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꽉 찬 대학생의 미니멀라이프
나에게 '이사'는 완전 남의 일 같은 말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를 마지막으로 이사를 해본 적 없는 우리 가족에겐, 이사란 인생에 몇 번 없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이처럼 익숙한 동네 안에서 크게 벗어나 본 적이 없던 나는 대학 진학 후 4년간 네 번의 이사를 하게 된다.
“이 옷은 언제 어디서 산거야?”
이십 대 초반답게 관심사는 옷과 화장품이었고, 좁아터진 기숙사 옷장이 턱없이 모자라서 책장의 세 칸 중 두 칸은 강제로 옷장 신세였다. 그런데도 항상 입는 옷들은 정해져 있었고, 가장 좋아하는 옷은 '가장 최근에 산 옷'이었다. 이사를 하기 위해 짐을 챙길 때마다 거의 초면인 옷들을 마주했다. 옷 버리는 게 제일 힘들다던 내 룸메이트도 날 구경하며 옷의 존재 여부도 모르는 건 신기하다고 말했다.
우체국 6호 박스가 찢어지기 직전까지 짐을 싸고 또 싸고, 옮기고 풀어놓고의 과정을 네 번 반복하면서 드디어 지쳤다. 내 짐이 <세상에 이런일이>에 나올 정도로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귀찮음 많은 나에겐 상대적으로 버거운 양이였던 거다. 그리고 룸메이트 말대로 구입 이후 처음 보는(또는 구입 여부가 기억도 안 나는) 옷들이 매번 나온다는 것에 진한 현타가 왔다.
그제야 소비 패턴을 되돌아보았다. 주변 평균보다 많은 액수의 용돈을 받고 있었지만 내 지출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모자랐다. 지출 카테고리 부동의 1위는 음주, 2위 의류, 3위 화장품. 아르바이트를 해서 바짝 벌어놓고 떨어질 때쯤 되면 다시 일하기를 반복했다. 적금 하나 없던 것은 당연지사! 이러한 소비습관이 남긴 것은 다음날 깨질 것 같은 머리통과 존재도 잊을 정도로 가치 없는 물건들이었다. 가치 있는 소비를 딱히 해본 적이 없었고, 마침 인터넷에서 본 <옷장 꽉 찬 거지 할머니>라는 말이 각인됐다. 일단 확실한 건, 이렇게 살면 호수공원이 보이는 아파트는 절대 못 산다.
얼마 안 있어 막학기가 끝나고 사라진 소속감에 약간의 공허함을 느끼며 난 백수가 되었다. 공허함과 반비례하는 양의 짐을 모조리 집으로 가져와 짐을 풀기 시작했다. 전부 정리하고 오면 좋았겠지만, 대청소는 해봤어도 물건을 왕창 버린다는 건 생각도 해본 적 없어서 천천히 정리하기 위해 전부 옮겨왔다.
평소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던 실행력도 웬일로 날 도왔다. 사는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 꽉 찬 자리를 진짜 가치 있는 것들로 더 크게 채울 것을 다짐했다. 나는 바람을 한없이 넣다가 뻥 하고 터지는 풍선처럼 몇 년간 이고 지고 살던 짐들을 곧 죽을 사람처럼 마구마구 버리기 시작했다.
속 시원했다. 목욕탕에서 묵은 때를 민다는 흔한 표현보다 더 시원했다. 낡아서 이제는 보내줘야 하는 것을 시작으로, 날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을 버렸다. 짧은 원피스와 색조 화장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행동을 제한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너무나 유명한 문장인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말을 듣고 옷은 1/2 분량으로 줄었다.
사실 난 편하다고 남용하는 일회용품 보단 환경보호가 중요하고, 완벽한 환경보호 보단 내 편의가 중요한 사람이다. 그렇게 애매모호한 경계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나는 신나게 옷을 버리다가, 책임감 없는 주인 만난 이 많은 옷들이 어디로 가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다들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을 거다. 파마를 하고 싶어서 어떤 스타일로 해야 할지 고민할 때는 길거리의 수많은 머리들 중에 파마머리만 보인다. 여름 샌들을 장만하려고 할 때는 사람들의 발만 보게 된다. 그렇게 내가 버리는 것들의 종착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하자 환경 관련 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청바지 한 벌 만들 때 물이 얼마나 필요할까?
물이야 당연히 많이 들어가겠지 하고 글을 클릭한 나는 '7,000L'라는 단어를 보곤 지금까지 버렸던 청바지들을 떠올렸다. 훗날 스키니 시대가 되돌아온다 해도 나의 길을 가리라 다짐하며 과감하게 버렸던 멀쩡한 청바지들아..
쉽게 사서 쉽게 버린 것에 대한 후회로, 미니멀 라이프와 환경의 상관관계에 대해 찾아보게 됐다. 생각보다 나와 같은 과정을 겪은 동지들이 많았다. 그동안의 무자비했던 소비를 후회하며 옷무덤을 만들다 그것들의 종착지가 궁금해질 때, 그때가 바로 Lv.2로 렙업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진화하는 포켓몬처럼, 미친 듯이 사재끼다가 돌연듯 미친 듯이 버리던 왕초짜 미니멀리스트의 앞에 죄책감이(가) 나타났다! 나에게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크게 흠이 없는 것들을 버리는 행위가, 내 작은 양심을 찔렀다.
지금까지는 어떠한 가치를 위해 묵묵히 갈 길 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저 대단하다, 나와는 정말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내가 만들어내는 쓰레기들에 대한 콘텐츠를, 학교에서 억지로 시청하는 게 아니라 내 필요에 의해서 접하면서 이제야 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더위를 많이 타서 지구가 좀 덜 더웠으면 좋겠고 마스크 쓰기가 싫어서 미세먼지가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진짜 환경을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보단, 일단 그 환경 속에 사는 내가 좀 더 잘 살고 싶어서 관심을 갖게 된 거다.
어쨌든 아직도 편의와 양심 사이에서 타협 중인 현대인은 이렇게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하고 되었고 얼떨결에 제로 웨이스트까지 지향하게 되었다.
앞으로 나는 일상 속 크고 작은 뿌듯함과 실망들을 가감 없이 기록하려고 한다. 며칠 전 <완벽하려고 하면 절대 내 이야기를 할 수 없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 완벽해질지 모를 내 이야기를 그냥 시작하기로 했다.
제로 웨이스트라는 목적지에 가고 싶지만 뛰기는커녕 준비운동 조차 힘겨워하는 미니멀리스트는 Lv.3이 될 수 있을까? 앞으로는 렙업을 향해 삐걱대며 굴러가는 나의 과정을 ‘걍’ 쓸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