 자신은 왕이었는지 사람이었는지를 헷갈려하면서도 비담과 여생을 보내고자 함이 마지막 꿈이었다고 확신했던 것처럼. 비담 역시 이유 같은 것은 몰라도 자신이 찾은 마지막 답을 향해 최후를 걸어보려고 한다. 그 답은 신라도, 왕도, 대업도, 천년의 이름도, 그 무엇도 아닌 다만 덕만이다. 그 얼굴을 마지막으로 봐야겠다는. 그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러줘야겠다는.


반란군이 속속들이 추포되는데 비담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유신이 덕만에게 묻는다.

“비담을 추포하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걱정되십니까. 제가 살릴까 봐요. … 이미 황명으로 신국의 적이라 선포했고 척살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상장군께선 어찌 다시 물으십니까.”

하지만 유신은 덕만이 비담을 죽이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정적이기도 했던 비담을, 그가 무려 역적이 되었는데도 덕만이 사심(私心)으로 인해 제거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 어쩌면 덕만이 마지막으로 행복할 기회였던 것이 사라질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비담이 죽고 나면 이제 정말 ‘왕’만 남아, 덕만은 영영 사심(私心)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덕만과 비담이 국혼을 발표했을 때, 유신은 이런 말을 했다. 서운하고, 또 비담에게 세력이 쏠릴까 저어되기도 하지만 덕만에게 축하를 건네며.

“한 곳은, 어느 한 곳은 폐하께서 쉬실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저는 못 해 드리는 일입니다. 폐하께서 혈혈단신 복야회를 찾아가 저를 위기에서 구해주셨는데도 저는 해드리지 못한 일입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 송구하옵니다.”

그리고 비담에게는 따로 찾아가 당부를 전했다.

“폐하를 위로하고 안아줄 유일한 사람이 자넬세. 그러니 잘하시게. 자네의 연모가 폐하에게 고통이 되어서는 아니 되네. 알겠는가.”

유신에게 덕만은 첫 연모였고 또 마지막이다. 쌍생의 증거로 죽을 위기에 있던 덕만을 홀로 지켰고, 신라에서는 살 수 없는 덕만을 위해 이루고 쌓아 온 모든 것을 버리고 함께 도망을 가려고 했다. 그리고 신라를 먹는 것으로 살 방법을 찾은 덕만과 함께 하기 위해, 연인을 포기하고 군신을 택했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연모를 지켰다. 유신은 덕만이 누구보다 사람을 믿고 따르길 좋아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가 사람의 마음을 가질 수 없는 왕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 했다. 또 정인으로 덕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신하로 왕을 보겠다는 다짐을 조금의 새어나감도 없이 지켜 덕만을 괴롭게 했다. 해서 덕만에게 사랑을 주고 또 평안을 주는 일은 자신은 해줄 수 없는 일. 때문에 덕만이 다시 평안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신은 비담과 덕만이 행복하기를 무엇보다 바랐다. 하지만 덕만은, 아니, 왕은 역적을 죽일 것이라 말할 뿐이다. 그를 지켜보는 유신의 표정은 쓸쓸하기만 하다. 함께 도망치려 했던 마음, 그것을 묻어둔 가슴이 욱신거려 온다.






그리고 비담은 추포를 거부하고 덕만에게로 걸어간다. 감히 왕좌를 향해, 왕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는 역적을 전 군대가 상대한다. ‘문노의 목적으로 길러진’ 이 답게 그 무술 실력으로 엄청난 병력을 멀쩡히 상대하나 싶었지만, 쏟아지는 화살과 칼날을 전부 당해낼 수는 없었다. 비담은 이제 피를 뚝뚝 흘리며 괴로워한다. 그런데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왕좌를 향해, 왕을 향해서가 아니라, 덕만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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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비담의 인생이 그랬다. 문노든 덕만이든 전부 유신을 택하는 걸 지켜보면서 가졌던 열등감, 자신을 죽이려는 수십의 사람들,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미실의 마지막 말들… 이 전부를 애써 제쳐가면서 덕만까지 칠십 보, 덕만까지 삼십 보, 덕만까지 십 보, 되뇌면서 그에게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내내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날들이었다. 이 파멸, 기어코 깨진 연모. 그것이 전부 자신의 탓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는, 비담은 덕만에게서 이 모든 게 다 오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연모를 지키겠다는 말들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담은 덕만에게 들을 말이 있어 가는 게 아니다. 전할 말이 있어서 멈추지 못하고 걷는다.

“전해야 할 말이 있는데 전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전해야 할 말은 하나. 덕만의 이름이다. ‘덕만아. 덕만아’ 다정스레 이름을 불러주려고. 사람이 아닌 왕으로 존재해야 하는 정인이 잃어버린 이름을 듣고 싶어 했던 걸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불러주겠다 다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외로웠던 사람의 평안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정말로 내가 다 망친 거면 어쩌지. 내가 아니면 저 아이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없는데, 내가 다 망쳐버려서 어쩌지. 나 때문에, 내 바보 같은 연모 때문에 저 아이가 더 외로워지면 어쩌지. 비담은 어머니의 마지막 연민의 말을 이제야 알아듣는다. 여리고 여린 사람의 마음으로, 너무도 푸른 꿈을 꾸고 말았다는 말. … 아, 덕만아.

네가 연모로 내 이름을 불러도 세상은 반역이라 할 것이라는 어느 날의 덕만의 말처럼, 단지 이름을 불러주려던 비담의 연모는 덕만이 왕의 이름으로 완성해야 하는 대업의 기반을 위해서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비담은 결국 덕만에게 닿지 못한다. 십 보를 남겨두고, 결국 상장군 유신과 시위부령 알천이 그 목숨을 거둔다. 유신, 알천, 비담, 덕만, 여왕을 만드는 대업을 함께 시작하던 4인이다. 너무 멀리 와 버린 지금, 유신의 칼이 최후의 일격이 되어 비담을 찌르고, 비담은 무어라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고꾸라진다.

왕이 선언한다.

“이제 난은 끝났습니다. 이제 신국에 남은 것은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뜻과 하나의 힘으로 망라사방의 기치를 올려 그 길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모든 대소신료와 모든 화랑들과 모든 병사들과 모든 짐의 백성들에게, 짐의 이러한 뜻과 난의 종결과, 또한 신국이 하나임을 황명으로 전할 것입니다.”

이로써 왕은 다시 굳게 서고, 덕만은 휘청이다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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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어도 되는 날을 보내고 밤이 되면 서로 마주 누워 이름과 마음을 주고받는 그런 삶이 펼쳐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마주 누워,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눈을 응시하고 있는 덕만. 여전히 너와 함께 하고 싶다고, 그런 마음을 입 밖으로 흘리더라도 비담은 영영 모른 채 죽어있을 테다. 버려졌다는 상처를 서로 보듬어줄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버렸다는 오해 속에 따로 놓여 있다가 결국은 서로에게 닿을 수가 없었다. 잔인한 끝이다. 이 이야기는 이제 결말로 흐른다.






비담이 죽은 사흘 뒤, 쓰러진 덕만이 잠에서 깨어난다. 그는 공석이 된 상대등 자리에 알천을 올려 마지막 정무를 처리한다. 그리고 덕만의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유신이 찾아온다. 덕만은 비담이 유신에게 죽어가며 중얼거렸던 그 말이 무엇이었느냐 묻는다. 덕만은 비담의 입 모양만 읽었지 음성을 들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신이 답하기를 주저한다.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었사옵니다. 용서하시옵소서. 소신은 감히 그런 불경한 말을 전할 순 없사옵니다.”

덕만이 그를 조른다.

“전해주세요, 유신공.”

“아니되옵니다. 할 수 없는 말이옵니다.”

유신은 할 수 없는 말. 덕만은 이제 유신이 아닌 신하에게라도 물어야 한다.

“황명입니다. 당장 말해주세요.”

신하가 망설이다 답한다.

“비담이 말하기를…, ‘덕만아’라고… 하였사옵니다."

결국 덕만은 비담이 불러주는 이름을 끝까지 직접 듣지 못했다. 유신이 대신 부르는 이름은 이제 와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잠잠한 표정으로 그것을 듣고 있던 덕만이 신하에게 말한다.

“나갑시다. … 하늘이랑, 땅이랑, 다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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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땅도, 찬찬히 지켜보는 왕. 그렇게 왕이 신라를 눈에 한 번씩 담더니 마지막이 될 말들을 남긴다.

“제가 계림에 처음으로 와서 첫날 꾸었던 꿈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 꿈은 덕만이 문노의 이름 한 자락을 붙들고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서라벌로 처음 왔을 때 꾸었던 것이다. 어디로 가면 문노를 만날 수 있냐고 물어가며 장터를 헤매던 자신을 어떤 여인이 꽉 안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 그 여인은 누구였을까, 덕만은 아직 답을 몰랐었다.

“이제 꿈에서 절 안았던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 이제야 알겠어. 날 안고 눈물을 흘리던 그 사람이 누군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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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의 말들이 유신에게 가 흩어진다.

“우리 예전에 도망가려 했었지요. 기억하십니까. … 지금이라도 갈까요.”

신라를 하나로 만들고 삼한일통을 위한 기반을 만들라는 시대적 과제를 모두 끝낸 왕. 그러나 그는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해 후련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덕만’이고 싶은데.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죽은 이름이라 생각하고 살았던 덕만으로 다시 살 수 있을까? 바라던 대로 다시 한번을 사람의 마음으로 살아보지 못하고, 덕만은 결국 왕으로 죽는다. 곁에는 유신, 손에는 차마 뺄 수 없던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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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 든 왕은 먼 길을 거슬러 덕만을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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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겠다며 무작정 신라를 찾아왔던 어린 덕만과, 이름 없이 마음 없이 살아야 했던 지금의 덕만이 마주한다. 잠깐 맞대는 사람의 온기가 너무 필요했던 시점의 둘이다. 덕만이 덕만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덕만아. 지금부터 많이 힘들 거야. 그리고 많이 아플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 거고, 너무너무 외로울 거야. 사막보다 훨씬 메마르고 삭막할 거야. … 모든 걸 다 가지는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거야. … 그래도 견뎌야 해. 알았지?’

기어코 말이 흐른다.

“견뎌. 견뎌 내.”

‘덕만아’, 하는 음성. 유신은 불러줄 수 없고, 비담이 부른 것은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덕만은 불행한 엔딩을 맞이한 것일까? 사람으로 살지 못한 덕만, 일생의 딱 두 번 있던 사랑들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린 덕만, 곁에 남은 사람과는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눠 낀 반지는 소용이 없는 덕만. 그는 이대로 죽어 나쁜 결말을 맞이한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왕인 채의 덕만이 듣는 것은 결국 그 누군가가 불러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르는 이름이었다. 다시 한번 덕만이고자 했던 마음은, 결국 자신이 덕만이라는 걸 잊지 않고, 잃지 않고 살아온 자체였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외로움에 잠식되어 가다가, 그는 마침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덕만의 서사에서 천년의 이름으로 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덕만’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울며 웃는 채로, 안녕. 덕만이 마지막으로 찾은 것이 자신의 이름이라 미소를 보이는 그런 안녕. 슬프고 다정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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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그 이름 없는 여자의 이름을 한번 불러본다. 덕만아,

안녕.

안녕히.


이제, 눈물이 빨리 마르는 사막에서 쉽게 울지도 못하던 그 어린 여자애가 다시 모험을 시작할 차례였다. 어떤 여인이 자신을 꽉 안고 눈물을 흘리던 꿈에서 깨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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