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걍귤 Feb 20. 2021

미니멀리스트, 요즘 이 맛으로 삽니다

밖순이 미니멀리스트의 취미


제 취미는 영화보기에요. 살다 보면 남들에게 내 취미를 소개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영화 시청이라고 했다. 취미는 없고 영화 보는 건 무난하니까. 5살도 아니고 나가서 놀기라고 할 순 없으니 대충 고른 겉취미다.


딱히 취미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캘린더 어플 여기저기에 적힌 이름들과 함께 재밌는 거 보고 맛있는 거 먹으면 일상에 빈틈이 없었다. 근데 왠 날벼락. 세상 별거 없던 행복은 이제 그 무엇보다 별게 되어버렸다.


출퇴근 후 집콕 5일, 하루 종일 집콕 2일로 이루어진 일주일의 반복에 나는 물 주는 걸 까먹은 화분처럼 시들해져 갔다. 남들은 대체 뭐하나 봤더니 다른 세계를 사는 건지 평소처럼 밖에서 친구 만나기 혹은 미니어처 하우스와 보석십자수를 만들면서 집에서도 야무지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반영구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취미생활은 선호하지 않는다. 만들 때는 초집중하는 게 재밌는데, 처치 곤란한 결과물의 탄생은 썩 반갑지 않다. 보관하기엔 볼 때마다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게 거슬리고, 바로 버리자니 괜히 쓰레기만 만든 거 같다.


밖에서 놀면서 돈도 못 쓰니 소비는 하고 싶고 물건이 늘어나는 건 싫다. 주말만큼은 핸드폰이나 노트북 속 콘텐츠 말고 또 다른 자극이 필요하다. 따지는 것도 많은 밖순이 미니멀리스트는 코로나가 종식될 때까지 뭘 해야 할까? 근 일 년간 괴로워하다 나름 정답을 찾았다. 유형의 결과물보단 가치를 남기는 취미를, 나는 '미니멀 취미'라고 부르기로 했다.







1. 동네 고양이들 만나기


요즘은 하도 상식 밖의 사건들이 많아서 퍽하면 인류애가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그럴 땐 귀여운 생명이 제 나름대로 하루를 살아내는 모습을 보며 재충전한다. (조금 모순적이지만) 세상엔 산소가 아까울 정도로 쓰잘데기 없는 존재가 있는 반면 이렇게 만난 적도 없는데 마음이 쓰이는 존재가 있구나! 그래서 평균치가 맞춰지나 보다, 생각하면서.


우리 동네 고양이들은 주민들에게 예쁨을 듬뿍 받고 있다. 이름을 붙여주고 밥을 챙겨주고 온갖 장난감을 동원해 놀아주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닌 걸로 예상되니 참 다행인 일이다. 그래서 나는 뭘 해줄까 고민하다, 가끔씩 건강하고 맛있는 간식을 사주기 시작했다. 물 좀 많이 마시라고 전용 물그릇도 들이미는 건 덤이다.


보통 ‘고양이 간식’하면 생각나는 그 츄르는 일본산에다 영양적으로 엉망이라 다른 걸 찾다 발견한 간식. 반려동물 간식 브랜드 '조공'의 사회 공헌 프로젝트 제품이다. 저렴하면서도 가족이 없는 동물들에게 꼭 필요한 영양소를 담았다고 한다. 덕분에 철두철미하게 휴대하고 다니면서 우연히 고양이를 만나는 행운을 놓치지 않고 있다. 사람을 경계하는 고양이에게는 근처에 슬쩍 짜놓고 사라지는 척하면 세상 음미 탐미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350원으로 은밀한 취미 생활하기





2. 필름 사진 찍기


필름 사진? 미니멀 라이프랑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 장식장에 꽉 들어찬 앨범들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집에서 보내는 고요한 시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빌빌거리던 주말, 아빠가 장식장 정리를 했는지 10년 넘게 안 보이던 필름 카메라를 버리겠다고 내놨다. 별 수 없이 새로운 취미 후보가 정해졌다.


초등학생 땐 일명 ‘디카’를 가지고 다니며 별거 없는 일상과 매일 보는 친구들을 열심히도 찍어댔다. 그 뒤로 디카-하이엔드-DSLR의 단계를 거치며 사진에 빠져있었지만, 그 사랑은 스마트폰의 탄생과 함께 사그라들었다. 쉽고 가볍게 찍을 수 있는데 화질까지 좋은 스마트폰. 그런데 전처럼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조리개나 초점을 하나하나 설정할 필요가 없으니 구도만 대충 바꿔가며 연사를 남발하게 됐다. 몇십 장의 사진 중 잘 나온 컷을 골라내야 하는 뒷일까지 생기니 귀찮고 재미없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미니멀하지 않은 카메라는 스마트폰이었다.


아빠의 총각 시절을 함께한 필름 카메라는 참 불친절하다. 사물이 가까우면 안 찍히고, 가끔 전원이 안 켜지면 핀으로 배터리 넣는 부분을 꾹 찔러줘야 한다. 게다가 요즘 시대와 어울리지 않게 찍을 수 있는 수가 제한적이다. 그래서 딱 한 번 찍는다. 신중하게 뷰파인더를 보고 셔터를 누를 때 잠깐 숨을 참는다. 그렇게 필름 5개가 모이면 사진관으로 간다. 알고 보니 사진 인화는 필수가 아니었다. 미니멀 라이프와 어울리지 않다고 외면하던 시간이 아쉽다. 내 선택지는 찍은 필름을 이미지 파일로 받을 수 있는 스캔. 사진이 잘 찍혔는지 알 수가 없으니 파일을 다운받을 때마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든다. 그리곤 천천히 사진을 구경하다 보면 행복한 순간들은 사소하고 무수했음을 새삼 느낀다.





3. 만들어서 먹기


결과물이 남는 걸 질색하는 지독한 미니멀리스트에게 가장 적합한 취미! 만들고 먹으면 끝이다. 씻어야 할 그릇들이 남긴 하지만 노래를 틀어놓는다면 설거지도 나쁘지 않다.


2018년의 시작과 함께, 나는 파스타에 꽂혔다. 꽂혀도 아주 단단히 꽂혔기 때문에 생각이 날 때마다 매번 나가서 사먹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직접 만드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그 당시 나에게 '파스타 만들기'란 어차피 소스가 짜니까 맹물에 삶은 면과 마트에서 사온 토마토소스를 섞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면 삶을 물에 소금을 얼마나 넣어야 할지도 몰랐다.


만들 때마다 매번 맛이 바뀌는 신기한 파스타를 먹으면서, 사먹는 것처럼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고 말겠다는 집념 혹은 집착이 시작됐다. 그래서 2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 매주 1~4번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있다. 잦은 빈도로 인해 가족들의 리액션은 감소했지만 나는 내 파스타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 같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이렇게 직접 만들어서 먹는다는 건 근자감까지 채워줄 정도로 정신건강에 좋은 취미이다. 좀 더 욕심내서 베이킹까지 한다면 팔도 튼실해진다. 강력추천.



여기까지가 1년 동안 미니멀리스트로서 발굴한 취미이다. 꼭 누구와 함께가 아니어도, 새롭고 특별한 곳에 가지 않아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들이다. 오늘도 필름 카메라를 들고 동네 고양이들에게 인사하고 돌아와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따 밤에는 집에서 스릴러 영화를 봐야겠다. 비록 겉취미였지만 이제는 진짜 취미가 될지도!

작가의 이전글 올해부터는 샴푸 안 쓰겠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