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마켓으로 만난 할머니 이야기
중고거래는 귀찮다. 왜 흔하디 흔한 박스는 꼭 내가 쓰려고 하면 없는 건지. 서로 개인정보까지 주고받아야 하며, 어찌어찌 편의점 택배로 보내고 나면 이 복잡한 과정에 비해 나에게 남는 건 얼마 없다.
비움을 향한 귀찮음과 버리기 위한 죄책감을 덜어주는 서비스가 있으니, 바로 당근마켓이다.
G마켓과 11번가를 제치고 쇼핑 앱 이용자 수 2위, 누적 가입자 수 1천만 명을 돌파한 당근마켓은
‘소개한다’고 하기엔 머쓱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당근마켓은 나에게 <비우기 1순위 플랫폼>이다. 그동안 비움에 대한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름대로의 규칙을 세웠다. 물건을 비우는 방법들을 4순위로 나누었고, 비워야 할 물건이 어떤 순위에 속하는지 구분한다.
필요한 사람이 ‘돈을 주고 살만한’ 물건을 쓰레기로 전락시키는 일은 더 이상 안 하기로 했다. 그런 물건은 1순위로 분류해 당근마켓에서 판매를 시도한다. 멀쩡한 쓰레기를 만들었다는 죄책감은 덜고 엄마한테 꽈배기 몇 개를 사주면서 으스댈 수 있다.
그런 고마운 존재인 당근마켓에게 나름 재밌었던 에피소드로 보답을 해보겠다. (이 글을 읽고 단 한 명이라도 이용자가 된다면 성공한 게 아닐까. 한 명은 있겠지)
“당근..?”
당근마켓 이용자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한다. 내가 파악한 룰은 다음과 같다.
1. 직거래를 우선시한다.
2. 구매자가 판매자의 집 앞까지 간다.
3. 거래 상대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가서 말을 건다.
4. “당근이세요..?” 혹은 “(물건 이름)..?”
5. 구매자는 쇼핑백 속 물건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돈을 쥐어주곤 사라진다.
번외. 간혹 구매자의 자차 이용시,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순식간에 거래를 끝내고 부아앙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판매자는 마치 드라이브 쓰루 직원이 된 느낌)
이 소소하고 귀여운 룰을 파악하기 위한 과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3년 전까지는 물건을 사면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보기에 좋으면 냅다 집어 계산대로 직행했다.
이 글의 주인공인 연보라 모자도 그렇게 나에게 오게 된 비운의 물건이었다. 나는 보라색을 좋아하는데 이 모자는 하필 너무 예쁜 연보라색이었다. (변명 아닙니다)
하지만 내 옷 스타일과 연보라 모자는 어울리지 않아서, 햇빛 한 번 보지 못 한 채 장식장 안에 한참을 있었다. 계속 처박혀 있기에는 아까운 물건이라 당근마켓에 연보라 모자를 올렸다.
마케터는 여기서도 어떻게든 선택받기 위해 노력한다. 남들이 그냥 올리는 ‘모자’는 ‘연보라 모자’로, ‘가방’은 ‘출퇴근용 백팩’으로 올린다. 본문에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활용하기 좋은지, 얼마나 새 것인지를 설명한다.
연보라 모자는 봄날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 색인지, 소풍 갈 때 쓰면 얼마나 귀여울지 상상하게 하는 문구를 열심히 써 올린다. 이렇게 하면 보통은 당일 거래를 성사해 재빨리 정리해버릴 수 있는데, 왠지 연보라 모자는 꽤 오랫동안 주인을 찾지 못했다.
당근마켓에는 <끌어올리기>라는 기능이 있다. 내 물건에 대한 반응이 없을 때 버튼 두 번만 누르면 글을 다시 위로 올릴 수 있는 기능이다. 그렇게 잊을만하면 한 번씩 끌올을 당하던 연보라 모자에게, 드디어 메시지가 도착했다.
침착한 말투의 그분은 내가 퇴근길에 들리는 지하철역으로 오신다고 하셨고, 혹시 기다리실까 여유롭게 시간을 정한 나는 경의중앙선에게 또 뒤통수를 맞고 몇 분 늦어버렸다. 친절하게 천천히 오라고 해주신 그분을 위해 연보라 모자와 나는 엄청 서둘러 에스컬레이터를 올랐다.
그분이 있겠다던 지하철 역 안의 작은 도서관에는 사람이 많았다. 난 당황하지 않고 입구 쪽에 서서 쇼핑백을 든 채 ‘나 누구 기다려요’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거래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은 마치 마트 계산대에 줄을 서고 있는데 깜빡한 게 있다며 돌아간 엄마를 기다리는 느낌과 꽤 비슷하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있는 나에게 한 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셨다.
“모자에요~?”
네, 모자에요! 채팅에서 느꼈던 차분한 말투가 어울리는 인상의 할머니는 그냥 봐도 연보라 모자와 너무너무 잘 어울리셨다. 굳이 상상을 하지 않아도 할머니가 연보라 모자를 쓰고 웃으시는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 자리에서 너무 잘 어울리실 것 같다고 박수 짝짝 치면서 주접을 떨었고, 할머니는 마치 ‘그래 맘껏 좋아해라’라고 하시는 것처럼 여전히 차분하게 웃어주셨다.
이처럼 나에게 그저 그런 혹은 그 이하였던 짐이, 누군가는 우리 집 앞까지 와서 데리고 갈 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는 점을 느끼는 일은 꽤 재밌다. 그 누군가와 내 물건이 찰떡같이 잘 어울릴 때는 뿌듯함까지 느껴볼 수 있다.
특히 마케터라면 당근마켓 거래를 해볼 것을 추천한다. 실사용자 입장에서 나름대로 마케팅 포인트를 설정하고 바로 반응을 낼 수 있는 짧은 글쓰기 연습을 할 수 있고, 동네 사람과 대면해서 거래를 한다는 경험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다.
한 인터뷰에서 중고 거래에만 머무를 생각은 없다고 말한 당근마켓 대표님. 함께 운동할 동네 친구부터 구인구직 정보까지 동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역 커뮤니티>로써 진화할 의지를 밝혔다. 언택트 전성시대에 단절된 이웃 간의 소통을 다시 잇고 있는 당근마켓이 어떤 플랫폼으로 더욱 성장할지 기대된다.
사복 입느라고 거의 안 입은 고등학교 교복을 나눔 받은 모교 후배, 안 맞으면 딸 준다고 올려놓은 옷 다 가져가신 어머니, 연보라 모자와 너무 어울리셨던 할머니. 내 손을 떠난 물건들이 저분들에게서 빛을 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가을에는 호수공원에서 연보라 모자를 쓴 할머니를 마주치면 좋겠다.
주인을 찾아주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