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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갸리 Jun 25. 2018

며느리 사표 [영주]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신으로 바뀌는 것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신으로 바뀌는 것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여자는 자신에게 소중한, 어머니를 업고 살았습니다.
여자는 결혼하여 그 자리에
남편과 남편의 아버지 어머니를 업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자 그 위에 아들과 딸도 업었습니다.
몸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점점 힘들고 지쳤지만
그래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무도 여자에게 업지 않고도, 서로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업혀 사는 이들은 집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었습니다.
업고 사는 여자는 집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곳이었습니다.
여자는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내리라고 했지만
그럴수록 여자의 등에서 더욱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업고 살았던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업었다 내리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여자는 용기를 냈습니다.
남편을 내렸습니다.
남편의 아버지 어머니를 내리고 아이들도 내렸습니다.
그리고 등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내리고 보니 그들이 업힌 것이 아니라
여자 스스로 업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자는 업고 업히는 삶이
누구에게도 행복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행복의 시작임을 배워갑니다.

여자는 일 인분으로 살아갑니다.

한 여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시댁에 찾아가 시부모님께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밉니다. 봉투의 겉면에는 '며느리 사표'라고 적혀있을 뿐 아무런 내용이 없는 봉투입니다. 여자는 23년 동안 해왔던 맏며느리의 역할을 내려놓고 싶다며 무거운 입을 뗍니다. 여자의 사연을 들은 시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가 많이 힘들었구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너희들이 마음 편하게 잘 살면 그것으로 됐다.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잘 살 테니 걱정 말아라. 그동안 고생 많았고, 아비로서 미안하다."


여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왜일까요? 그렇게 힘든 맏며느리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눈물이 난다고 하니. 예상치 못했던 시부모의 태도. 맏며느리의 고달프고 힘들었던 나날을 이해한다는 시부모의 따뜻한 배려심 때문이었을까요? 그래서 여자는 도리어 죄책감마저 듭니다. 차라리 꾸중을 듣거나 욕이라도 들었다면 어렵게 내민 '며느리 사표'에 당당함이 넘쳤을 것이고, 반대로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합니다. 


이 책의 첫 장을 읽으며 정말 놀라웠다. 회사에서나 사표를 쓰지 집안에서 사표를 던지다니, 하물며 '며느리 사표'라는 타이틀을 달아서 시부모에게 내밀 용기 있는 며느리는 과연 이 나라에서 몇이 될까? 2016년 3월의 어느 날, 알파고와의 제4국에서 이세돌이 던진 신의 한 수가 떠오른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묘수로 이세돌은 구글이 자랑하는 슈퍼컴퓨터에 통쾌한 1승을 거두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저자 또한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수를 두었다. 바둑으로 치자면 9단, 아니 10단이라고 해도 무방할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상대로 한 어려운 1국. 맏며느리 23년의 경력이라고 해봐야 시부모 앞에서는 초라한 햇병아리에 불과하다. 어디로 보나 승산이 없는 게임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가부장적인 사회 아래에서는. 이 대결에서 며느리는 초강수를 둔다. '며느리 사표'가 그것이다. 두려운 마음에 굴하지 않고 용기를 냈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일 인분으로 살아갈 자아의 재발견이었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며느리 탈출이라는 주제로 시작한다. 대한민국에서 며느리의 삶은 고달프다는 단어로 함축될 만큼 입이 아프게 거론됐고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데 저자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신으로 바뀌는 것.' 결혼 전에는 어머니를 업었고, 결혼하고 나선 남편과 시부모를 등에 지고, 아이들이 태어나서 아이들까지 업게 된 여자의 삶. 그 속에서 1인 4역의 역할을 담당한 여자. 이런 세상이 드라마 같은 픽션의 세계라면, 연속극만 끝나면 역할은 종료가 된다. 하지만 실제 삶으로 이어지는 일인다역의 역할은 누군가에게는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그 세월이 20년, 30년으로 이어진다면 어떨까? 아마도 몸이 삭아서 쓰러지기 전에 마음과 정신에 큰 구멍이 뚫려 자아를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악순환을 끊어내는 방법은 먼저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반복된 습관을 바꿀 수 있는 힘은 간절함이라는 것. 간절하다면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절실할 때는 그 어떤 일도, 심지어 죽음까지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행동한다.


저자는 일 인분의 삶을 찾기 위해 행동했다. 불행한 현재가 미래에까지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시부모 앞에서 힘들지만 어려운 결단을 내려 '며느리 사표'를 던진다.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누구나 낭만적인 결혼 생활을 꿈꾸지만, 실상은 재난의 예고다. 이런 재난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서로 다름에 대해 관심과 이해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각자의 모습을 존중함으로써 재난 같은 결혼 생활이 다시 낭만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것.


같이 읽으면 좋을 책 :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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