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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갸리 Mar 21. 2018

흰 [한강]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생과 사 = 흰색


처음에 이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짝 의문이 들었다. 분명히 소설이라고 했는데 읽다 보니 에세이 같기도, 소설 같기도, 시집 한 권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책 한 권에서 세 가지 장르를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흰' 것과 관련된 단어로 책을 쓸 생각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도 가끔은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를 단어장에 마구 적어보기는 하지만 정작 그 단어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단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세상에 있는 만물 중에 흰색을 띠는 걸 적어보라고 했을 때, 과연 몇 단어나 적을 수 있을까. 한강 작가의 '흰'에서 나오는 하얀 것과 관련된 단어들은 제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야기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이어져 나간다. 앞에 나왔던 흰색의 단어들이 다음 장에 자연스럽게 녹아내린다. 


'이런 단어들로 심장을 문지른다'라는 표현은 정말 마음에 쏙 드는 문장이다. 작가가 표현한 구절구절마다 정말 심장을 문지르고 문질러서 짜낸 엄선된 문장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결코 가볍게 쓰지 않은, 그야말로 백지에 꾹꾹 눌러쓴 흔적은 독자에게 몇 번씩 다시 읽게 하는 힘을 가졌다.


특히 아기를 혼자 출산하는 엄마의 아슬아슬한 상황의 묘사와 그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짧았던 이승에서의 시간을 그려낸 '배내옷' 편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살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가진 엄마가 아기에게 할 수 있었던 말.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엄마는 이 아기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에 더더욱 죽지 말라고 속삭였던 것 같다. 그 슬픔을 고스란히 혼자서 견뎌야 했던 엄마. 이야기 후반부 '작별'에서는 그 엄마의 딸이자 작가 자신인 듯한 화자가 먼저 세상을 떠났던 언니에게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고 말한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 인사라고 믿으며.  


이 책에서 흰색은 삶의 시작이자 끝이 아닐까 한다. 태어나서 하얀 강보로 덮인 아기는 죽어서도 하얀 강보 그대로 땅에 묻힌다. 생각해보면 하얀색은 시작을 뜻하는 것 같다.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하얀 종이 위에서 시작한다. 처음부터 검은 종이나 색깔 있는 종이로 시작하는 예는 거의 없다. 하얀 백지 위에서 단어는 문장이 되고 문장은 글이 되며, 그 글은 사람들에게 여운을 준다. 시작하는 의미로 하얀색을 이길만 한 것이 있을까 싶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끝, 다시 말해 죽음의 의미도 마찬가지로 흰색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안타깝게 죽은 아기를 하얀 천으로 싸서 산으로 올라가 묻었다는 아빠의 말은 그대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한마디로 생과 사는 '흰'색이라 요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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