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빠의 신용카드

4화

by 갸리

살다 보면 가끔은 어린 시절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누구에게나 잊히지 않는 기억 한두 개 정도는 있지 않을까. 그것이 가슴 시린 상처일 수도 아니면 행복한 순간일 수도 있다. 즐거웠던 때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괴롭고 슬펐던 상황을 더 잘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무게 1.5Kg의 뇌 안에는 무수히 많은 실타래가 꼬인 것처럼 셀 수 없는 기억들이 세포 속에서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 그중 특히 오래된 기억들은 앞뒤 다 떼고 중간 부분만 뭉뚱그려 생각이 나곤 하는데. 마치 꿈에서 깨어나 한 부분만 생각나는 것처럼. 이렇듯 조각난 기억이 사라지거나 부분 부분 머릿속에서 지워졌지만, 무언가의 계기로 잊었던 그때 그 시간이 그 순간이 문득 되살아나기도 한다. 각박한 삶을 살아내다 보니 몇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들은 유독 지워지지 않는다.



그때가 아마도 중기가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시간이 어느새 저녁 먹을 때가 되었다. 친구 집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끼니를 챙겨 먹는 걱정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 집 냉장고는 풍성한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고 배고프면 자기 집처럼 알아서 꺼내먹으면 그만이었다. 때마침 친구네가 외식한다기에 중기도 내심 좋았다. 자신도 같이 따라갈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워낙에 친한 사이여서 친구 부모님도 중기를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따라서 친구 가족 외식에 빌붙는 건 전혀 부담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단란한 가족 외식에 불청객 하나가 끼이게 되었다. 게다가 누구 하나 눈치를 주거나 면박을 주는 이 없는 즐거운 저녁 시간이었다. 중기 집에서는 외식이라고는 없었기에 그런 기회가 생기면 염치 불고하고 무조건 따라붙었다. 맛있는 식사가 끝나고 식당 입구에 있는 계산대에서 친구 아빠가 외투 속에서 지갑을 꺼냈다. 아주 기다랗고 고급스러운 가죽 지갑이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지폐가 아닌 다른 물건이 나왔다. 바로 그 장면이 중기에게는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게 됐다.


친구 아빠는 현금이 아닌 플라스틱 재질로 된 카드로 결제를 대신했다. 이른바 신용카드라고 하는 전자 화폐. 중기 집에서는 볼 수 없는 물건이라서 순간 친구의 아빠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현금이 아닌 다른 물건으로 음식값을 지불할 수 있다니 놀랍고 대단해 보였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자신의 아빠에게는 지갑이라는 물건은 애당초 없었다. 살면서 아빠의 지갑을 본 적이 없기도 했고 아빠는 돈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친구 아빠가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에 낀 카드를 점원에게 내미는 순간을 잊지 못한다. 마치 초당 120 프레임으로 촬영하는 초고속 카메라로 찍는 영상처럼 동작 하나하나가 느리고 자세하게 머릿속에 각인됐다. 그 시절 중기에게는 지폐를 꺼내는 모습보다 카드를 꺼내 든 모습이 충격이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환상, 아니 그건 환상이 아니라 실재였으니까. 평생을 한량으로 살아온 중기의 아빠. 가족에게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멋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에 중기에게는 더더욱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허구한 날 술에 취해 들어온 중기 아빠. 그의 추레한 바지 주머니에 있는 거라고는 먼지 나부랭이와 달랑 동전 몇 개. 이따금 어디에서 생겼는지 모를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두세 장이 전부였다. 그런 아빠가 돈을 꺼내는 곳은 양복 안주머니가 아닌 항상 바지 호주머니였다. 그나마 돈이 몇 푼 있는 날이라면.



중기 아빠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본 일이 없는 인간이다. 집안에 있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들고나가는 위인이었지 들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의 호주머니에 신용카드가 있을 리 만무하거니와 신용카드 한 장 만드는 것도 중기네 사정으로는 여의치 않았다. 그 시절 신용카드는 정확한 수입원이 있어야 했고, 제대로 된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 있는, 그야말로 신용이 보장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신분증 같았다. 1995년도에 이미 2천200만 매의 신용카드가 한국에서 사용되었다. 그 흔한 신용카드 한 장 없던 중기 집안 형편은 말할 필요도 없이 어려웠다. 신용카드 한 장으로 빈부를 따질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회에서 인정한 기준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었다. 고등학생인 중기의 머릿속에는 신용카드를 가진 사람은 번듯한 직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빈둥빈둥 놀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자신의 아빠에게는 없는 것. 어린 중기에게는 그것이 빈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다. 아무나 만들 수 없는 카드. 정확한 신용을 검증받은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카드. 돈을 버는 사람이 없는 그의 집과는 무관한 물건이었다. 그래도 그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신용카드가 보급되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한 단계 신분이 올라간 듯한 대접을 받았던 사회적 분위기에 그의 집은 올라타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카드는 특정 신분이 아니면 발급받을 자격이 없었으므로. 아마도 한 집안의 형편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던 시기가 그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이야 아무나 만들 수 있는 물건이 되고 말았지만. 과거 한때는 신분의 고하를 구분 짓던 물건임은 분명했다. 마냥 부럽기만 했던 플라스틱 카드 한 장이 먼 훗날 빚의 시발점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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