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만 원으로 한 달을 살라고?

3화

by 갸리

지하철 요금 400원, 짜장면 한 그릇 2, 000원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1997년 9월 5일 자 동아일보 신문의 한 꼭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대한민국 100대 기업 대학교 졸업자 신입사원 연봉 1위 기업은 장기 신용은행. 3, 380만 원이다. 100대 기업 대졸 초임 평균 연봉은 1, 860만 원. 그리고 통계청 임금구조통계 기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월평균 급여는 113만 6000원. 이때 중기는 첫 직장에서 얼마를 받았을까? 당연히 고졸 학력이니 그들보다 많이 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연봉 845만 원.


정말 그 돈이 중기가 이 사회에서 공부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였을까. 남들이 살벌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고자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었다면, 중기는 그곳에서 벗어나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지 않았을까. 특히나 우리 사회처럼 정형화된 시스템에서 한참 이탈한 자가 다른 무리와 똑같은 대우를 바라는 것은 억지이며 생떼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사회가 주도하는 경쟁 속에 몸을 던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확연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면서도 월급 70만 원도 안 되는 봉투를 받을 때면 마음속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더욱이 퇴직금이라는 명목도 없이 그게 월급의 전부였던 시절이다. 몇 년이 흘러 노동법이 바뀌었다며 퇴직금이라는 명목이 다행히도 붙었다. 직원들은 기뻐하며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회사는 연봉에서 나누기 13을 해서 퇴직금을 만들어내는 창의력을 발휘했는데. 박봉에 시달리던 직원들에게는 하나도 좋을 이유가 없는 노동법 개정이었다. 그저 회사가 주는 대로 회사가 결정한 대로 따라야 했으니까. 회사 이름을 말해도 아무도 모르는 그렇고 그런 중소기업. 그곳에서 시작한 중기 연봉은 어디에 대고 자랑할 거리가 못 됐다. 좋은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이 얼마 받느냐고 물어보면 입 밖으로 꺼내기도 힘든 금액. 중기는 자신이 받는 월급이 100대 기업 대졸 신입사원 평균과 비교해서 45% 수준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적은 월급이라도 직장을 얻었다는 사실이 중요했고 회사에 다닌다는 안도감이 더 컸던 시절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보면 이미 첫출발부터가 상당히 벌어지고 말았다. 평균치의 50% 격차. 이것이 그 사회에서 바라보는 중기의 가치였다. 그런데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그들과의 거리. 이 격차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로부터 20년이 지나도 이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결과가 이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대학생이 되지 못한 것에 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인제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일. 저 단순한 수치가 부모들이 자식에게 대학에 들어가라고 떠들던 입바른 잔소리의 종착지였을지도. 통계는 증명이라도 하듯 보여줬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빅맥지수와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1996년 The Economist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맥도널드 햄버거 가격은 2, 300원.
20171104_155305.jpg 햄버거 2,300원 / 1996년

당시 중기 월급은 세금을 제하면 64만 원 정도가 손에 들어왔다. 하루 세끼 햄버거만 먹는다는 가정을 해도 그의 손에 남는 돈은 고작 43만 3천 원. 대기업이나 복리후생이 좋은 회사들은 직원에게 점심값을 지원해주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들어간 회사에는 전혀 그럴 계획이 없었다. 하물며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휴지도 각자 알아서 준비해야 하는 상황. 그 흔한 일회용 커피도 없어 직원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직원이 노동을 지불하고 받는 대가는 월급이 전부였던 직장. 직원 규모로 보면 작지도 않았던 회사였다. 그 회사에서 근무하는 직원만 해도 많을 때는 천 명이 넘어가는 절대 작지 않았으므로. 매일매일 이어지는 야근 철야라도 열심히 해야 점심 값이나마 벌 수 있었다. 야근 철야 수당으로 받은 돈이 매달 10만 원을 넘겼으니 그나마 생활의 마이너스를 조금은 메꿀 여력이 됐다. 꼴랑 10여만 원으로 말이다.



중기에게는 일본 유학생 시절 벌었던 수입에 1/5밖에 되지 않는 월급. 그 돈으로 가족 세 명이 먹고살아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떠안았다. 일본에서 돈 벌지 왜 한국으로 돌아왔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IMF의 대혼란 시기가 시작되었는데도. 이 물음에 굳이 답을 한다면 밤낮없이 쉬지 못하는 일본 생활에 지쳐 있었기 때문이라고. 경쟁으로부터 도망쳐 떠나온 곳이 실은 더 지옥 같은 세상이었다. 이것이 표면적 이유라면 한국으로 돌아와 제대로 된 직장을 잡아 안정된 생활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정신적 이유다. 하지만 수입이 줄어든 생활은 제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늘어나는 빚을 막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자식들이 성장해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 그 집안의 형편은 좋아지기 마련이지만, 그의 집에 돈을 버는 사람은 오로지 중기 혼자였다. 아무런 복지도 없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아들 하나만으로 집안을 풍족하게 하기는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중기 엄마의 평생소원이 남편 월급봉투를 받아보는 거였다. 그 한(恨)을 남편이 아닌 아들이 풀어줬지만.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봉투가 얇아서야.


매거진의 이전글그래도 취직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