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1892년 폴 고갱은 타히티섬에서 검은 피부의 두 여인을 그렸다. 앞쪽 여인은 타히티의 전통 의상을 입은 듯 보이고 뒤쪽 여인은 유럽식 드레스를 입었다. 앞에 앉은 여인은 왼쪽 귀에 꽃을 꽂았다. 타히티의 전통에 따르면 꽃을 꽂는 것은 누군가의 사랑을 바라고 있다는 의미이다. 아마도 고갱의 눈에 두 여인은 결혼할 나이가 됐으리라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고갱은 이 그림의 제목을 아래와 같이 정하지 않았을까.
"언제 결혼할 거니?"
중기도 어느덧 서른. 그에게도 결혼이라는 단어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고갱이 그림 속 타히티의 여인에게 물었던 것처럼 그의 친구나 선배들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다만 한 가지 차이라면 캔버스가 아닌 술자리에서 이런 대화가 오간다는 것. 술자리가 무르익어 모두들 거나하게 취하면 결혼에 관한 이야기보따리가 풀리는데.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이 대립하며 승부가 나지 않는다. 가운데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중기에게 선배가 묻는다.
"언제 결혼할 거니?"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결혼을 하라고 묻는 건지, 하지 말라고 묻는 건지 중기는 가늠할 수 없다. 중기도 그 언제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는 가을이 와도 식지 않았다. 거리에는 여전히 붉은 기운이 떠다녔고. 상점마다 내 건 대한민국 축구 역사상 첫 4강을 기념하는 특별 세일 문구들. 월드컵의 다이내믹하고 밝은 분위기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도시 전체가 하늘 위로 붕 뜬 느낌이랄까. 그러나 중기는 그런 열광이 넘치는 장소에 함께 하지 못하였다. 축구장은커녕 길거리 응원 한 번 나가보지 못하고 회사에 박혀서 밀린 일과 싸우던 나날. 수많은 인파에 파묻혀 우렁차게 '대~한~민국'을 외쳐보지 못한 아쉬움은 정말로 크다. 다행히도 그런 아쉬웠던 마음을 달래줄 이벤트는 따로 있었다. 한여름 광기 어렸던 열기를 이어받아 그에게도 가정을 꾸리는 공동 주연 배역이 주어졌다. 즉 두 사람만의 드라마가 시작했다. 이 드라마에는 감독이 없다. 게다가 작가도 없다. 그와 그녀가 감독이자 주연 배우이다. 또한, 작가이기도 하며. 앞으로 이 장편 드라마가 막장극으로 결말을 맺을지 해피앤딩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항구를 떠난 배가 거친 파도를 해쳐나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맡은 배역에 충실해야 한다. 오직 둘만이 배를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전 회사 동료나 선배 혹은 친구들에게 자주 듣던 말.
“너는 언제 결혼할 거니? 결혼 안 해?”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중기는 앵무새가 되었다. 언제나 같은 말만 반복하는 앵무새.
“아직 준비가 덜 됐어.”
중기의 머릿속에는 결혼은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로부터 15년 후. 회사 사람들과 술자리에서 그때와 똑같은 상황을 마주했다. 이번엔 처지가 바뀌어 중기가 그때의 선배가 되었고 중기는 묻고 후배는 자신 없는 대답을 했다. 참 신기하게도 중기가 했던 답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으니. 마치 데자뷔를 보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 결혼에 주저하는 모습. 그 옛날 자신의 모습을 연상시켜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남자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와 같이 생각하는 어린 친구들을 볼 때면 중기는 서슴없이 말한다.
고민하지 말고 결혼할 생각이 있으면 빨리해라.
늦으면 늦을수록 너만 손해야.
이런 경우 여자라면 아마도
결혼해봐야 너만 고생이야.
그딴 걸 뭣 하러 해!
하지 마!
혼자 살아!
이런 대답이 돌아왔을지도.
‘아직 준비가 덜 됐어.’ 이 말은 도대체 어떤 뜻일까?
이 말은 ‘나에게는 가정을 꾸릴 만한 돈이 없어’와 같은 뜻이다. 변변찮은 전세 한 칸 구할 돈이 없다는 것이 더 현실적인 답변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박봉에 시달려 문화생활조차 누리기 힘든 중기와 같은 젊은이도 있다. 특히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작은 회사에 다니는 젊은이가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답변을 할 날은 까마득히 멀어 보인다. 점점 더 결혼의 전제조건은 복잡해지고 장벽은 높아질 것이다. 과연 그들의 입에서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을 꺼낼 수나 있을까? 흔한 말로 금수저를 제외하곤 솔직히 아무런 기약이 없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중기 주변에는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다.
‘결혼이 뭐 별거 있어? 그냥 둘이 합쳐야 돈을 모을 수 있어’
남자 혼자서는 절대 돈을 모을 수 없다는 논리. 이런 말이 공공연한 진실로 둔갑해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져나간다. 정말로 결혼하지 않으면 돈을 모을 수 없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이렇듯 과학으로 입증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말에 불과한데도 딱히 반박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가진 게 없던 중기에게는 그 말이 오히려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들이 말한 대로 ‘결혼이 뭐 별거 있어?' 라며. 책임지지도 못할 말에 무모함만이 싹을 틔웠으니까.
한편 아내라는 새로운 호칭을 얻게 되는 그녀. 그녀에게는 이 결혼이 천 길 낭떠러지 절벽이 될지도 모르는 길이다. 험난하고 위태로운 인생길을 함께 헤쳐나가자는 수컷의 이기심에 여자는 속아 넘어가고. 중기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그때는 그런 무모함이 조금은 통하던 시대라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어떤가. 무모함을 무릅쓰고 결혼으로 이어지기에는 너무도 높은 장벽이 앞에 가로막고 있다.
고갱은 여자를 그리며 질문을 던졌다.
"언제 결혼할 거니?"
그림 속 여자는 이렇게 답변을 했을지도.
"아마도 곧요. 나를 사랑해주는 이가 곁에 있으니까요."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 있다면 다른 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어쩌면 그 시대라면 답변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많은 조건을 생각하고 따져봐야 하는 시대가 아니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